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역사와 현실
  • [역사와 현실]나를 적진에 보내달라!
    나를 적진에 보내달라!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은 패닉에 빠졌다. 에도 시민들의 눈길은 미토노공(水戶老公)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에 쏠렸다. 그는 존왕양이의 스타 정치가였지만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번주 자리에서 내려온 인물이다. 당황한 막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기용했다. 도쿠가와는 개국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자신을 미국에 사절단으로 파견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시다 쇼인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협박하지 말고, 이번에는 물러나라. 그러면 일본이 캘리포니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개국을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1868년 수립된 후 최대의 과제는 조선과의 수교 문제였다. 청과는 이미 조약을 맺었지만(1871) 조선은 8년 동안 국교 수립을 거절해왔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해외순방 중 정부 운영을 책임지게 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1873년 7월29일 또 한 명의 실력자 이타가키 다이스케(...

    2024.07.03 20:46

  • [역사와 현실]17년 전 이맘때
    17년 전 이맘때

    얼마 전 경기도 안성의 봉업사지에 갔다. 한데 그날 그곳이 사적으로 지정된다는 뉴스가 나와서, 사적 지정 기념 답사가 됐다고 일행과 키득대며 절터를 둘러보았다. 봉업사지에는 10세기 고려 광종대 만들어진 태조 진전, 즉 태조의 초상화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던 곳이 있었다. 1362~1363년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참배하기도 했다. 그후 언젠가부터 버려져 잊혔으나 우연히 발견된 유적을 계기로 발굴조사가 행해지며 사적으로 지정됐다.고려 광종 때 건설된 태조 진전이라 하면, 개성의 봉은사가 대표적이다. 태조상이 바로 이곳에 있던 것이다. 조선 건국 후 태조릉인 현릉에 묻혔는데, 1990년대 현릉 정비 과정에서 발견됐다. 태조상과 진전 생각을 하다 보니, 개성 만월대, 즉 고려궁성의 경령전 유적에 생각이 미쳤다. 경령전은 궁성 안에 있던 진전이다. 고려 왕실에서 꾸준히 의례를 행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2007~2018년 남북...

    2024.06.26 20:29

  • [역사와 현실]국방의 의무에 대한 국가의 책임
    국방의 의무에 대한 국가의 책임

    1781년 5월11일 새벽, 창경궁을 순찰하던 위장들과 부장들은 대로변 소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시신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여명이 트는 이른 새벽, 흐릿한 형체만 보고 마음의 준비 없이 시신을 맞닥뜨렸던 터라, 이를 본 모든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창경궁에 비상이 걸렸다. 궁궐 바로 앞에서 일어난 흉사였던지라, 이 일은 정조에게 바로 보고되었다.조사가 진행되었다. 사망자는 전날 창경궁 수비를 위해 입직했던 병사. 그는 함께 입직했던 동료 병사와 다투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이라 보고되었다. 큰일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병조의 보고 내용이 그랬다. 그러나 스스로 목을 맬 정도의 다툼이 ‘대등한 관계’에서, 그것도 ‘우발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망한 병사는 목숨을 버리고 싶을 만큼의 괴롭힘을 장기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툼’으로 쓰고 ‘괴롭힘’으로 읽어야 하는 상...

    2024.06.19 20:35

  • [역사와 현실]AI, 인문학, 역사학
    AI, 인문학, 역사학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변화가 여러 방면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AI가 그려주는 그림 때문에 웹툰 그리던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말이 들리고, 여러 나라말을 유창하게 통역하는 기능 때문에 일부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폐지했다는 뉴스도 전해진다. 챗GPT가 등장한 지 불과 1년 반이 지났을 뿐이다. 최근에 나온 더 높은 버전의 챗GPT는 미국 변호사 시험(Uniform Bar Exam)을 상위 10%로 통과했고, SAT 수학시험에서 800점 만점에 700점을 얻었단다. 인간의 총체적 지능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경제학에 장기, 중기, 단기 경제변동 이론이 있듯이, 역사학에도 시간에 관한 비슷한 이론이 있다.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은 세 차원의 역사적 시간을 말했다. 기후적, 지리적, 생물학적, 정신적 구조같이 거의 변하지 않는 장기지속, 인구나 사회계층처럼 어느 정도 변동하는 구조로서의 콩종튀르(conjoncture), 마지막으로 사건 같...

    2024.06.12 20:28

  • 일본 사회는 역(役)의 체계

    지난번 칼럼(5월9일자)에서 일본 사람들이 각자 맡은 ‘야쿠’(役·역할)를 수행하며 때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1억 총연극의 사회’에 대해 썼는데, 흥미롭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어 부연설명하려고 한다. 야쿠를 역할로 번역했지만, 딱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다. 역할보다는 좀 더 분명하고 엄격하다. 유학 시절 식당에 갔는데 일본인 종업원이 쟁반에 반찬을 올려 서빙을 해줬다. 한국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던 나는 반찬 그릇 옮기는 걸 도와주려고 손을 뻗었다. 한국에서는 아주머니가 “학생, 이것 좀 거기다 놔줘요~”라고 하기도 하지 않나(요즘도 한국에 이런 풍경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아직 앳된 그는 흠칫 놀라며 “스미마센!”(죄송합니다)을 연발했다. 서빙이라는 자기의 야쿠에 손님이 개입한 데 놀랐던 것이고, 자신의 야쿠 수행에 무슨 큰 결함이라도 있었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사장이나 종업원이 바쁜 듯하면 냉장고 안에 있는 맥주를 알아서 꺼내오는 한국인 손님을 그가 상상하기...

    2024.06.05 20:38

  • [역사와 현실]프레드릭과 샤미센
    프레드릭과 샤미센

    프레드릭은 게으른, 아니 게을러 보이는 들쥐다. 다른 들쥐 가족들이 겨울을 대비해서 식량을 모으느라 바쁘게 일할 때 프레드릭은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햇볕을 쬐거나 초록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꾸벅꾸벅 졸기나 한다. 왜 일을 하지 않냐는 식구들의 타박에 겨울을 위해서 햇볕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은다고 답하는 프레드릭.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을 텐데 싶다. 그러나 한겨울 동굴에서 갇혀 지내며 저축한 식량을 다 축내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지치고 우울해졌을 때, 프레드릭의 진가가 드디어 발휘된다. 프레드릭은 봄에서 가을까지 모은 햇볕을 나눠주고 색깔을 보여주며 이야기와 시를 들려주어 다른 들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준다. 칼데콧 아너상을 받은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은 바로 시인을 자임하는 이 들쥐의 이야기다.아이가 어렸을 때,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상 받은 책이라니 뭐가 좋아도 좋겠거니 하고 잡은 이 책을 읽어주다 가슴이 찡해졌다. 프레드릭이 상징하...

    2024.05.29 20:18

  • [역사와 현실]위임된 권력의 남용
    위임된 권력의 남용

    1630년 음력 4월14일,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일대) 향청에서 지역 향교와 서원을 통해 예안 유림들을 모았다. 현내 여러 문제들을 논의하자는 게 의제였는데, 참으로 뜬금없는 의제였다. 본래 현내 복잡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 그 문제들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안현 대다수 유림들은 당시 예안현 내에 돌고 있는 예안현감에 대한 소문이 중요 의제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예안 유림들의 추측은 빗나갔다. 예안현감은 당해 연도 전세(田稅)를 어떻게 거둘지, 그리고 이를 위한 양전(토지 측량)은 어떻게 할지 논의한 후, 서둘러 향회를 끝냈다. 지역 유림의 자치 조직인 향회 특성상 당시 문제되고 있었던 예안현감의 소문에 대해 성토할 수도 있었지만, 예안현감 편에 선 향회 우두머리인 좌수가 나서서 이를 막고 의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감의 당시 소문에 대한 사과나 입장표명을 기대했던 유림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당시 예안현 내...

    2024.05.22 20:46

  • [역사와 현실]‘10만 양병설’
    ‘10만 양병설’

    한국사를 공부했다는 이유로 가끔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이 주장대로 조선이 미리 병력을 길렀다면 임진왜란 같은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임진왜란이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한국과 일본 관계가 대체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도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주요 국가 간의 경쟁은 직접적 무력 충돌보다 기술 패권을 둘러싸고 더 치열하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야말로 사실상 오늘날 전쟁의 주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간 전쟁이 과거에 그랬듯이, 이제는 한 국가의 기술 역량이 그 국가의 세계적 지위를 크고 빠르게 바꾼다.‘부유한 미국’과 ‘가난한 유럽’이 근래 주목을 끌었다. 2008년 무렵만 해도 유럽 전체와 미국의 경제 규모나 개인 소득 수준이 거...

    2024.05.15 20:46

  • [역사와 현실]일본, 1억 총 연극의 사회
    일본, 1억 총 연극의 사회

    전문직에 계신 분들과 하는 일본공부모임에서 야마구치(山口)현 호후시(防府市)를 방문한 적이 있다. 조슈번 다이묘(長州藩大名)였던 모리(毛利) 가문의 저택과 정원을 보기 위해서다. 메이지유신 후 전국의 다이묘들은 성을 허물고 도쿄에 모여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정국이 좀 안정되자 메이지 정부는 전 다이묘들에게 고향에 거주하는 걸 허락했다. 모리 가문은 조카마치(城下町)였던 하기(萩)나 경제중심지 야마구치 대신 호후에 30만㎡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를 마련해 거처로 삼았다. 가신이었던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힘을 써줬다고 한다. 8만4000㎡ 규모의 정원은 가을 단풍이 특히나 절경이다. 저택은 국가에 기증하여 모리씨박물관으로 되어 있다.넓은 다다미방과 긴 회랑으로 이뤄진 저택을 둘러보다 낡았지만 깔끔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부동자세로 서서 다른 학생들을 안내하는 모습을 봤다. “수학여행 왔어요?” “아뇨, 동아리활동 중입니다.” 우리로 치면 근처 학교...

    2024.05.08 20:04

  • [역사와 현실]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조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조

    인터넷에서 ‘서울 사람이 생각하는 시골’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지도가 있다. 한반도는 절반 남짓 그렸는데, 서울은 빨간색으로 크게 그렸다. 휴전선 이북 조금은 북한이고, 남쪽에서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시골이라고 퉁쳐버리며 모두 파랗게 색칠을 했다. 그래도 제주도는 귤이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표시했는데, 이 엉성한 와중에도 독도 옆에는 울릉도도 표현되어 있는, 제 딴에는 섬세한(?) 지도다. 보통 지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정확성 따위는 무시한 이런 지도도 분석의 가치가 있다. 이런 것을 심상지도(Mental map)라고 하는데, 그린 이의 심상을 반영한다.이 지도는 북한에 대한 무관심이나 독도 문제에 대한 강렬한 인식 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서울 중심으로 사고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자가 무심결에 드러난 심상이라면 후자인 서울 중심 사고는 이 지도가 그려진 이유다. 서울 사람이 얼마나 오만하게 서울 중심의 사고를 하는지, 그들이 견문으로 ...

    2024.05.01 21:32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