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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현실] 병곡역 난투 사건
    병곡역 난투 사건

    1644년 음력 12월21일, 경상도 병곡역(현 경북 영덕군 병곡면)에 근무하는 역인(驛人)들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갓 무과에 합격한 선달들이 변방 부임지에 가는 길에 단체로 병곡역을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원은 관료들의 공무 여행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므로, 이들의 이용이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겨우 무과나 합격한 선달들이 꼴에 양반이라고 종까지 대동하고 떼로 들이닥쳤으니, 평소 높은 관료들에게 시달려온 역인들의 얼굴빛이 좋을 리 없었다.역인들의 짜증은 선달들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났고, 이러한 태도는 무관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선달들에게 푸대접으로 읽혔다. 특히 울산에서 출발했던 선달 박취문과 박이명, 그리고 이확은 이미 지나온 역에서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역원의 기강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명분을 만들어, 강력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역로를 따라 소문이 퍼져 다른 역의 대접이 좀 더 나아질 수도 있을 터였다. 박이...

    2024.01.31 20:18

  • [역사와 현실] 회색 코뿔소
    회색 코뿔소

    큰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오랫동안 방치하여 위험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회색 코뿔소’라고 한다. 2013년 미셸 부커가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말한 개념이다. 한국에도 몇 마리의 회색 코뿔소가 배회한다. 그중 하나가 사회의 양극화이다.회색 코뿔소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존재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그 나라 지배층 구성의 핵심적 원리에 내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는 지역적 양극화 경향을 내포하는 중앙집권제를 유지해왔다. 양극화를 초래하는 직접적 요인은 과거와 다르나, 그 결과는 비슷한 데가 많다.조선시대에 지배층 지위를 유지하고, 또 지배층 내에서도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필수 관문은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은 크게 두 종류였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와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특별시험인 별시가 그것이다. 별시는 한 번에 뽑는 인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식년시보다는 그 수가 적었...

    2024.01.24 20:16

  • [역사와 현실] 보석 같은 대만 민주주의
    보석 같은 대만 민주주의

    지난 13일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는 감격적이다.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성숙한 모습을 세계에 과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와 독재의 ‘가치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독재국가의 큰형 격인 중국의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 멋지다. 여기서 근대 동아시아 헌정사를 잠시 살펴보자. 군현제(郡縣制)보다 봉건제 사회에서 신분제가 더욱 강고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은 알려진 대로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신분의회에서 출발한 의회제가 조선, 중국 같은 군현제보다 유럽, 일본 같은 봉건제 국가에서 발생하고 쉽게 수용된 것은 이해될 만하다. 물론 일본도 메이지유신에서 의회 설립까지 23년이 걸렸고, 1903년까지 5차례의 의회 폐쇄 위기가 있었지만, 군국주의 때도 미군점령기에도 결국 폐쇄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반면 한국과 중국의 헌정 도입은 난항이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군주 측이 헌정 도입(내각, 의회 창설)을 군주권 제약으로 경계했기 때문이다(박훈 <근대초기 한...

    2024.01.17 19:52

  • [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5조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5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문해력을 ‘역사 리터러시’라고 지칭하고 틈나는 대로 그 규칙을 다듬어보는 중이다. 오늘은 그 규칙 제5조,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규칙 하나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바로 “역사에서 변화하지 않는 원칙은 딱 한 가지, 역사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명당 한양에 대해 짚어보겠다.지금 서울의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한양은 명당일까? 고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이 개경을 보완해줄 명당이라며 남쪽의 서울이라는 뜻으로 남경으로 개창했다. 고려 말 사람들은 남경에 국왕이 머물러서 개경의 지덕(地德)을 왕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왕대·공양왕대에는 실행에 옮겨지기도 했다.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그 기세를 몰아 아예 한양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반대가 거셌다. 황당한 건 바로 2년 전엔 한양이 명당이라고 한 사람들이, 이제는 한양에 문제가 많다고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뒤로 다 돌산이라 물 흐름이 길지 않아 사람이 끊긴다느니, ...

    2024.01.10 19:50

  • 무명이 신분인 사회

    근래 개인적으로 무명 가수들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게인 3>를 즐겨 본다.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음반을 낸 경험 있는 무명 가수들이 참여하는 경연이다 보니 참가자들의 실력은 담보되어 있다. 거기에 참가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개인의 사연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 노래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런데 가끔 그들의 음악보다 나의 귀를 더 사로잡은 것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가수 임재범이 내뱉는 “에휴…” 하는 낮은 탄식이다.가수 임재범의 이 탄식은 주로 실력이 뛰어남에도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해 온 참가자의 노래를 들을 때 터져 나온다. 이 탄식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온 임재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이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명으로 버텨 온 동료·후배 가수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읽힌다. 또한 더 이상 무명으로 버틸 수 없어, 마지막 한 번만 더 유명 가수에 도전하는 아픈 현실에 대한 탄식으로도 읽힌다. 1707년 음력 11월16...

    2024.01.03 22:23

  • [역사와 현실] 하청과 방납
    하청과 방납

    한 유튜브 방송에서 여러 해 전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김용균씨와 ‘구의역 김군’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구의역은 서울 광진구에 있는 지하철 2호선 역이다. 구의역 김군 사망 사건이 2016년 5월28일에 일어났고, 김용균씨 사망 사건이 2018년 12월11일에 일어났으니 벌써 7년과 5년 전 일이다. 내 일상 밖 일이기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유튜브로 환기된 기억에 무심하기는 어려웠다.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다. 불과 19세, 24세 나이에 하청업체 노동자로 위험한 일을 혼자 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고라니. 더구나 그것이 완전히 합법적으로 진행된 일이었다는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일깨워준다.그런데 그 유튜브 방송 진행자는 정작 두 사람의 죽음이 아닌, 사망 당시 그들이 받았던 임금에 주목했다. 김용균씨의 월급은 226만원이었고, 김군의 월급은 130만원이었다. 반면 원청업체가 이들의 월급으로 하청업...

    2023.12.27 22:21

  • [역사와 현실] 도쿠가와 막부 멸망은 ‘오오쿠’로부터
    도쿠가와 막부 멸망은 ‘오오쿠’로부터

    도쿠가와 막부 에도성(江戶城)의 메인 빌딩(혼마루고텐, 本丸御殿)은 신하들이 정무를 보는 오모테무키(表向), 쇼군(將軍)의 집무실인 나카오쿠(仲奧), 그리고 쇼군의 정처와 후궁들이 거주하는 오오쿠(大奧)로 나뉘어 있었다. 오모테무키, 나카오쿠의 면적을 합쳐도 4688평이었던 데 비해, 오오쿠는 6310평이었다. 안 그래도 사치스러웠던 오오쿠는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1773~1841) 재임기에 더욱 호화로워졌다. 보통 쇼군은 7·8명 정도의 측실을 두었는데 이 사람은 약 40명을 두었다. 그중에 정실(미다이 도코로, 御台所)을 포함해 17명의 여인에게서 자녀 55명을 낳았다. 측실이 많아지니 자연히 부속인원과 경비도 한층 늘어, 많을 때는 오오쿠 인...

    2023.12.20 14:46

  • [역사와 현실] 김장과 낙천성
    김장과 낙천성

    김치를 좋아한다. 김치찌개에 김치볶음밥을 놓고서도 깍두기를 곁들여 먹는 사람이다. 김장을 할 때면 6가지 이상을 담그고, 밥상에는 늘 3종 이상의 김치가 올라오던 집 출신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형제들은 나 정도는 아닌 걸 보면 그냥 타고나길 그런 것 같기도 하다.애정의 정도에 비해 담그는 데는 재주가 없다. 할 줄 모르니 친정에서 김장을 할 때도 채칼로 무채 썰기라든가 대야 옮기기, 양념 붓기 같은 단순 작업밖에 못했다. 그러나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딱 한 가지 재주를 갖고 있으니, 바로 간을 기가 막히게 본다는 것이다. 익었을 때 맛있을 정도를 가늠할 줄 아는 미각 말이다. 맛을 보고 싱겁다 짜다 운운하며 이러저러 지휘를 하면, 어른들이 투덜대곤 하셨다.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다고. 그러나 어찌하리. 어른들 입맛은 둔해진 것을.이렇듯 김치를 좋아하지만 사정이 생겨 10여년 전부터는 친정과 시집에서 담근 김치를 얻어먹을 수 ...

    2023.12.13 20:20

  • [역사와 현실] 진상의 역설
    진상의 역설

    비교적 오래된 이야기지만, 청어는 한때 우리네 겨울 밥상을 풍성하게 만든 대표 생선이었다. 오죽 흔했으면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 정도였을까 싶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이제는 꽁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날이 쌀쌀해지면 살에 기름기가 올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보니, 겨울이 되면 조선시대 왕의 밥상에도 생청어가 빠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 시기 동해와 남해 일부를 관할했던 경상감사 진상품 가운데 하나가 청어였던 이유이다.272년 전인 1751년 음력 10월18일, 경상감사 조재호는 시름에 빠져 있었다. 매월 음력 보름(15일)이면 끝냈어야 할 진상이 3일이 지나도록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었다. 다른 물품들은 품질과 수량 점검을 거쳐 진상 준비를 모두 마쳤지만, 아직 생청어가 봉입되지 않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음력 10월 초부터 가능한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청어잡이에 나서도록 독려했지만, 그해 유난히 따뜻했던 바닷물로 인해 청어가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송구함으로...

    2023.12.06 20:43

  • [역사와 현실] 늙어가는 대한민국
    늙어가는 대한민국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44세이고, 대한민국 사람들을 나이 순서로 세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연령을 의미하는 중위 연령은 이보다 한 살 많은 45세이다. 그런데 2002년 한국인의 중위 연령은 31.8세였다. 20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위 연령이 13년 정도 높아진 것이다. 아마도 출산율은 낮아지고 평균수명은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 전체 수준에서 나타난 변화라는 면에서 대단히 급격하다.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대체로 주변의 환경변화를 수용하는 정도가 떨어진다. 사람들은 10대, 20대에 얻은 경험, 가치관, 문화 속에서 이후 생애를 살아간다. 30세 이후에 생활방식이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일본이 한국보다 사회의 디지털화 수용 정도가 전반적으로 늦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 이유를 일본이 한국보다 사회 고령화 상황을 일찍 맞은 것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일리가 있다.사회의 노화가 사회 구성원의...

    2023.11.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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