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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국에서] 지상의 한 칸
    지상의 한 칸

    날씨가 쌀쌀해지면 그립고 설레는 것들이 있다. 깊은 밤 불을 끄고 찾아든 이불 속 따스함이 그렇다. 허리에서부터 전해진 그 포근함은 온몸을 조용히 적신다. 하루의 고단함과 우울도 그때면 사르르 녹아내린다. 해가 더할수록 이 계절이 되면 감각은 예민해지고 사소한 것들의 행복이 깊어진다.‘(…)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 날이면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백석)일망정 ‘지상의 한 칸’이 그립다. 추위와 서러움은 문학과 오랜 끈으로 맺어져 있지만, 백석의 시만큼 마음에 스미는 경우도 없다.‘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지상의 한 칸은 그런 곳이다. 비록 혼자지만 사랑을 하고, 소주를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피난처 같은 곳...

    2020.10.30 03:00

  • [편집국에서] 금융권력의 카르텔을 해체하라
    금융권력의 카르텔을 해체하라

    5000억원대 펀드 사기를 일으킨 사모펀드 운용사 옵티머스자산운용의 고문단에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76)가 포함돼 있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금융감독위원장(현재 금융위원장)을 맡아 기업구조조정을 지휘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냈다. 과거 ‘이헌재 사단’이란 말이 회자됐을 정도로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잊혀져가던 그의 이름이 옵티머스 고문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놀랐을 듯싶다.그를 고문단에 앉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짐작이 간다. 투자자들에게는 존재만으로도 수익률을 높여줄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지는 효과를 기대했을 테고 현직 금융당국 인사들에게는 ‘금융계의 대부’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 감안되지 않았을까.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전 부총리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은 국감자료와 언론 보도를 통해 나와 있다. 옵티머스의 핵심 인물인 양호 전 나라은행장이 2017년 11월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구속 기소)와...

    2020.10.23 03:00

  • [편집국에서] “내 아들에게도 보여주지 말라”
    “내 아들에게도 보여주지 말라”

    태풍이 지나간 인왕산 숲속은 어수선했다. 바람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나뭇잎들 사이로 여전히 수런거리고, 길을 막은 낮은 덩굴들은 걸음에 차일 때마다 흔들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뭇가지들과 잎, 잔모래들이 널브러진 이 쓸쓸한 길이 왜 이리도 다정할까. 마치 ‘세한도(歲寒圖)’처럼.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유배지 제주에서 그린 ‘세한도’는 아둔한 내 눈에도 유독 와닿는다. 그 쓸쓸함이 참 깊다. ‘절절한 기개’까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림을 볼 때면 ‘아 저런 것이 고결한 고독인가’ 싶다.얼마 전 ‘세한도’ 기증 소식을 들었다. 우연찮게 그보다 몇 달 전 그림에 얽힌 사연을 접한 적이 있었던지라 내 것도 아니지만, 주제넘게 감회가 남달랐다.“내 아들이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말아달라. 욕심이 생긴다.”‘세한도’ 소장자인 손창근씨가 그림을 위탁관리하던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에게 크게 역정을 내면서 당부한 말이라고 한다. 그의 아들이 ‘세한도’...

    2020.09.25 03:00

  • [편집국에서] IMF도 ‘재정건전성 집착’ 버린 지 오래다
    IMF도 ‘재정건전성 집착’ 버린 지 오래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때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며 극도의 긴축재정을 강요당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1% 수준의 예산흑자를 유지하라는 내용이었다. 양호한 재정건전성에도 한국은 재정주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결국 이듬해 하루 100개가 넘는 회사가 도산하고 대량실업이 현실화하는 고통을 겪었다. 긴축재정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신자유주의 확산의 첨병 역할을 한 IMF의 대표적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IMF체제에서 벗어난 뒤에 신자유주의는 확산됐고 재정건전성 사수는 한국 경제의 핵심 과제가 됐다.하지만 경제위기 시 과감하고도 신속한 재정투입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며 합리적 경제행위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이 같은 국가의 역할을 두고 장래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거나 어린 자녀를 양육할 때 돈을 빌렸다가 소득이 많아지면 상환하는 경제활동이 정상적인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빚을 낼 여력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대담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얘...

    2020.09.18 03:00

  • [편집국에서] ‘4흘’과 ‘웬열’
    ‘4흘’과 ‘웬열’

    광복절 ‘사흘 연휴’는 마지막까지 다사다난했다. 코로나의 시절과 긴 장마에 지친 마음들에 하루치 행복이 더하길 바랐지만 코로나19의 재창궐과 함께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일상은 더한 불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바람에 임시공휴일(17일) 지정을 전후해 말 많던 ‘4(사)흘’에 대한 기억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졌다.그사이 만났던 꽤 많은 이들이 ‘4흘’을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대화 속에 “참 놀랐다”는 감정표현과 함께 ‘4흘’은 곧잘 등장했다. 네이버 실검을 장악했던 ‘사흘’의 영상이 꽤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충격 반응(심지어 20대였다)부터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 문제’를 진심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자가 난 과거 기사들의 ‘4흘’이 SNS로 소환돼 기레기의 또 다른 증거로 활용될 땐 당혹스러웠다.나로 말하자면 역시 좀 놀라긴 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사흘 정도는 아니라도 오래전부터 너무도 일상적인 단어들이 네이버 실검에 떠오르던 풍...

    2020.08.28 03:00

  • [편집국에서] ‘부동산 실정’, 정책 실패의 책임 물어야
    ‘부동산 실정’, 정책 실패의 책임 물어야

    정부의 경제정책이 성공하려면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얻고 있어야 한다. 정부의 실력이 시장에서 인정받아야 하며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설득할 수 있는 소통능력이 갖춰져 있을 때 정책의 효율적 집행이 가능해진다. 정책의 정당성과 합리성이 의심받기 시작하면 백마디 말도 효과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문재인 정부의 홍남기 2기 경제팀은 현재 신뢰의 위기에 처해 있다.역시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정책에 있어서의 실정이다. 지난 14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현 정부 부동산정책 평가에서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65%에 달해 2017년 8월10일 조사 이후 가장 높았다. 첫 번째 조사 당시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23%였다. 가계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에 몰려 있는 만큼 부동산정책은 가계에 초미의 관심사다. 65%가 잘못했다고 하면 사실상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요 책임은 경제팀에 있다. 세제·금융규제, 공급확대, 서민주거안정 등에서 실효성 있는 ...

    2020.08.21 03:00

  • [편집국에서] 코로나 시절에도 휴가는 갑니다
    코로나 시절에도 휴가는 갑니다

    참 수상한 여름이다. 여름이 그 계절 같지 않다. 더위와 장마가 뒤섞인 하루하루는 그대로지만 생활은 모두 엉클어진다. ‘여름, 방학, 휴가, 바다’로 설렘이 파도를 타던 그 여름과는 사뭇 다르다.우선 방학부터 그 ‘여름의 연상(聯想)’을 툭 끊어 놓는다. 무척 짧기도 하지만, 가족들마다 모두 다르다. 이전엔 학원 등 방학에도 멈출 수 없는 학습 부담 때문이었지만, 올해는 아예 엇갈린다. 막내는 8월 초부터 3주, 교사인 아내는 8월 초부터 2주인데, 고등학생인 둘째는 8월 중순이 되어야 방학이 시작된다. 공유할 시간이 턱없다.그래서 휴가도 갈피를 잡기 힘들다. 잘 묻지도 않지만, “휴가는…”이라고 주변에 인사치레라도 할라치면 돌아오는 건 오히려 질문이다. “어디로 가야 좋을까요. 갈 수나 있나?” 한숨도 더해진다. 가족들의 엇갈린 시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갈 곳이 드물다. 바다도 산도 ‘두려움’과 함께 떠올리게 된다.어쩌면 철든 이래 첫...

    2020.07.31 03:00

  • [편집국에서] 공급확대론 ‘덫’에 걸린 정부
    공급확대론 ‘덫’에 걸린 정부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투기수요를 차단하고, 실수요자를 보호하겠다고 누누이 밝혀왔지만 아직까지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부동산 실정에 따른 민심 이반이 심각하다는 걸 정부·여당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정책 난맥상을 초래한 주요 원인은 보유세 강화 실패에 있다고 본다.2005년 노무현 정부는 당시 0.15% 수준이던 보유세(종합부동산세+재산세)의 실효세율을 2009년 0.36%, 2017년 0.61%로 높이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현재 실효세율이 0.15~0.16%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보유세 강화는 제자리걸음이다. 보수정부가 보유세 강화를 터부시했던 탓도 있다. 실효세율은 주택가격 대비 보유세 비율이다. 공시가격 현실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실효세율 1%는 30억원짜리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을 때 1년에 3000만원 정도를 보유세로 낸다는 의미다.정부가 굳건한 보...

    2020.07.24 03:00

  • [편집국에서] 장혜영·류호정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말라
    장혜영·류호정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말라

    정의당이 시끄럽다. 장혜영·류호정 두 의원의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관련한 발언이 나온 후 지지와 비난 여론이 엇갈리면서 항의성 탈당과 입당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4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두 의원의 박원순 시장 조문 논란과 관련해 사과하면서 갈등이 더 커졌다.장혜영·류호정 두 의원의 발언은 지난 10일 나왔다. 서울시가 박원순 시장의 장례가 사상 첫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진다고 밝힌 후다. 서울시는 곧바로 서울시청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5일장 동안 일반 시민의 조문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박 시장의 충격적인 죽음은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안겨준 동시에 성추행 의혹과 피해자의 존재를 확인시킴으로써 당혹감과 분노가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가세하면서 일사불란하게 거대한 조문의 장이 마련되었고 그 와중에 성추행 의혹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장혜영·류호정 의원의 발언은 이 타이밍에 나온 것이다. 성추행 의혹...

    2020.07.17 03:00

  • [편집국에서]윤석열 총장이 졌다
    윤석열 총장이 졌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졌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과 싸워서가 아니다. 총장의 막강한 권한을 측근 비호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명분 없는 싸움이었고, 그래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 대한 항명으로밖에 읽히지 않았다.‘검·언 유착’ 의혹이 사태의 발단이다. 채널A 기자가 한동훈 검사장과 특수관계라고 주장하며 금융사기로 수감 중인 기업인에게 접근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비리를 제보하라고 회유·협박했다는 것이 골자다. 한 검사장은 각종 대형 사건에서 발군의 수사력을 보여준 엘리트 검사로 윤 총장의 최측근이다. 윤 총장의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엔 3차장을 맡아 특수수사를 총괄했고, 윤 총장이 검찰 수장에 오른 뒤에는 과거 대검 중수부장 격인 반부패강력부장을 지냈다.한 검사장이 떳떳하다면 감찰이나 수사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윤 총장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임했다면 이번 사건은 검찰사에 남을 ‘레전드’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윤 총장의 팔은 안으로 ...

    2020.07.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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