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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 [고병권의 묵묵]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라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라

    이것은 연쇄살인 사건이다. 매년 동일 수법으로 지역을 넘나들며 사람들을 죽이는데도 범인이 잡히지 않고 있다. 이번 피해자는 50대 여성 A씨. 범행은 서울의 한 대학교 주차장. 피살 현장에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딸이 있었다. 범인은 딸을 노렸는데 어머니가 딸을 혼자서 지켜내려다 결국 희생당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발달장애인 자녀를 곁에 두고 자살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두었다는 말만으로도 어머니의 신변 비관, 우울증, 심지어는 자살조차 납득이 된다. 그래서 이 사회에 화가 나고 또 절망한다. 무슨 대역죄라도 진 건가. 딸을 혼자 돌본 저 어머니도 어느 순간 선택지를 받았을 것이다. 혼자 죽거나 함께 죽거나 시설에 보내거나. 즉 생명을 끊거나 관계를 끊어야 한다. 그러나 관계를 끊는 것도 생명의 길은 아니다. 숨만 쉬는 것이지 죽어가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돌봄을 포기한 부모들은 뿌리가 썩은 식물처럼 화창한 날에도 시들어가고,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은 웃음 ...

    2021.03.01 03:00

  • [고병권의 묵묵]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자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자

    이 지면에 칼럼을 게재한 지 꼭 4년이 되었다. 2017년 1월, 대통령 탄핵으로 주말마다 수백만의 인파가 광화문에 집결하던 때였다. 다른 때였으면 원고 청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때에 맞게, 좋은 글을, 규칙적으로 쓴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날 청탁을 수락했던 것은 목소리를 보태기 위해서였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던 함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함성 때문에 더욱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있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 기준, 그리고 장애인수용시설의 폐지를 요구하며 5년째 광화문 지하를 지키던 사람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서 결심했다. 이 지하 농성장의 볼륨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싸구려 앰프라도 되어야겠다고. 그해 가을, 농성은 마무리되었다.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이다.눈발이 날리던 토요일 아침, 4년 전의 그곳을 또 찾았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때의 요구를 들고 다시 농성장을 차렸기 때문이다. 새 농성장은 지상으로 이...

    2021.02.01 03:00

  • [고병권의 묵묵]사람 살려!
    사람 살려!

    2008년 처음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보았다. 교도관 뒤를 졸졸 따라가는데, 얼마나 긴장했던지, 예닐곱 개의 철문을 지나치는데 가슴이 예닐곱 번 철렁댔다. 볕이 드는 1층 복도를 따라 걷는데도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수인이 아니라 강사였는데도 그랬다. 나는 인권연대가 주관한 재소자 인문학 프로그램(평화인문학)의 강사였다. 이 프로그램을 따라 안양, 수원, 여주, 영등포, 남부 등 여러 구치소와 교도소를 다녔다. 강의를 거듭할수록 처음의 긴장과 두려움은 사라졌다. 하지만 철문들이 닫히는 소리에는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전자장비가 부착되어 예전보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닫히는데도 그랬다. 그것은 사람을 가두는 문들이 닫히는 소리였기 때문일 것이다.주관 단체가 10여년간 분투했음에도 프로그램 규모는 계속 축소되었다. 겨우 한 차례 특강만 하게 되면서부터 내 강연 주제는 똑같아졌다. 제목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주제는 모두 ‘왜 인문학을 공부하는가’였다. 단 한 번...

    2021.01.04 03:00

  • [고병권의 묵묵]이 겨울의 방어태세
    이 겨울의 방어태세

    이 겨울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이렇게 말이 없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라가 조용하다는 건 아니다. 사실은 아주 소란스럽다. 상대 정파의 지지율을 1%라도 낮추기 위해 혹은 자기 콘텐츠의 구독자 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글을 써대고 영상을 제작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좋아요’와 ‘싫어요’를 원하는 한가한 말들뿐이다. 내가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은 생존 위기에 처한 ‘우리들’의 말이다. 도대체 이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한탄이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말을 나눌 사람도, 기회도 없다. 이 겨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당국으로부터 지침은 받고 있다. 매일 신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통보받고, 거리 두기 단계가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를 통보받는다. 가게 영업시간을 통보받고, 몇 명이 모일 수 있는지를 통보받고, 우리들의 품행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통보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포고령이지 말이 아니다....

    2020.12.07 03:00

  • [고병권의 묵묵]상원의원과 전역하사
    상원의원과 전역하사

    2012년 미국 아메리칸 대학의 한 학생이 학생회장 임기를 마치며 신문에 ‘진짜 나(The Real Me)’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고백했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안의 여성을 억누른 채 남성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사소한 일이든 짜릿한 일이든 나는 내가 해낸 일을 여성인 내가 행하는 모습으로 다시 상상함으로써만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내 삶은 그런 식으로 내 곁을 지나쳐 갔고,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로서 삶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가 벽장문을 열고 나올 용기를 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도전하지 않는다면 내 꿈과 정체성은 서로 배타적인 채로 남고 말 겁니다.” 꿈을 선택하면 정체성을 감춰야 하고 정체성을 선택하면 꿈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 자신이 아닌 채로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을 청년은 견딜 수 없어 했다.꿈을 위해 ...

    2020.11.09 03:00

  • [고병권의 묵묵]두 번째 사람 홍은전
    두 번째 사람 홍은전

    세상에는 두 번째 사람이 있다. 심보선 시인은 바로 시인이 그렇다고 했다. 시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면서 쓰는” 거라고. 첫 번째 자리는 슬픔의 자리이지 글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슬픔에 관한 첫 번째 글은 두 번째 자리에서 나온다. 그런데 어찌 시인만이겠는가. 세상에는 시인 말고도 두 번째 사람들이 있다. 내가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 홍은전 작가도 두 번째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세상에서 제일 많이 비어 있는 자리다. 첫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하고,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한데 두 번째 자리는 그렇지 않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슬퍼했다거나 분노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듣고 시뻘게진 눈알을 본다. 무엇보다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다. 그걸 알기에 나는 세 번째에 서고, 겁이 날 때는 ...

    2020.10.12 03:00

  • [고병권의 묵묵]변호사에게 먼저 건 전화
    변호사에게 먼저 건 전화

    지난주 인천 을왕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가해자들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음주운전도 문제였지만 사고 직후 보인 태도가 더 큰 분노를 자아냈다. 영상을 보면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내버려둔 채 차량 안에 머물렀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서야 바깥에 나왔는데 이때 변호사와 통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구급차를 부른 것은 이들이 아니었다. 사건의 진상은 조사가 끝나야 알 수 있겠지만, 가해자가 119가 아닌 변호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다. 내게는 이 행동이 하나의 징후처럼 보인다. 가해자들이 차량에서 바로 나오지 못한 것은 사고를 낸 충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 맨 먼저 떠올린 생각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가 아니라 ‘형량을 줄여야 한다’였다는 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내가 이 일을 우리 사회의 징후로 간주하는 것은 가해자들이 죽어가는 피해자를 내버려둔 채 자기방어적 행동에 몰두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변호사의 존재...

    2020.09.14 03:00

  • [고병권의 묵묵] ‘약자의 눈’
    ‘약자의 눈’

    그가 시설에 남은 건어쩌면 시설 밖 세상을 알고,장애인 인권을 알고 난 뒤에더 강해졌기 때문이다부디 그의 ‘눈’으로 정치하길지난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확대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는데 주관 단체 이름이 눈에 띄었다. ‘약자의 눈’. 의원들이 만든 연구단체인데 지난달 20일 출범했다고 하니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소개 리플릿에는 노인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행복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당찬 포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겉면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치는 ‘약자의 눈’을 통해 ‘미래의 눈’이 되는 것입니다.” 단체 소개 문장을 내가 이렇게 뚫어져라 본 적이 있던가.약자의 눈. 이 말을 몇 번인가 되뇌었더니 한 사람이 떠오른다. 이종강 선생. 가톨릭사회복지회가 운영하는 장애인시설에서 지내는 최중증장애인이다(그의 이야기는 <나, 함께 산다>(오월의 봄)에 실려 있다). 열아홉의 나이...

    2020.08.17 03:00

  • [고병권의 묵묵]말과 폭탄 사이에서
    말과 폭탄 사이에서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말은 말일 뿐이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엔 말뿐인 사람들만 넘쳐나고, 아무리 소리쳐도 말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8월 개봉 예정)을 보고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1975년 기업들에 폭탄테러를 가한 일본의 무장 운동 단체다.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던 미쓰비시중공업에서만 8명이 죽고 300명이 다쳤다. 언론은 이들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생각 없는 폭탄 마니아’라고도 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이후 일본 사회에서 누구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이들의 테러에는 현재의 상황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이들의 테러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미쓰비시는 전쟁 중에 조선 인민을 강제연...

    2020.07.20 03:00

  • [고병권의 묵묵]정말로 ‘노동의 권리’가 이런 거라면
    정말로 ‘노동의 권리’가 이런 거라면

    헌법은 사회가 지향하는 기본 이념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전혀 공감이 안 되는 조항들이 있다. 헌법 32조의 1항과 2항. 이 조항들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지며 또한 근로의 의무를 지고 있다. 과연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상황을 권리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을 모든 국민이 의무로 져야 하는가.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많은 사람들의 유일한 생존책이고, 이 조항들 없이는 국가를 향해 고용과 임금에 관한 대책을 요구할 근거가 없어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역사 문헌들을 읽다가 ‘노동의 권리’라는 말을 헌법에 담고자 했던 투쟁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의의가 있음을 알게 됐다. 1848년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르주아들과 협력해서 왕정을 타도한 파리의 노동자들은 정부를 향해 국민작업장의 설립을 요구했다. 예전에 나는 이것을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대책으로만 읽었다. 그...

    2020.06.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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