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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야 한다면
아빠 잃고 기다리는 아이에게하늘의 연이 천사처럼 보이게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시인우리는 그 연에서 희망을 본다“내가 죽어야 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살아/ 내 이야기를 전하게/ 내 물건들을 팔아/ 한 조각의 천과 한 뭉치의 실을 사게,/ (그걸로 꼬리 긴 하얀 연을 만들게)/ 가자의 어딘가에 있을 아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가/ 섬광 속에서 떠나버린 아빠를/ 아무에게도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제 몸뚱이에도/ 제 자신에게도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떠나버린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가/ 하늘에 떠 있는 연을, 그대가 만든 나의 연을 볼 수 있게/ 잠시나마 아이가 저기 천사가 있다고/ 사랑을 가져다줄 천사가 왔다고 생각하게 해주게/ 내가 죽어야 한다면,/ 희망이 되도록 해주게/ 이야기가 되도록 해주게.”팔레스타인의 시인 리파트 알라리어의 시 ‘내가 죽어야 한다면’(If I must die)이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이 계속되던 지난겨울, 트위터... -
불구공동체의 일원인 비장애인
내가 집사로 있는 ‘읽기의집’ 이웃에는 발달장애청년네트워크 ‘사부작’이 있다. 여기서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청년을 만났다. 그는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인권과 사회정의’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동생의 거처가 불안정해지자 일시 귀국한 모양이다. 다행히 동생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를 얻었고 지원주택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캐나다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했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서울시에서 권리중심 일자리 사업을 폐지하면서 동생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는 출국 일정을 미루면서 동생의 자립 상황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무사히 출국했는지 모르겠다. 청년의 삶에서 동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동생의 삶에서 장애가 차지하는 비중과 비례한다. “동생은 언제나 제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요. 동생이 잘 지내느냐 못 지내느냐가 제 생활은 물론이고 건강까지 좌우하죠.”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두 살 터울... -
발목들을 향해 건넨 말
믿기지 않겠지만 2021년 12월에 시작된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3년의 평일 아침을 단 한번도 쉰 적이 없다. 처음에는 출근길 지하철에 집단 탑승을 시도했고, 무정차 통과 조치가 시행된 뒤부터는 승강장에서 구호만 외쳤다. 그것까지 금지되자 침묵한 채 피켓만 들었고, 침묵조차 불허인 지금은 승강장에 들어갔다가 끌려 나오는 일만을 반복하고 있다.언론도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더 이상 보도하지 않는다. 대개 구경꾼들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화끈한 것을 원한다. 언론도 그렇다. 자신의 사명에 어떤 꽃단장을 하든, 언론이 최고로 바라는 것은 피이고, 그게 어렵다면 머리채를 잡아야 하고, 최소한 욕설이라도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면 보도 가치가 생긴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했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언론에 관한 뒤집힌 명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국이 장애인들에게 승강장을 원천봉쇄하는... -
그의 선물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 중증장애인 만나며 세상이 선명 세상의 무감각에 반응하기 시작‘출근길 지하철’에 서 있는 이유 여러분께 선물 안겨드리고 싶다내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2007년이다. 동료들과 만든 잡지 창간호에 그의 인터뷰를 싣고 싶었다. 당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기어가던 장애인들의 시위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터였다. 그는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문제는 날짜였다. 2001년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이래 그는 바쁘지 않은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때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국회 통과를 앞둔 시점이라 더 바빴다. 날짜 잡기와 미루기가 반복되었다. 그가 바쁜 만큼 나도 초조했다. 인터뷰 날짜가 옮겨질 때마다 잡지 창간 일정이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터뷰하기를 잘했다. 그날 나는 단번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박경석이 이번에 책 <출근길 ... -
사람의 우물
물건 만드는 일에 혁명 자주 일어나정작 생명 돌보는 일에는 안 나타나여성들 노동에 대한 처우가 그렇다영화 ‘열 개의 우물’ 엄마들 이야기이 우물 덕분에 혁명은 죽지 않았다어떤 사회형태도 사람과 물자의 재생산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간 활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일’과 ‘사람을 돌보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로 나누어 볼 때, 자본주의에서는 둘의 관계가 다른 사회형태들과 확연히 다르다고 했다. 사람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대상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회형태에서는 사람의 일을 물건의 일보다 우선시한다. 사람을 향한 노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반대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마치 “물자 생산을 늘리는 것이 사회의 일차적 존재 이유인 것처럼 행세”한다(<역순의 혁명>).그래서인가. 물건 만드는 일에서는 혁명도 자주 일어나고 새로운 미래가 ... -
실패의 말
구치소에서 특강하다 들은 말“지금 우리 깨우러 온 거예요?”일본 학자의 산문집 ‘전쟁의…’ 실패의 여정 거쳐 도달한 성숙“그래서 지금 우리 깨우러 온 거예요?” 서울동부구치소에서 만난 청년은 그 한마디로 내 아름다운 말에 흠집을 내버렸다. 교도소에서 인문학 특강을 하던 중이었다. 그날 나는 중국 작가 루쉰이 <외침>의 서문에 썼던 ‘철방에 잠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절대 부술 수 없고 창문도 없는 철로 된 방.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모두가 곧 죽겠지만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한다. 루쉰은 물었다. 이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가.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어쩌면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 어차피 살아나갈 방법도 없는 이들을 깨워야 하는가.그날 나는 이 물음에 인문학 공부의 이유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 부스러기 하나 구해오지 못하는 인... -
노동자일 권리
노동절 하루 앞둔 서울시청 앞 중증발달장애 해고노동자 시위“약속”이란 문구에 무력감 느껴 고용승계 원칙도 저버린 서울시일자리가 단발성 체험학습인가노동절을 앞둔 4월30일, 10여명의 중증발달장애인 해고노동자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손팻말에는 “우리 일자리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요”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충동과 내 글로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다는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글이란 게 목소리를 담아두는 불멸의 그릇처럼 느껴지다가도 물 한 바가지도 담을 수 없는 깨진 옹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경우가 그렇다. 내 글로는 이날의 목소리를 담을 수가 없다. 몇번이나 고쳐 써보았지만 내가 쓴 문장들은 내가 들은 말들처럼 보이지 않았다.이날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이 분노하며 외친 말들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약속했잖아요.” “정말 화가 납니다.” “장난이 아니에요.” “꼭 반성해주세요.” 근래 내가 들은 가장... -
나는 세월호를 몰랐다
‘조각난 마음 이어 붙이던’ 10년 유족들 퀼트·목공조합·가족극단 시신 닦은 상장례사·성직자들… 거대한 슬픔과 단단한 기쁨 담은 책 ‘520번의 금요일’을 권한다<520번의 금요일>.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그간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책을 펼치고 몇쪽 읽지 않았는데도 수문이 열리듯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 몰래 내 안에서 10년의 세월을 울고 있던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가만히 앉아서 문장을 눈으로 더듬어갈 뿐인데도 험한 고개를 넘는 듯 몇번이나 쉬어가야 했다.우리가 어떻게 세월호를 모를 수 있겠는가.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가라앉던 세월호를 말이다. 또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분향소 정면을 가득 채운 앳된 얼굴들,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정을 껴안은 채 청와대를 향해 걷던 유족들의 모습, 진도 팽목항에서 나부끼던 노란 천들, 사람들의 옷과 가방에 달려 있던 노란 리본들. 그뿐이 아니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
서울시청의 궤변론자
유엔의 ‘탈시설’ 권고에 서울시는시설 거주도 탈시설이라며 억지 서울시가 할 일은 시민의 삶에서 죽음과 부자유 상태 줄여주는 거지궤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지난주 서울시가 ‘장애인 자립지원 절차’에 대한 개편안을 발표했다. 장애인 탈시설 절차를 새로 만든 것이다. 개편안에 따르면 탈시설을 원하는 장애인은 의료진 등에게 먼저 자립 역량을 조사받아야 한다. 그다음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립위원회가 해당 장애인에게 곧바로 탈시설을 허용할지, 적응 기간을 거치게 할지, 시설에 그대로 남게 할지를 결정한다. 탈시설 이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부적응자가 발견되면 재입소를 지원한다. 무슨 재소자 가석방 심사절차 같다.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 서울시는 권리의 이름으로 이 당연한 권리를 부인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장애인의 주거선택권’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
노래를 만드는 공장
발달장애인의 삶·생각과 입을 거쳐세상에 흘러나온 노래들아니, 노래를 통해 흘러나온 세상서울시가 노래공장을 폐쇄시켰다노래 지켜야 노래하는 세상이 온다노래를 만드는 공장. 왠지 동화책 제목 같다. 그런데 이런 공장이 정말 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편 유리로 덮인 작은 빌딩에 있다. 정확한 이름은 ‘노들노래공장’이다. 2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협업해서 노래를 매주 한 곡씩 만들어낸다. 주문도 받는다. 가사를 적어 보내면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고 직접 불러주기까지 한다. 공장 홈페이지(nonogong.kr)에는 이들이 생산한 음원과 악보가 공개돼 있다. 누구나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놀라운 것은 이 노동자들의 정체다. 이들 대부분은 탈시설한 중증발달장애인이다. 노래공장이 정말로 노래를 만드는 공장인 것처럼, 이들도 정말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다. 서울시의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 지난 2년간 임금이 지급됐다. 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