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역사와 현실
  • [역사와 현실]말과 정치
    말과 정치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1581년(선조 14년) 10월11일,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낮에도 캄캄하고 천둥 번개가 크게 쳤다. 닷새 뒤 임금이 이 재이(災異), 즉 기상이변에 대해 대신들을 맞아 자문했다. 영의정, 6조 판서, 한성판윤 등이 입궐했다. “천변이 비상하니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는가”라고 임금이 물었다. 조선시대에는 ‘천견설’ ‘천인감응론’이라는 이론이 있었다. 임금이 덕을 잃으면 하늘이 재이를 일으켜 꾸짖고, 인간의 행위와 하늘의 현상이 상호작용한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보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비중이 훨씬 높았기에 사람들이 자연현상에 더 민감했다. 그래도 임금과 신하들이 두 이론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재이가 발생하면 국정의 잠재적 위험과 문제점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곤 했다. 실제로 재이 대응책을 묻는 임금의 태도가 다소 형식적이자 호조판서 이이가 이를 지적했다.“재이는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의 갈림길에 ...

    2025.06.18 21:22

  • [역사와 현실]난세를 통과하는 법
    난세를 통과하는 법

    세상은 어지럽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정녕 어렵다. 사람들은 난세를 통과하는 법을 알려고 현자에도 문의하고 종교에도 귀의하며 처세술이나 역술에도 의지한다. 그러나 역사만큼 확실한 방법을 귀띔해주는 것도 달리 없다. 과거를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야말로 생생한 지침과 교훈을 제공하는 법이다. 그러니 역사에 늘 눈과 귀를 열어둘 필요가 있다.현자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운은 끊임없이 바뀌고 세상사는 변화무쌍하지만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요행히 시대의 요구와 사람의 성격이 맞아떨어지면 그 사람은 성공하지만, 시대가 늘 바뀌기에 그는 곧 실패할 운명이다. 언제나 성공하려면, 자신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시대의 성격에 맞게 스스로를 바꾼다면 그 사람은 번성하나, 그렇지 못하면 파멸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바꾸라는 말이다.이런 이론은 얼마나 타당하고 현실적인가? 이론을 역사에 대입해볼 수 있다. 난세 중에서도 난세인...

    2025.06.11 20:53

  • [역사와 현실]없어져야 할 변명
    없어져야 할 변명

    조선시대사 강의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토론이 있다. 대선에 빗대어 ‘왕선(王選)’이라 가정하고, 광해군과 인조로 편을 나누어 왕선 토론회를 벌이는 것이다. 각 조별로 자기 왕의 치적을 자랑하고 상대편의 실정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정치·외교, 사회·경제, 후보 검증 등 세 분야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한다. 청중석의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누구 편을 들 것인지 미리 작성해오게 하기도 하고, 토론 후 생각이 바뀌었는지 등을 묻는 설문을 하기도 한다.이번 학기엔 마침 대선을 몇주 앞둔 절묘한 시점에 토론 수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올해 학생들의 토론을 듣다가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광해군 편이건 인조 편이건 비슷한 논리로 방어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조 조에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비판하자, 광해군 조에서 그것은 왕이 명한 게 아니라 아랫사람이 제멋대로 행한 것이라고 방어했다. 또 광해군 조에서 인조가 논공행상을 잘못해 결국 이괄의 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냐고 비...

    2025.06.04 20:18

  • [역사와 현실]인조의 창경궁 수리
    인조의 창경궁 수리

    1633년 음력 5월2일, 김령이 예안현감으로부터 받아 든 조보에는 사헌부 헌납에 임명된 이상질의 상소가 실렸다. 인조가 추진하던 창경궁 수리 공사에 대해 “요역과 부세가 너무 많고 무거워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궁궐을 짓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면서 반대했다. 창경궁 수리에 대한 왕의 의지를 비판한 신하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곧은 언관’ 모습을 보여준 일이기는 했다.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조의 궁궐 건설은 인조답지 않은 일이었다. 잘 아는 것처럼,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반정의 대표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인 이른바 ‘강상(綱常)을 범한 죄’였다. 그리고 ‘무분별한 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한 죄’ 역시 반정의 명분에 포함됐다. ‘무분별한 공사’는 광해군의 궁궐 건축을 지칭하는 말이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과 창경궁을 모두 불태웠다. 전쟁이 끝난...

    2025.05.28 20:52

  • [역사와 현실]조선의 법전, 대한민국의 헌법
    조선의 법전, 대한민국의 헌법

    조선은 법전(法典)의 나라였다. 건국 직후부터 법전을 편찬하기 시작해서 국운이 기울어가는 19세기 중반에도 법전 편찬을 그치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2년 만인 1394년에 <조선경국전>이 나왔다. 건국에 공이 많고, 건국 직후 조선이 제도적 기틀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정도전의 저술이다. 3년 뒤 1397년에는 조선왕조 최초의 공적인 법제서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이 나왔다. <조선경국전>이 정도전 개인의 저술인 반면에 <경제육전>은 좌의정 조준의 책임 아래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것이다.이후에도 현실의 필요에 따라 법령들이 계속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이렇게 쌓인 법령들 사이에 모순이 생기거나 이미 현실과 어긋난 법령들이 적지 않게 됐다. 그에 따라 세조는 1455년 즉위 후에 기존의 법전과 법령을 전반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했다. 법령들을 자세히 살펴 현실에 맞게 확립하려는 목적을 이름으로 ...

    2025.05.21 20:52

  • [역사와 현실]마키아벨리의 미소
    마키아벨리의 미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다. 그의 초상화 중 마키아벨리 직후 세대의 화가인 산티 디 티토가 그린 것이 유명하다. 이 초상화에서 마키아벨리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데, 이 미소가 일품이다.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마키아벨리의 미소도 헤아리기 힘든 내면의 깊이와 미묘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소의 의미는 필경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게 파악될 것이다.마키아벨리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정치사상은 통상 권모술수의 정치로 해석된다. 그런 맥락에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주장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로 거칠게 요약되곤 한다. 이런 해석에서 보자면, 마키아벨리의 미소는 ‘찬웃음’이다. 즉 마키아벨리의 미소는 자신의 권력과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정적을 잔인하게 제거하고 국민을 태연하게 기만하는 냉혈한 정치인의 냉소적 웃음이다. 그러나...

    2025.05.14 20:12

  • [역사와 현실]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저질 선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저질 선비

    1973년, 경상북도 어느 지역의 새마을지도자가 새마을연수원장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자기 지역의 모 지도자가 거짓 실적으로 포상을 받았다고 고발하는 편지였다. 사실관계보다도 나는 그 편지의 한 문장이 흥미로웠다. 원장에게 이 문제를 청와대에 보고해 달라며 “선생님의 애국은 바로 각하에게 직언하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신하의 충(忠)을 임금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바른길로 이끄는 간쟁이라고 보던 그 인식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500여년 전 정창손과 세종의 대화를 떠올렸다.1444년(세종 26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일군의 집현전 관리들은 훈민정음 제작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 세종은 이 중 정창손의 말을 특히 문제 삼았다. “삼강행실을 반포해도 충신·효자·열녀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그 자질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라 한 발언이었다. 이전에 세종은 “삼강행실을 번역해서 반포하...

    2025.05.07 20:21

  • [역사와 현실]이념 사회와 선명성의 정치
    이념 사회와 선명성의 정치

    1808년 여름, 송흠선이 전주 들판에서 참수됐고 그 목은 저자에 걸렸다. 굳이 송시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대부에게는 과한 처벌이었다. 서원에 배향된 송시열 위패를 훼손했다는 게 이유였다. 집권 세력인 노론의 관점에서 볼 때, 송시열 성인화에 매진해도 못마땅할 후손이 위패까지 훼손했으니 용서가 되지 않았던 듯했다. 이듬해인 1809년 음력 4월1일, 조정에서는 다시 송시열의 후손 송능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송능상은 송시열의 증손자로, 지역에서 학덕을 인정받아 ‘유일’(遺逸·관직에 나가지 않는 은거한 선비)로 불렸던 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지 50년도 더 되었지만, 윤우대를 비롯한 사부학당 유생들은 선현을 깎아내리고 모욕했다는 이유로 송능상을 탄핵했다. 그의 문집 <운평집>에 주자 정론과 다른 입장이 들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확한 내용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예(禮)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 듯했다.유학에서 ...

    2025.04.30 20:50

  • [역사와 현실]탄핵에 대한 두 의문
    탄핵에 대한 두 의문

    1980년 전두환에 이어 2024년 12월3일 현직 대통령이 44년여 만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판결로, 이것이 불러온 위태로운 상황은 일단락됐다. 그동안 수많은 시민이 거리와 광장에서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인터넷과 TV를 통해 재판을 지켜보며 애태운 끝에 나온 결과다. 상황은 국면을 바꿔 이어지고 있고, 현실이 정상을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이 전체 상황은 형사재판을 통해 검토될 것이고 이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은 그것을 반추하겠지만, 그것과 다소 다른 차원의 의문도 생겨났다.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과 심정적으로 그에 동조했던 측과 내란에 반대한 측은 서로 답을 얻지 못한 의문을 갖게 됐다. 한쪽은 쿠데타가 왜 실패했는지를, 다른 쪽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최고 권력자가 현직에 있으면서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한 경우는 세계적으로 대단히 드물다고 한다. 최정예 부대까지 동원해 준비한...

    2025.04.23 20:25

  • [역사와 현실]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섬뜩함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섬뜩함

    이탈리아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재미있는 장면이 잠깐 지나간다. 주인공 두 명이 시골길을 가다 물을 얻으려고 농가에 들른다. 미국인 친구가 벽에 걸린 그 옛날 독재자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보고 몹시 놀라워한다. 그러자 이탈리아 친구가 ‘쿨’하게 대꾸한다. “여기 이탈리아잖아.”1945년 이탈리아 파시즘이 패망하면서 무솔리니가 최후를 맞이하고 역사의 단죄를 받았건만, 그로부터 무려 40여년이 지난 후에도 독재자의 초상화가 버젓이 걸려 있는 모습은 정녕 놀랍다.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단순히 한적한 농촌의 고립무원 때문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특성으로 설명해볼 법도 하다.그러나 역사의 지속이라는 시각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패망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지자가 무솔리니의 시신을 가져간 사건은 기괴하다 못해 공포스럽...

    2025.04.16 20:15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