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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현실]마케팅과 정체성
    마케팅과 정체성

    화제였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못 보았다. 삼촌 세조에게 퇴위당해서 강원도 영월로 쫓겨가 17세에 살해된 단종 이야기라 들었다. 어떤 사회적 사건은 후속 사건을 계속해 빚어내며 그것이 일어난 사회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다. 1453년 세조가 쿠데타로 권력을 차지한 계유정난, 2년 뒤 세조의 즉위, 다시 2년 뒤 단종의 죽음은 그 후 조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건들을 빚어내며 조선 지식인들의 정치적 감수성에 영향을 주었다.세조 즉위 이듬해에 일어난 ‘사육신 사건’은 단종 복위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았다. 일부 현직 관리들이 다른 핑계를 대며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과거를 준비하던 젊은 유생들이 시험을 포기했다. 뒤이은 성종도 어려서 즉위했다. 그런데 그가 성년을 맞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자 오래 억눌렸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478년 20대 중반 유생들이 올린 상소가 조정을 뒤흔들었다. 세조의 신하들을 조정...

    2026.05.27 20:06

  • [역사와 현실]토끼는 항상 거북을 이겨야 할까
    토끼는 항상 거북을 이겨야 할까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 전 대통령인 오바마와 바이든, 전 하원의장 펠로시가 오물에 빠져 있는 인공지능(AI) 생성 이미지를 올려 물의를 빚고 있다. 제목은 “멍청한 민주당원들(dumacrats)은 오물을 사랑해”이다. 여기서 ‘멍청한(dumb)’과 ‘민주당원들(democrats)’을 합성한 기상천외한 신조어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정치인들을 향해 “반역자” “저능아” “기괴한 자” “공산주의자 미치광이” 등 저속하고 노골적인 말폭탄을 퍼붓고 있다.이런 정치적 막말은 최근 민주당 전 부통령 후보가 트럼프 진영을 가리켜 “그들은 이상하다”고 꼬집은 것에 대한 응수다. 그러나 멀리 보면 민주당 전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한심한 자들(deplorables)”이라고 비하한 것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다. 민주당 입장에선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다. 어쨌든 현재 미국 정치는 멍청한 자들과 한심한 자들의 대립 구도에서 권좌...

    2026.05.20 20:07

  • [역사와 현실]박성재 재판서 주목해야 할 것
    박성재 재판서 주목해야 할 것

    5·18민주화운동 46주년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 12·3 내란 사태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 속속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일련의 재판 과정에서 유독 뇌리에 박힌 장면이 있다. 4월27일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서울중앙지법 결심공판에서 내란 특검 정재인 검사가 구형 논고문을 낭독하던 순간이다. 정 검사는 박 전 장관이 ‘법 기술’을 실행했다고 비판하며 “법의 이름으로 법을 파괴하는 법 기술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내려달라”고 징역 20년을 구형했다.누군가는 이상민, 김용현 등과 달리 박성재의 행동이 소극적 동조에 그쳤다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2분 만에 끝난 국무회의에 합법적 외피를 씌우기 위해 참석자 명단과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최상목·조태열이 비상계엄에 반대 의견을 낼 때 “경제와 외교가 걱정되는 모양이죠”라며 비아냥거렸다. 과천 법무부 청사로 이동하는 차량에서 출국금지팀을 비상대기시키고, 도착 즉시 전국 교정시...

    2026.05.13 20:02

  • [역사와 현실]강한 군대의 조건
    강한 군대의 조건

    1584년 음력 3월20일, 선조는 친히 군의 준비 태세를 점검하고, 무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사를 진행했다. 길주목(현재 서울 구로구 일대) 후원인 반송(盤松)에서 군사들 진법 훈련을 주관하고, 친히 포를 쏘는 모습도 연출했다. 나아가 신임 무관 선발을 위한 무과시험까지 시행함으로써, 국방에 대한 왕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선조가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해 2월 북쪽 국경에서는 번호(藩胡)들이 난을 일으켜 경원부를 함락하는 일이 있었다. 번호는 조공을 바치고 조선과 무역을 하는 국경 지역 이민족들로, 조선과의 관계를 터전 삼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평소 이들은 조선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국경지대에 위치한 그들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외적 침입을 미리 알려주는 등 국가 방위의 중요한 정보 자산으로 활동했다.그런 번호들이 난을 일으켜 국경 지역을 함락했으니 선조로서도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늘 대비해야 ...

    2026.05.06 19:54

  • [역사와 현실]향음주례와 회식
    향음주례와 회식

    1990년 전후만 해도 막 성인이 된 대학생들이 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고, 온라인 게임처럼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수단이나 ‘카페’도 별로 없었다. 친구나 선후배와의 술자리는 잦았고 한 번 술자리에서 마시는 음주량도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회식’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었을 뿐 음주 문화는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직장으로 음주의 공간과 구성원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런 음주 문화도 나름의 역사적 기원이 있는 듯하다.조선 시대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술자리 예식이 있었다. ‘향(鄕)’은 향촌, 즉 어떤 ‘지역’을 뜻하고 ‘음주(飮酒)’는 말 그대로 술을 마신다는 뜻이며, ‘례(禮)’는 의례, 즉 세리머니(ceremony)다. 매년 음력 10월, 향촌의 선비나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삼아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것이다.생각해보면 향음주례는 이상한 세리머니...

    2026.04.29 20:20

  • [역사와 현실]절대 권력은 말이 필요 없거늘
    절대 권력은 말이 필요 없거늘

    초강대국 미국이 이란을 압도적 군사력으로 타격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절대 권력을 초조하게 강변하는 현실이 어딘지 불안하고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절대 권력의 부름에 우방들이 즉각 응하지 않는 현실도 낯설고 비현실적이다. 절대 권력이란 무엇이고, 권력은 얼마만큼 절대적일 수 있을까? 문득 전쟁과 내전, 혁명이 교차한 17세기 영국에서 절대 주권을 정당화한 토머스 홉스가 떠오른다.이 비범하고 명석한 철학자는 법이 없는 자연 상태를 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 무법 상태에서 개인들은 모두 평등하다. 약자도 강자를 죽일 힘이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말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그런 자연적 평등 외에 타인을 침해하고서라도 자기 생명을 보존할 자연적 권리도 있으므로, 거기서의 삶은 “고독하고, 비참하며, 험난하고, 잔인하며, 짧다”. 그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견디긴 힘들다. 평화와 질서를 얻기 위해 개인들은 계약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주권자에게 복종한...

    2026.04.22 19:59

  • [역사와 현실]침묵을 이겨낸 ‘작은 주체들’
    침묵을 이겨낸 ‘작은 주체들’

    1979년 안동가톨릭농민회 사건은 유신정권 말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해 봄 안동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이었던 오원춘이 정부에서 받은 불량감자 피해보상활동에 앞장섰다가 기관원들에게 납치·구금당했다.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은 정권의 연속적인 ‘무리수’ 속에 전국 가톨릭교회와 정권의 대립으로 변화하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도할까’라는 감정을 누적시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레나도 주교가 있었다.두봉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954년 한국에 도착했고, 1969년 천주교 안동교구가 설정되며 초대 교구장에 부임하게 되었다. 안동가톨릭농민회 사건 와중에 유신정부는 농민들 편에 선 그에게 ‘자진출국’ 명령을 내렸으나, 바티칸 교황청은 끝내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결국 10·26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며 농민회 사건은 체제의 종언을 예고한 전조로 기록됐다. 지난 10일이 바로 그 두봉 주교의 선종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2026.04.15 19:59

  • [역사와 현실]전쟁과 호미 한 자루
    전쟁과 호미 한 자루

    임진왜란 3년차에 접어든 1594년 음력 2월14일, 오희문은 슬픔을 억누른 채 길을 나서야 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잠시 다른 피란처에 있던 어머니를 뵐 수 있었지만, 여전히 떨어져야 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전쟁은 그렇게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들었지만, 그나마 양반이어서 가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달랐다.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다 금구 땅(지금의 전북 김제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오희문은 길가에 거적으로 덮여 있는 시신을 보았다. 전쟁통에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지 못해 길거리에 시신이 나뒹구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옆에서 울고 있는 두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거적에 덮여 있는 시신은 두 아이의 어머니로, 굶주림과 병으로 전날 죽었다고 했다. 전쟁보다 더 잔혹한 겨울은 겨우 넘겼지만, 따뜻한 바람 속에 숨어 온 보릿고개의 초입을 견디지 못해 생명줄을 놓아 버렸다.아이들의 울음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

    2026.04.08 19:47

  • [역사와 현실]공무원의 자격
    공무원의 자격

    1651년 7월, 조정은 최초의 대동법을 충청도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다양한 반대 세력의 오랜 저항을 극복하고 나온 결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김육이다.충청도의 대동법 실시 결정 직후 김육이 한 첫 번째 일은 주무 부서 책임자인 호조판서를 교체한 것이었다. 당시 호조판서는 원두표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몇명 안 남은 인조반정 공신이었고, 10년이나 전라도 관찰사, 즉 감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한 도의 감사에 10년이나 재직하는 일은 예외적이었다. 그만큼 왕의 신뢰가 깊었다. 그는 감사를 지내며 궁중에 필요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조달했다. 이 물자가 바로 대동법 개혁의 대상인 공물과 진상이다. 전라 감사를 마친 후에 그의 손자가 효종의 딸과 혼인했다. 즉 원두표는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김육은 효종에게 요청해서 호조판서를 원두표에서 이시방으로 교체했다. 당시 조정의 대표적인 재정 관료 두 사람이 원두표와 이시방이었다. 둘 사이가 안 좋은 것...

    2026.04.01 19:52

  • [역사와 현실]후퇴하는 미국 민주주의
    후퇴하는 미국 민주주의

    이란 전쟁은 왜 시작되었는지도 불분명하거니와, 어떻게 끝날지도 짐작할 수 없게 전개되고 있다. 수많은 예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저명한 미국 역사학자가 단연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할 만한 예측을 내놓아 주목을 끈다. 통상 역사학자는 과거를 다루는 사람이니만큼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예측한다고 해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상례다. 그런데도 역사학자로서 과감하고도 구체적인 예측을 시도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프랑스 근대사를 전공하고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한 로버트 단턴이 최근 이란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가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지지율 하락을 겪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중간선거를 중단하거나 연기하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 혼자 선거를 보이콧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예측일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중간선거가 실제로 중단되거나 연기될지 여부가 아니라 그런 시나리오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트럼프 시대 미국 민주주의의 상황이 ...

    2026.03.2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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