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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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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병권의 묵묵]내 친구 피터의 인생담
    내 친구 피터의 인생담

    내 친구 피터, 그는 목소리가 정말 컸다. 말하는 게 사자후를 토하는 듯했다. 은유 작가는 그를 두고 ‘아이를 낳듯’ 말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그가 온몸을 비틀어 내보내는 말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오는 아이들 같았다. 그 목소리는 노들야학 첫 수업 때 분위기에 눌려 백기투항 직전에 있던 나를 살려준 지원군이기도 했다. ‘야, 이거 골 때리네!’ 그가 간간이 넣어주던 추임새가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환영사였다.내 친구 피터, 그가 제일 힘들어 한 과목은 한글이었다. 복지관에서 시작해 20년을 배웠다는데 여전히 글 읽는 것이 신통치 않았다. 낱글자는 소리내서 읽을 수 있는데, 단어가 되고 구절이 되면 처음 읽은 글자들이 궁둥이를 슬슬 빼기 시작하고, 문장 끝에 이르면 앞서 읽어둔 단어와 구절들이 다 도망치고 없다고 했다. 지독한 난독증이었다. 그런 그가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듣기 능력 덕분이다. 그는 읽을 수 없지만 들을 수 있었다. 귀를 통해 들어온 ...

    2017.04.09 21:00

  • [고병권의 묵묵]왕의 자리
    왕의 자리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는 왕관을 쓴 왕을 허깨비 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렉산더 왕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걸 들어주겠다는 왕에게 그냥 비켜서라고 했다. 햇볕! 그는 원하는 것을 이미 누리고 있었다. 왕이란 기껏해야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존재가 아니던가. 왕궁과 군대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왕관을 벗겨놓으면 왕이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는 존재가 누구를 구원한단 말인가. 왕관 하나를 차지하려고 온갖 음모를 꾸몄고 그걸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존재, 이미 그것으로 충분히 병든 존재가 누구를 치유한단 말인가. 그래서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를 ‘아틀리오스의 아들 아틀리오스’라고 불렀다.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이나 그 자식인 알렉산더나 똑같이 가련한 인간이라는 것이다.진정한 왕에게는 왕관이 필요 없다. 이것이 견유주의의 가르침이다. 그 삶이 온전히 왕인데 별도의 표시가 왜 필요한가. 왕관은 오히려 가짜왕의 징표이다. 이와 반대로 인류사에는 넝마를 두르고도 ...

    2017.03.12 21:20

  • [고병권의 묵묵]말과 한숨 사이에서
    말과 한숨 사이에서

    연구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대학 강의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했다. 공부 시간을 확보하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상업화된 대학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비싼 등록금과 강사의 값싼 노동력을 쥐어짜서 높은 건물을 세우고 그 이마에 진리니 자유니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써대는 그 대담한 위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생계가 그리 여유 부릴 형편은 아닌지라 욕을 하면서도 그놈의 강사 자리를 찾아 대학 언저리를 들락거린다.대학 강의에 다시 나섰을 때 나는 내 발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누군가 내 목을 끌고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내게 숨구멍을 터준 것은 학생들이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어느 순간 빛난다. 아마도 그 빛에 홀려 대학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싶다. 작년에 세미나 수업을 함께 진행했던 학생들이 특히 그랬다. 학생들 대부분이 독서와 토론에 열심이었다. 자기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펴는 모습이 놀랍기까지 했다.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2017.02.12 20:58

  • [고병권의 묵묵]소리없는 외침에도 귀를 열자
    소리없는 외침에도 귀를 열자

    7년 전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첫 수업을 하던 날,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고요였다. 내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수업 종이 쳤는데도 떠들어대던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나 고생했다. 그런데 첫 수업에서 나는 소란이 아니라 고요를 이겨내야 했다. 좁은 교실에 열 명 안팎의 학생이 있을 뿐인데도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전화기에 더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처럼 나는 목청을 한껏 높였다. 그러나 내가 그날 들은 소리라고는 전동휠체어를 움직일 때 나는 전자음을 빼고 나면 대부분이 내가 낸 소리였다. 나는 내 말만 들었던 것이다.그날 학생들 중 음성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서넛 정도였다. 그것도 힘겹게 한 단어씩, 아니 한 글자씩 발성하기 때문에 한 문장을 말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떤 학생은 소리가 너무 작아 귀를 바싹대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었고, 겨우 한 마디 소리를 내던 어떤 학생은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보고 결국 가방 속에서 글자판을 꺼내야 했다...

    2017.01.0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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