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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성에서 찾아낸 가능성
중증장애인들의 배움과 공부는 한국 사회 전체의 변혁과 연결“학생이 되려면 투사 먼저 돼야” ‘불가능’에서 혁명의 씨앗 발견지난해 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를 그만두었다. 내가 지난 16년 동안 이어온 직함이다. 2008년 가을밤의 첫 수업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수업을 몇 시간 앞두고 야학이 아니라 서울시교육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현장수업 형태로 진행한다고 했다. 현장수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견학이나 야유회 같은 것인 줄 알았다. 막상 가보니 시위 현장이었다. 그날 서울시교육감이 장애인교육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하자 교사와 학생들이 뛰쳐나온 것이다. 수업시간이 임박했는데도 몸싸움이 계속되었다. 수업이 어렵겠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수업시간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수업 대형이 만들어졌다. 얼떨결에 학생들 앞에 선 나는 경찰을 등진 채 철학자 스피노자의 신과 선악 개념에 대해 강의했다.갑자기 시위를 중단하고서 시위 내용과 상관도 없는... -
2024년 12월3일
유엔이 정한 세계장애인의날장애인 농성장 차려졌던 그곳계엄에 분노한 시민들로 가득이 촛불에, 희망 하나 보탠다12월3일. 유엔이 정한 ‘세계장애인의날’이었다.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행동을 시작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전장연은 오후에 국회 앞에서 장애인 권리 입법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밤에 국회의사당역에서 노숙을 할 예정이었다. 내가 속한 노들야학 사람들 상당수가 이 투쟁에 결합하기로 했다. 그런데 전날 자정 무렵 야학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12월3일의 일정을 조정해야겠다고, 이런 ‘힘든 마음’으로는 투쟁에 결합하는 게 무리라고.12월3일. 우리는 상중이었다.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야학 학생인 지민이 누워 있었다. 발달장애인이었던 지민은 야학에서 붙박이처럼 지냈다. 사람들이 ‘노들에 살어리랏다상’을 수여했을 정도다. 지민은 서울시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해고노동자’이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아 뒤로 숨던 지민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여하면서 ... -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매년 이맘때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수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청 인근에서 열렸다. 그런데 작년부터 특별한 노동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노동자대회에 참석하는데 뭐가 특별할까 싶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노동자들은 사회가 노동자로서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노동자대회 참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장이고 투쟁이다.서울시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에서 해고한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지금 이들은 수백일째 해고에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다. 해고노동자라는 비극적 이름마저 이들에게는 획득 지위가 된 셈이다.고용승계 없이 공공 사업 폐지한순간 일자리 잃은 중증장애인일은 했지만 노동자가 아니다?죽지 않으려 얼마나 싸워야 하나한 번에 외우기도 힘든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라는 긴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중증장애인들의 설움과 불안이... -
내가 죽어야 한다면
아빠 잃고 기다리는 아이에게하늘의 연이 천사처럼 보이게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시인우리는 그 연에서 희망을 본다“내가 죽어야 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살아/ 내 이야기를 전하게/ 내 물건들을 팔아/ 한 조각의 천과 한 뭉치의 실을 사게,/ (그걸로 꼬리 긴 하얀 연을 만들게)/ 가자의 어딘가에 있을 아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가/ 섬광 속에서 떠나버린 아빠를/ 아무에게도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제 몸뚱이에도/ 제 자신에게도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떠나버린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가/ 하늘에 떠 있는 연을, 그대가 만든 나의 연을 볼 수 있게/ 잠시나마 아이가 저기 천사가 있다고/ 사랑을 가져다줄 천사가 왔다고 생각하게 해주게/ 내가 죽어야 한다면,/ 희망이 되도록 해주게/ 이야기가 되도록 해주게.”팔레스타인의 시인 리파트 알라리어의 시 ‘내가 죽어야 한다면’(If I must die)이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이 계속되던 지난겨울, 트위터... -
불구공동체의 일원인 비장애인
내가 집사로 있는 ‘읽기의집’ 이웃에는 발달장애청년네트워크 ‘사부작’이 있다. 여기서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청년을 만났다. 그는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인권과 사회정의’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동생의 거처가 불안정해지자 일시 귀국한 모양이다. 다행히 동생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를 얻었고 지원주택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캐나다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했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서울시에서 권리중심 일자리 사업을 폐지하면서 동생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는 출국 일정을 미루면서 동생의 자립 상황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무사히 출국했는지 모르겠다. 청년의 삶에서 동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동생의 삶에서 장애가 차지하는 비중과 비례한다. “동생은 언제나 제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요. 동생이 잘 지내느냐 못 지내느냐가 제 생활은 물론이고 건강까지 좌우하죠.”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두 살 터울... -
발목들을 향해 건넨 말
믿기지 않겠지만 2021년 12월에 시작된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3년의 평일 아침을 단 한번도 쉰 적이 없다. 처음에는 출근길 지하철에 집단 탑승을 시도했고, 무정차 통과 조치가 시행된 뒤부터는 승강장에서 구호만 외쳤다. 그것까지 금지되자 침묵한 채 피켓만 들었고, 침묵조차 불허인 지금은 승강장에 들어갔다가 끌려 나오는 일만을 반복하고 있다.언론도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더 이상 보도하지 않는다. 대개 구경꾼들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화끈한 것을 원한다. 언론도 그렇다. 자신의 사명에 어떤 꽃단장을 하든, 언론이 최고로 바라는 것은 피이고, 그게 어렵다면 머리채를 잡아야 하고, 최소한 욕설이라도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면 보도 가치가 생긴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했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언론에 관한 뒤집힌 명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국이 장애인들에게 승강장을 원천봉쇄하는... -
그의 선물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 중증장애인 만나며 세상이 선명 세상의 무감각에 반응하기 시작‘출근길 지하철’에 서 있는 이유 여러분께 선물 안겨드리고 싶다내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2007년이다. 동료들과 만든 잡지 창간호에 그의 인터뷰를 싣고 싶었다. 당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기어가던 장애인들의 시위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터였다. 그는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문제는 날짜였다. 2001년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이래 그는 바쁘지 않은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때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국회 통과를 앞둔 시점이라 더 바빴다. 날짜 잡기와 미루기가 반복되었다. 그가 바쁜 만큼 나도 초조했다. 인터뷰 날짜가 옮겨질 때마다 잡지 창간 일정이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터뷰하기를 잘했다. 그날 나는 단번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박경석이 이번에 책 <출근길 ... -
사람의 우물
물건 만드는 일에 혁명 자주 일어나정작 생명 돌보는 일에는 안 나타나여성들 노동에 대한 처우가 그렇다영화 ‘열 개의 우물’ 엄마들 이야기이 우물 덕분에 혁명은 죽지 않았다어떤 사회형태도 사람과 물자의 재생산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간 활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일’과 ‘사람을 돌보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로 나누어 볼 때, 자본주의에서는 둘의 관계가 다른 사회형태들과 확연히 다르다고 했다. 사람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대상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회형태에서는 사람의 일을 물건의 일보다 우선시한다. 사람을 향한 노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반대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마치 “물자 생산을 늘리는 것이 사회의 일차적 존재 이유인 것처럼 행세”한다(<역순의 혁명>).그래서인가. 물건 만드는 일에서는 혁명도 자주 일어나고 새로운 미래가 ... -
실패의 말
구치소에서 특강하다 들은 말“지금 우리 깨우러 온 거예요?”일본 학자의 산문집 ‘전쟁의…’ 실패의 여정 거쳐 도달한 성숙“그래서 지금 우리 깨우러 온 거예요?” 서울동부구치소에서 만난 청년은 그 한마디로 내 아름다운 말에 흠집을 내버렸다. 교도소에서 인문학 특강을 하던 중이었다. 그날 나는 중국 작가 루쉰이 <외침>의 서문에 썼던 ‘철방에 잠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절대 부술 수 없고 창문도 없는 철로 된 방.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모두가 곧 죽겠지만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한다. 루쉰은 물었다. 이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가.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어쩌면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 어차피 살아나갈 방법도 없는 이들을 깨워야 하는가.그날 나는 이 물음에 인문학 공부의 이유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 부스러기 하나 구해오지 못하는 인... -
노동자일 권리
노동절 하루 앞둔 서울시청 앞 중증발달장애 해고노동자 시위“약속”이란 문구에 무력감 느껴 고용승계 원칙도 저버린 서울시일자리가 단발성 체험학습인가노동절을 앞둔 4월30일, 10여명의 중증발달장애인 해고노동자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손팻말에는 “우리 일자리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요”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충동과 내 글로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다는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글이란 게 목소리를 담아두는 불멸의 그릇처럼 느껴지다가도 물 한 바가지도 담을 수 없는 깨진 옹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경우가 그렇다. 내 글로는 이날의 목소리를 담을 수가 없다. 몇번이나 고쳐 써보았지만 내가 쓴 문장들은 내가 들은 말들처럼 보이지 않았다.이날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이 분노하며 외친 말들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약속했잖아요.” “정말 화가 납니다.” “장난이 아니에요.” “꼭 반성해주세요.” 근래 내가 들은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