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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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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병권의 묵묵] 조상지, 오늘 등장한 내일의 정치
    조상지, 오늘 등장한 내일의 정치

    어느 시대든 당대인들은 자기 시대에 시작된 역사를 알아보기 어렵다. 오늘 시작되었지만 내일이 되어야 알아차리게 되는 일들이 있다. 내 눈에는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그’의 이야기가 그렇다. 만약 미래에 출간된 한국 정치나 민주주의에 관한 글에서 내가 이번 선거를 언급하게 된다면 단 한 사람만 이야기할 것이다. 2026년 선거는 ‘그’가 입후보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고 쓸 것이다.그는 오늘의 당신이 추측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무려 5선을 해보겠다고 나선 현 시장도 아니고, 대통령이 일 잘한다고 언급한 뒤 곧바로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된 구청장도 아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중요한 대결을 펼치는 두 사람은 내일의 관점에서는 별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 인물과 그 당이 여태 해오던 것을 몇년 하고 사라질 것이다. 지금 달아오르는 부산이나 대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혈투가 벌어질 것 같지만 미래의 책에 적을 만한 단 한 줄의 새로움도 없는 ...

    2026.04.30 20:10

  • [고병권의 묵묵]연극의 현실
    연극의 현실

    일본의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는 자신이 ‘현장’이라고 느끼는 곳이면 어디든 텐트를 치고 연극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텐트극장을 ‘상상력의 긴급피난처’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도시는 전체가 극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 특정한 방식의 삶을, 다시 말해 특정한 퍼포먼스를 요구받는다. 텐트극장은 이런 현실에 맞서는 저항의 거점이자 일종의 대항극장이다. 아니,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텐트극장은 저항의 거점조차 만들 수 없을 때, 현실의 압도적 힘으로부터 상상력을 긴급히 피난시키는 곳이다.그런데 나는 이것이 예술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실로부터 상상력을 지켜내는 것 말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에 따르면 ‘현실’을 뜻하는 ‘리얼(real)’이라는 단어의 용례 중에는 ‘왕’을 뜻하는 에스파냐어 ‘레알(real)’(영어로는 ‘royal’)에서 온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부동산을 영어로 ‘real estate’라고 부르는 것은 애초에 그것이 ‘왕...

    2026.04.02 20:12

  • [고병권의 묵묵]정태수라는 이름
    정태수라는 이름

    매년 3월1일, 국가기념일인 삼일절이 장애인운동에서는 정태수 열사 추모일이다. 장애인운동가들은 이날 추모제를 연다. 대통령 축사도, 유명가수 공연도, 국가 훈장도 없는 추모제. 조촐하기는 해도 무척 재밌고 감동적이다. 열사를 바로 앞에 앉혀둔 듯 친구나 선후배들이 옛이야기도 꺼내고 다짐도 한다. 초대받은 민중가수는 “태수야, 네 단짝 종환이가 만든 노래인데 한번 불러볼게. 가사가 좀 틀릴 수 있는데 잘 들어줘” 하고 너스레를 떤다. 이날엔 그의 이름을 딴 상도 수여된다. 동료들은 수상자에게 “너 이제 큰일 났다. 이 상 받으면 평생을 헌신해야 해” 하고 놀려댄다. 모두가 다정하게 불러대는 이름 정태수. 그런데 장애인운동가들은 이 정태수상을 국가 훈장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정태수는 한국 장애인운동의 현재적 기원에 있는 사람이다. 2001년 이동권 투쟁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진 장애인 대중운동의 현재를 만든 사람 중 하나다. 그렇다고 무슨 단체의 대표였던 것은 아니다. 한국...

    2026.03.05 20:02

  • [고병권의 묵묵]은하수는 있다
    은하수는 있다

    여름밤 평상에 누우면 은하수가 보였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흐르는 신비한 안개. 집은 가난했지만 내 유년이 가난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보물들 덕분이다. 그런데 언젠가 한 친구가 내 보물이 진품이 아닐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맨눈으로 은하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아마도 사진으로 본 은하수를 어린 시절 본 것과 뒤섞었을 거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서울 출신이 뭘 알아’라고 대꾸했지만, 오랫동안 은하수를 보지 못했던 나는 그의 말에 흔들렸다. 그러다 그해 가을, 생애 다시 보기 힘든 유성우가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면도까지 갔다. 불빛 없는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을 때 너무 기뻐 고함을 쳤다. “저기 있잖아!” 은하수였다.사회학자 조형근의 글은 내게 이날의 은하수를 떠올리게 한다. 3년 전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를 읽었을 때 그랬고, 이번에 나온 <앎과 삶 사이에서>를 읽고서 더욱 그렇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대학 시절 나...

    2026.02.05 19:51

  • [고병권의 묵묵]최강자가 불량배라는 게 분명해진 지금
    최강자가 불량배라는 게 분명해진 지금

    맑은 개울에서 어린양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배고픈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는 어린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애송이가 버릇없이 내 물을 흐려놓다니 네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어린양이 답했다. “저는 당신이 계신 곳에서 스무 발자국이나 아래서 흐르는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당신 물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놈이 물을 흐려놓았어. 게다가 난 네놈이 작년에 나를 욕한 것도 알고 있어.” “작년에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아직도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걸요.” “네놈이 아니면 네놈 형이겠지.” “저는 형이 없는데요.” “그럼 네놈 종족 중 하나겠지. 네놈들이랑 목동들, 개들은 언제나 내게 불량한 말을 지껄여왔어. 이제 내가 되갚아줄 때다.” 늑대는 어린양을 숲속으로 끌고 가 잡아먹어버렸다. 재판도 하지 않고 말이다.‘불량배 국가’란 표현 쓰던 미국 베네수 폭격하고 마두로 납치 유엔헌장·국제법 무시 ‘무법자’ 세계 민주주의 위해 비판 마땅...

    2026.01.08 19:57

  • [고병권의 묵묵]나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나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지난해 12월3일 이후, 나의 민주주의와 세간의 민주주의에는 확실히 균열이 생겼다. 처음에는 잊어도 좋을 작은 불쾌감이었다. 그날 밤은 긴박했고 우리는 큰 뜻에서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의 민주주의 적들에 대한 단죄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 1년 전의 일을 계속 곱씹게 된다. 그날의 적들이 다시 풀려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일을 계기로 집권한 이들의 민주주의가 나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1년 전 그날은 세계 장애인의날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몇시간 전 장애인들은 국회에서 자신들의 시민권이 유예된 것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러고는 마치 그날 밤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국회 주변에서 노숙을 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국회로 모여 달라’는 야당 대표의 호소 이전에 국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다. 이날의 승리가 계엄군보다 국회에 먼저 도착한 시민들 덕분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장애인들은 계엄군이나 시민들이 ...

    2025.12.11 20:03

  • [고병권의 묵묵]그가 그로부터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로부터 나에게 다가왔다

    출간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면서 책을 보자마자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하게 되는 책이 있다. 지금까지 왜 이런 책이 없었나를 출간 이후에야 한탄하게 되는 책 말이다. 이번에 나온 <발달장애 당사자연구>(EM실천)가 그렇다.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전망이 밝지 않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책 제목은 연구기관에서 발간하는 보고서 같고 출판사 이름도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다. 그래서 더욱 알리고 싶다. 책에 담긴 메시지가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폐인이 자기 몸과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하는지 그리고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감각과 인식, 관계 맺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무엇보다 ‘당사자연구’라는 형식 자체가 앎과 해방에 관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당사자연구는 일본의 정신장애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체(肢體)장애인이나 뇌성마비장...

    2025.11.13 21:28

  • [고병권의 묵묵]박훈일이 지키고 있는 김영갑
    박훈일이 지키고 있는 김영갑

    제주 갤러리 두모악을 만든 김영갑 그의 사후에도 20년 지켜낸 박 관장 재정난 딛고 “모두가 주인” 되려면 정부와 제주도가 해야 할 일이 있다얼마 전 강연을 위해 제주에 있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 다녀왔다. 개인 공부가 많이 밀려 있는 터라 원고나 강연 요청에 잘 응하지 않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채권자가 모르는 내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15년 전, 삶의 기반이었던 공동체가 해체된 후 나는 분노와 두려움, 불안으로 날뛰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제주로 도망쳤다. 틈만 나면 마음속에 미운 사람을 불러다가 할퀴고 찌르고 나 자신까지도 고문대에 올려놓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갑을 모른 채 김영갑갤러리를 찾았다. 그날의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내 마음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노을이 붉게 번졌다.그날 나는 김영갑이 말한 동박새였는지도 모르겠다. 동백꽃을 꽂아두었더니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작은 새. “요란스럽...

    2025.10.16 20:23

  • [고병권의 묵묵]어느 팔레스타인 학자의 필사적 투쟁
    어느 팔레스타인 학자의 필사적 투쟁

    너무 굶어서 명료한 사고 어려워 혈당 떨어져 쓰러졌을 때도 작업 건물 없는 대학 지키는 연구자들 이제 전 세계 학자들이 응답해야아메드 카말 주니나는 가자지구 알아크사대학의 응용언어학자이다. 지난달 그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가자지구에서 학자로서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나는 굶주림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너무 굶어서 명료하게 사고하는 게 어렵고, 몸이 약해져 오랜 시간 앉아 있기도 힘듭니다.”현재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봉쇄로 식품, 의약품, 연료 등의 반입이 차단된 상태다. 유엔 기구와 비영리단체 등으로 구성된 기근 감시 시스템인 통합식량안보단계분류(IPC)에 따르면 이 지역은 지금 ‘최고 위험’ 단계에 있다. 50만명 이상의 인구가 재앙적 기근 상태에 있으며 이미 수백명의 아사자가 생겨났다.“겨우 한 단락의 글을 살펴보고 있는데 위장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수분이 빠져나간 손가락은 무척 건조하고 저...

    2025.09.18 20:05

  • [고병권의 묵묵]새만금, 아니 억만금의 공항이 들어선대도
    새만금, 아니 억만금의 공항이 들어선대도

    내가 최근에야 배운 용어가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을 지정할 때 쓰는 말이다. 유네스코의 운영지침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 실감이 난다. 여기서 ‘탁월하다’는 것은 ‘독보적’이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또 ‘보편적’이라는 것은 해당 유산이 특정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전체 인류에게, 그것도 현세대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길게 말할 것이 없다. “이 유산을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국제사회 전체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도대체 세상 어떤 것에 이런 가치가 부여될까. 유네스코는 전남 신안에서 충남 서천으로 이어진 갯벌이 그렇다고 했다. 갯벌은 호주와 뉴질랜드 등에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까지 초장거리 이동을 하는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라고 한다. 이를테면 큰뒷부리도요 같은 새가 그렇다....

    2025.08.2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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