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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역사와 현실
  • [역사와 현실]위임된 권력의 남용
    위임된 권력의 남용

    1630년 음력 4월14일,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일대) 향청에서 지역 향교와 서원을 통해 예안 유림들을 모았다. 현내 여러 문제들을 논의하자는 게 의제였는데, 참으로 뜬금없는 의제였다. 본래 현내 복잡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 그 문제들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안현 대다수 유림들은 당시 예안현 내에 돌고 있는 예안현감에 대한 소문이 중요 의제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예안 유림들의 추측은 빗나갔다. 예안현감은 당해 연도 전세(田稅)를 어떻게 거둘지, 그리고 이를 위한 양전(토지 측량)은 어떻게 할지 논의한 후, 서둘러 향회를 끝냈다. 지역 유림의 자치 조직인 향회 특성상 당시 문제되고 있었던 예안현감의 소문에 대해 성토할 수도 있었지만, 예안현감 편에 선 향회 우두머리인 좌수가 나서서 이를 막고 의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감의 당시 소문에 대한 사과나 입장표명을 기대했던 유림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당시 예안현 내...

    2024.05.22 20:46

  • [역사와 현실]‘10만 양병설’
    ‘10만 양병설’

    한국사를 공부했다는 이유로 가끔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이 주장대로 조선이 미리 병력을 길렀다면 임진왜란 같은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임진왜란이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한국과 일본 관계가 대체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도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주요 국가 간의 경쟁은 직접적 무력 충돌보다 기술 패권을 둘러싸고 더 치열하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야말로 사실상 오늘날 전쟁의 주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간 전쟁이 과거에 그랬듯이, 이제는 한 국가의 기술 역량이 그 국가의 세계적 지위를 크고 빠르게 바꾼다.‘부유한 미국’과 ‘가난한 유럽’이 근래 주목을 끌었다. 2008년 무렵만 해도 유럽 전체와 미국의 경제 규모나 개인 소득 수준이 거...

    2024.05.15 20:46

  • [역사와 현실]일본, 1억 총 연극의 사회
    일본, 1억 총 연극의 사회

    전문직에 계신 분들과 하는 일본공부모임에서 야마구치(山口)현 호후시(防府市)를 방문한 적이 있다. 조슈번 다이묘(長州藩大名)였던 모리(毛利) 가문의 저택과 정원을 보기 위해서다. 메이지유신 후 전국의 다이묘들은 성을 허물고 도쿄에 모여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정국이 좀 안정되자 메이지 정부는 전 다이묘들에게 고향에 거주하는 걸 허락했다. 모리 가문은 조카마치(城下町)였던 하기(萩)나 경제중심지 야마구치 대신 호후에 30만㎡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를 마련해 거처로 삼았다. 가신이었던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힘을 써줬다고 한다. 8만4000㎡ 규모의 정원은 가을 단풍이 특히나 절경이다. 저택은 국가에 기증하여 모리씨박물관으로 되어 있다.넓은 다다미방과 긴 회랑으로 이뤄진 저택을 둘러보다 낡았지만 깔끔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부동자세로 서서 다른 학생들을 안내하는 모습을 봤다. “수학여행 왔어요?” “아뇨, 동아리활동 중입니다.” 우리로 치면 근처 학교...

    2024.05.08 20:04

  • [역사와 현실]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조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7조

    인터넷에서 ‘서울 사람이 생각하는 시골’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지도가 있다. 한반도는 절반 남짓 그렸는데, 서울은 빨간색으로 크게 그렸다. 휴전선 이북 조금은 북한이고, 남쪽에서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시골이라고 퉁쳐버리며 모두 파랗게 색칠을 했다. 그래도 제주도는 귤이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표시했는데, 이 엉성한 와중에도 독도 옆에는 울릉도도 표현되어 있는, 제 딴에는 섬세한(?) 지도다. 보통 지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정확성 따위는 무시한 이런 지도도 분석의 가치가 있다. 이런 것을 심상지도(Mental map)라고 하는데, 그린 이의 심상을 반영한다.이 지도는 북한에 대한 무관심이나 독도 문제에 대한 강렬한 인식 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서울 중심으로 사고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자가 무심결에 드러난 심상이라면 후자인 서울 중심 사고는 이 지도가 그려진 이유다. 서울 사람이 얼마나 오만하게 서울 중심의 사고를 하는지, 그들이 견문으로 ...

    2024.05.01 21:32

  • [역사와 현실]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
    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들 가운데 약간이라도 도의를 사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세속적 우환에 걸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소이다. (중략) 그들이 미진했던 점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이 지극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너무 높여 처신한 데 있고, 시의(時宜)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경륜(經綸)하는 데 용감했기 때문이오.”(<퇴계선생문집>, 권16, ‘기명언에게 답함’) 1559년, 이황이 나아감과 물러남의 도리를 묻는 33세의 젊은 기대승에게 답한 편지의 일부이다. 기대승은 한 해 전 이미 대과에 합격했지만, 스스로 관직에 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에 어둡다고 생각하여 이황에게 그 처신을 물어왔던 터였다.유학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2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승되면서 복잡한 이론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본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자기 수양(수기)을 통해 개인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사람들을 다스려(치인)...

    2024.04.24 20:48

  • [역사와 현실]언론과 미디어
    언론과 미디어

    언론기관의 역사를 말한다면 서양보다 한국이나 중국이 훨씬 앞선다. 서양에서는 17, 18세기 신흥 시민계급과 함께 언론기관이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이미 고려 시대에 정부 조직 안에 언론기관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왕조는 고려 시대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언론 기능을 발전시켰다.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민간에서든 정부 안에서든 권력과 국정을 감시하는 언론이 필요했다.오늘날 언론사 기자의 일을 맡은 조선 시대 정부 기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춘추관과 예문관을 들 수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언관(言官)이라 했는데, 국왕과 관리들을 말로 비판하는 일을 했다. 예문관과 춘추관은 임금과 관리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고, 그 기록을 모아 정리했다. 그 결과물이 <조선왕조실록>이다.예문관과 춘추관은 똑같이 ‘국사(國事)’를 기록하는 일을 했지만 그 구체적 업무와 편제는 달랐다. 가장 큰 특징은 춘추관 관원 모두 다른 관직이 있는 겸직이...

    2024.04.17 21:55

  • [역사와 현실]점진적 방법으로 이뤄진 변혁
    점진적 방법으로 이뤄진 변혁

    4년간 각국 혁명사가들과 진행한 ‘혁명비교연구’의 출판이 이뤄진다(2023년 1월19일자 본 칼럼 ‘한국혁명’ 참조).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고치고 결론을 새로 쓰다 보니 ‘점진적 대변혁’이란 메이지유신의 특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중국과 조선이 일찌감치 군현제로 전환한 데 반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까지 봉건제로 남아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 대다수 지식인들은 봉건제가 좋은 제도라며 일본 예찬 소재로 삼았다. 19세기 중반 서양의 위협 앞에서 중앙집권을 해야 할 필요가 대두하자, 그들은 일본도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낯선 서양 정치사상을 수입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보단 봉건제-군현제라는, 동아시아에서 장구한 세월 그 장단점이 논의된 낯익은 정치제도에 관한 토의를 정치체제 변혁의 단서로 삼은 것이다. 민두기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청에서도 의회제 도입과 지방분권을 논의하면서, 그것은 현행 군현제에 봉건제를 가미하는 것이라는 논법...

    2024.04.10 21:58

  • [역사와 현실]왕건의 유언과 ‘공심’
    왕건의 유언과 ‘공심’

    태조 왕건은 고려의 다른 국왕과는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시조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고려 400여년 동안 반신반인 정도로 숭배를 받던 존재라 그렇다. 예를 들어 고려의 양대 축제라는 연등회와 팔관회는 태조 왕건에게 고하는 것으로 의례를 시작한다. 수도인 개경만이 아니라 지방 곳곳에 그 초상을 모신 진전이 있었고, 전쟁이나 지방의 반란 진압 같은 큰일이 있을 때면 이러한 진전에서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곤 했다. 왕건으로 이어지는 왕실 조상의 혈통도 신비화되었다. 건국 설화에는 당대 유행한 온갖 요소를 다 집어넣었다. 그래서 태조의 조상 중에는 산신도 있고, 명궁수도 있으며, 오줌 꿈을 꾼 할머니, 심지어 당나라 황제와 용왕의 딸도 있다. 또 도선만이 아니라 팔원이라는 풍수사까지 그 집과 그 고을의 풍수를 봐주며 왕업의 개창을 예언했다. 궁예처럼 미륵이라고 하지만 않았을 뿐 나머지 유행하던 요소는 다 넣었고, 고려 왕실은 용손을 자처했다. 왕권이 위태로울 때면 이런 혈통적 신비함...

    2024.04.03 20:24

  • [역사와 현실]당파와 도덕적 책임의 범위
    당파와 도덕적 책임의 범위

    1796년 음력 2월13일, 정조의 최측근인 좌의정 채제공이 파직되었다. 세손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채제공이었지만, 정조의 결단은 추상같았다. 발단은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능) 별검 이주석에 대한 어사의 보고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과 그의 동료 이주명의 죄는 심각했다. 특히 두드러진 죄는 우금령(牛禁令·소 도축 금지령)을 어긴 일이었다. 조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소 도축을 법으로 금했는데, 그에 더해 한 해 전인 1795년에는 이를 강조한 왕명이 별도로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주석은 능졸들이 영릉 내에서 소를 사적으로 도축하는 것을 허락했으니, 문제가 컸다.게다가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은 영릉 인근 마을에 사는 과부를 불법으로 결박해서 밤새 숯 보관 창고에 가둔 일도 있었다. 영릉에 갇혔던 과부와 그녀 오빠의 호소로 이 일이 밝혀졌는데, 그들 말에 따르면 이주석은 수절하려는 과부를 강제로 능군(陵軍)인 김강정과 동거하게 만들려고 이러한 일을 벌...

    2024.03.27 22:08

  • [역사와 현실]1565년 유생 상소와 야당 공천투표
    1565년 유생 상소와 야당 공천투표

    1565년 4월, 20년간 최고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가 사망했다. 그 직후 시작되어 그해 10월까지 이어진 지방 유생들의 전국적 상소는 조선의 정치 및 언론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 양상은 작금의 한국 정치 및 언론 상황에 기시감을 준다.조선은 고려 말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국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정치는 처음부터 공적 이념성을 강하게 띠었다. 이것은 현실 권력 못지않게 ‘공론(公論)’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조정에서 공론을 담당하는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통칭하는 언관(言官)이 존중되었다. 그런데 언관이 처음부터 실제로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시작했어도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선의 공론 중시 지향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성종대(1457~1494)에 언관이 공론을 담당하는 주체로 확립되었고 조정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했다. 조선이 건국되...

    2024.03.2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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