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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 [고병권의 묵묵] 봉쇄된 건물의 창문 앞에서
    봉쇄된 건물의 창문 앞에서

    내게는 이제 하나의 믿음이 생겨읽기는 노래만큼 춤일 수 있고노래와 춤이 있는 한,우리 언어와 공부, 그리고 투쟁은어떻게든 봉쇄를 뚫을 것이다1977년 미국의 장애인들이 정부를 향해 재활법 504조에 서명할 것을 촉구하며 보건교육복지부를 점거한 적이 있다. 재활법 504조는 연방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예산지원을 받는 대학 등 수많은 기관과 프로그램들이 적용대상이었다. 의회에서 재활법이 통과될 때만 해도 이 조항을 눈여겨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저 공적인 영역에서 누구도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아름답지만 식상한 문구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이 문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정부가 발을 빼기 시작했다. 지금 이 나라의 정부처럼 당시 미국 정부도 장애인들에게는 문구만 주고 예산은 다른 데 쓰고 싶었던 것이다.얼마 전 작고한 장애운동가...

    2023.03.31 03:00

  • [고병권의 묵묵] 호소
    호소

    발달장애인 남매가안전한 지원체계에 있는 모습 보고엄마가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한다시간이 많지 않다정부와 지자체 향해 목소리 내달라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대체로 중요한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이것이 내가 칼럼을 쓰는 이유이다. 적어도 이 지면을 쓰는 이유는 그렇다. 내 안에는 세상에 대고 떠들어 댈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혼자 간직해도 그만인 이야기들, 소수의 사람들만 알아도 그만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내 글쓰기 전압을 확 끌어올린다. 너무나 중요한 목소리가 너무나 작게 들려올 때 정신의 진공관이 뜨겁게 달구어진다.이 지면에 처음 칼럼을 쓰게 된 계기도 그렇다. 2017년 겨울, 광화문 지하에는 장애인들의 오래된 농성장이 있었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함성이 지상을 울리고 있을 때, 내 정신을 휘저은 것은 지하의 작은 소리들이었다. 어느날 한 활동가가 농성장에서 급히 앰프를 찾았다.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2023.03.03 03:00

  • [고병권의 묵묵] 약자에서 탈락하다
    약자에서 탈락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전장연을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장연을 강자로 승격시킨 게 아니라 약자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오 시장은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다. 쓰고 다니는 마스크에도 새겨놓았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넌 약자가 아니야’라고 말했다면 그건 ‘넌 동행 자격이 없어’라는 뜻이다. 놀랍게도 오 시장은 지하철을 타게 해달라고 수십 년을 외쳐온 장애인들을 탈락시키는 대신 이번 시위로 지하철 이용에 불편을 겪은 ‘시민들’을 약자로 규정했다. 그러다보니 ‘약자와의 동행’이 그다지 약해 보이지 않는 자들과의 동행, 사실상 ‘시민과의 동행’이 되고 말았다. 그와 더불어 ‘넌 약자가 아니야’도 ‘넌 시민이 아니야’에 가까워졌다.처음에는 정부나 서울시가 장애인 권리 예산에 대해 이토록 부정적인 것이 재정에 대한 보수적 관념 때문인가 싶었다. 작년 기획재정부 장관이 “장애인들 요구까지 다 들어주면 나라 망한다”고 했을 때 1...

    2023.02.03 03:00

  • [고병권의 묵묵] “너희가 사람이냐”
    “너희가 사람이냐”

    여권도 서울시도 교통공사도장애인들을 톡톡 건드린다‘권리 향한 투쟁 포기 않겠다’장애인들 시위는 그 답변이다사람이길 시민이길 포기 못하기에1월2일 아침의 서울 삼각지역.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기자들 앞에서 출근길 선전전을 재개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장애인도 시민이지만 장애인에게는 기본적인 시민권, 즉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권리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국회예산 상황을 지켜보자며 휴전을 제안해서 출근길 탑승 시위를 중단했으나 결국 전장연의 예산 요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난달 법원이 내놓은 강제조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사실상 열차 연착 시위를 불허한 조정안이지만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는 연착을 유발하지 않는 시위 방식을 택하겠다고 했다.내용도 많지 않았고 목소리도 차분했다. 하지만 기자회견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삼각지역장이 20~30초마다...

    2023.01.06 03:00

  • [고병권의 묵묵] 141일의 삭발식
    141일의 삭발식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투쟁이 1년이 되었다. 장애인에게도 교육받고, 노동하고, 시설이 아닌 동네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말을 당연한 말로 만드는 것이 참 힘들었다. 20년 전부터 선로에 뛰어들고 도로를 기어가는 일을 숱하게 반복하고 나서야 이동편의증진법, 특수교육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발달장애인권리보장법 등이 제정되었다. 그런데도 장애인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미흡한 법률도 문제였지만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이 컸다. 정부는 매년 예산이 아니라 말을 책정해왔다. ‘노력하겠다’, 이것은 말이지 돈이 아니다. 그리고 말로써는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담은 투쟁이 이토록 계속된 것은 정부가 자꾸 돈 대신 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지난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출근길 지하철탑승시위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달 국회에서 예산안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참 반향이 큰 시위였다. 감히 출근길 대란을 일으키...

    2022.12.09 03:00

  • [고병권의 묵묵] 주택의 아래와 위에서 살다
    주택의 아래와 위에서 살다

    이태원 참사로부터 10여일이 지났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참사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내 안에 있나 싶을 정도다. 처음 이삼일은 기사를 열심히 검색하면서도 제목만 보았을 뿐 본문까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족이나 생존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열흘간 제정신이었던 것은 정부관료들과 보수언론뿐이었던 것 같다. 법적 책임을 모면하고 정치적 위기를 차단하는 데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작가인 스탕달은 훌륭한 철학자가 되려면 돈 많은 은행가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했다. 바로 사태를 냉정하게 보는 것이다. 어디 철학자만 그럴까. 세상을 살 만하게 바꾸고자 한다면, 아니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게 만들고 싶다면, 돈을 세는 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냉정함을 가져야 한다. 희망에서 생겼든 절망에서 생겼든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돈을 세면서 입발림을 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가 센 돈을 다시 세어보는 것이다. ...

    2022.11.11 03:00

  • [고병권의 묵묵] 포획의 계절
    포획의 계절

    단속과정서 인권 보호하겠다는말은 참 허망하기 그지없다불법에 대한 이런 단속이 내게는인간이 인간에, 생명이 생명에게저지르는 거대 범죄의 일부 같다또 계절이 온 모양이다. 지난 5일 법무부는 두 달 동안 불법체류자 집중단속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법무부, 경찰청, 고용노동부, 국토교통부, 해양경찰청 등이 모두 나서 범정부 차원에서 합동단속을 벌인다고 한다. 몇 줄 안 되는 보도자료라서 그런지 더욱 결기가 느껴진다. 흡사 범죄와의 전쟁 선언 같다. 하지만 단속 대상은 흉악범들이 아니라 비자기간을 넘긴 외국인들이다. 불법이라고는 했지만 사법적 처벌이 아니라 행정조치의 대상들이다.불법을 단속하겠다는데 무슨 시빗거리가 되나 싶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법무부는 이번 조치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 유연한 외국인 정책의 전제는 ‘엄정한 체류질서의 확립’ ”이라는 장관의 말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했다. 집중 단속 분야도 따로 밝혀두었다. “택배·배달 등 일자리 잠식 업종”과...

    2022.10.14 03:00

  • [고병권의 묵묵] 공부하는 심정
    공부하는 심정

    장애연구자 다수는 장애인 가족사회에 대한 흥미가 아닌 염려와돌봄 주체이자 해방의 일원으로자료를 모으고 문장을 쓰는 마음그들의 마음을 꼭 껴안고 싶다당신 공부의 동력은 무엇인가. 오래전 어느 선생이 내게 물었다. 그때 호기심이라고 답했다. 처음에는 연구 대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하지만,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지켜보고 싶다고. 이런 호기심이 내 공부를 이끄는 것 같다고. 거짓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낯 뜨거운 답변이었다. 너무 겉멋을 부렸다. 다른 새의 깃털을 제 몸에 꼽았던 이솝우화의 까마귀처럼, 남의 문구를 빌려서 내 공부의 동기를 장식했다. 사실 그것은 미셸 푸코의 말이었다. <성의 역사> 제2권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토록 끈질기게 작업에 몰두했던 것은 호기심, 그렇다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을 허용해주는 그...

    2022.09.16 03:00

  • [고병권의 묵묵] 불쌍한 놈, 위험한 놈
    불쌍한 놈, 위험한 놈

    불쌍한 놈이 위험한 놈 되는 순간자선통치자가 공안통치자 돌변‘이건 뭐지’ 하고 벙찌는 일이지만두 얼굴의 통치자는 늘 이럴 위험지금 이 땅에도 징후가 농후하다새 정부가 들어선 지 100일.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바닥이다. 실망한 사람, 분노한 사람이 70%에 육박한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느낀 감정은 실망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내 감정은 당황과 황당 사이를 자주 오갔다. 얼빠진 사람처럼 “이건 뭐지?” 하고 ‘벙찌는’ 일이 많았다.이를테면 이런 장면에서 그랬다. 어느 월요일 아침 대통령은 기자들과의 짧은 문답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발걸음을 로비 쪽으로 돌린다. 그러고는 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거기 걸린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작품명과 작가명도 빠짐 없이 확인한다. 모두가 발달장애인 작가들의 작품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장애인 예술가들이 소외되지 않고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기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대통령의 철학이 반영된” 전시라고 한다...

    2022.08.19 03:00

  • [고병권의 묵묵] 가난한 자에 대한 섬김
    가난한 자에 대한 섬김

    내 대학 시절 해방신학은 낡아도가난한 자들에 대한 섬김은 유지이젠 사회도 대학도 오래전 개종학생이 가난한 자를 고발하는 등대학도 세상이 섬기는 신을 섬겨그 시절 대학은 많은 게 뒤집힌 곳이었다. 신입생으로 두 달을 보낸 5월 어느 날 갑자기 기온이 쑥 올라갔다. 체감으로는 한여름 같았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들었는데도 나는 긴 옷을 입었다. 서울살이를 시작할 때 고향집에서 여름옷까지 챙겨오지 않아 입을 옷이 없었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학생회관 근처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기금 마련을 위해 티셔츠를 판매하는 학생들이 있었다.그런데 그날은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학생회실이나 동아리방에 하나쯤 굴러다니던 반팔셔츠도 그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별수 없이 학교 기념품 매장으로 가서 저렴한 걸로 하나 골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셔츠 앞면에 학교 로고가 너무 크게 박혀 있었다. 부끄러웠다. 입학 전에는 그 로고가 찍힌 볼펜이나 노트를 자랑하듯 선물했는...

    2022.07.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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