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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고병권의 묵묵
  • [고병권의 묵묵]동물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
    동물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

    발가벗은 내 모습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던 고양이. 자크 데리다는 <그러므로 나인 동물(L’Animal que donc je suis)>에서 벗은 몸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고양이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보통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즉 그 시선의 주체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일 때 이런 감정을 느낀다. 타인은 그 출현만으로도 내 세계를 흔든다. 새나 고양이가 나타난 것과는 다르다. 내가 어떤 못난 행동, 이를테면 열쇠구멍으로 누군가의 방을 훔쳐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때 나는 메두사의 눈이라도 본 것처럼 돌덩어리가 될 것이다. 남의 방이나 엿보는 놈으로 비친 것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사실은 작은 소리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깜짝 놀라 문에서 눈을 떼고는 그런 내 모습에 부끄러워할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한 이야기다.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한 이 ...

    2020.05.25 03:00

  • [고병권의 묵묵]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 혼자여선 안돼
    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 혼자여선 안돼

    며칠 전 미국의 한 연구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코로나 시대 시민들의 상호부조와 연대에 대한 책을 함께 쓰고 싶다고 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돕고 있는지,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를 모두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발코니에 나와 노래하고 연주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사회심리학적 백신 개발의 시급성에 대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다른 존재에 대해 형성하는 어떤 표상들은 코로나19 이상으로 전파력도 크고 치명적이다. 인간은 공포를 느낄 때 심리적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다. 이런 때 사람들은 평소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쏟아내고 터무니없는 폭력을 공공...

    2020.04.26 20:52

  • [고병권의 묵묵]다시 최옥란을 기억하며
    다시 최옥란을 기억하며

    봄마다 장애인들은 ‘420공동투쟁단’이라는 걸 꾸린다. ‘장애인의날’인 4월20일에 맞춰 장애인 차별의 현실을 고발하고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투쟁단은 매년 3월26일 출범해서 4월20일까지 활동한다. 올해도 3월26일, 지난주 목요일에 출범식을 가졌다. 코로나19 때문에 간격을 유지한 채 간소하게 진행되었지만 날짜가 바뀌지는 않았다. 도대체 3월26일이 무슨 날이기에 그럴까. 이날은 장애해방열사 최옥란의 기일이다. 생전에 나는 그를 TV에서 보았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었던 그가 12월의 칼바람을 맞으며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하는 사정을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다.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 이것이 그가 내건 요구였다.사정은 이랬다.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면서 경제력이 없는 국민들에게 최저생계비가 지급되었다.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하던 최옥란도 28만원 남짓의 생계비를 받았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이 돈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

    2020.03.29 21:15

  • [고병권의 묵묵]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 살아야 한다

    재작년부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한 책을 두 달에 한 권씩 2년간 펴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언제나 원고 마감이 코앞에 있는지라 시간을 아껴야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일정표가 깨끗해졌다. 아무것도 채워 넣을 수 없으니 텅 빈 일정표가 꽉 찬 일정표인 셈이다. 집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가족들과 밥을 먹고 휴식하는 시간을 빼고는 방에서 혼자 글을 쓰거나 자료를 정리한다. 답답하면 산책을 하고 잠시 동네 카페에도 들르지만, 대체로 혼자 걷고 혼자 커피를 마신다.처음에는 이런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싶었다. 워낙에 사람들과 어울려 수다 떠는 걸 좋아했고 산책도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졌다.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면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좋았고, 글을 쓰고 산책할 때는 혼자임에도 세상에 온전히 감싸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코로나19 사태가...

    2020.03.01 21:21

  • [고병권의 묵묵]“민폐만 끼쳤다”
    “민폐만 끼쳤다”

    한 사회는 의외로 소리 없이 크게 실패할 때가 있다. 소란스럽지 않아서 혹은 다른 소란 때문에 중요한 실패가 지각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실패를 더욱 큰 실패로 만든다. 실패했는지도 모르는 실패, 아니 그 이전에 어떤 시도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실패, 아니 그 이전의 이전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서 어떻게 되든 상관도 없었던 실패.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런 실패들 중 하나다. 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미안’과 ‘민폐’에서 시작한다. 설요한이라는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지난해 말에 동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 민폐만 끼쳤다.” 그는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였다. 중증장애인을 동료로서 지원한다는 것은 그도 중증장애인이라는 뜻이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는 정부가 시범 실시한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 지원사업’에 ‘동료지원가’로 채용되었다.동료지원가란 비슷한 장애를 가진 중증장애인을 찾아내 사회활동에 참여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상담도 하고 자...

    2020.02.02 20:56

  • [고병권의 묵묵]강제징용 노동자 이흥섭
    강제징용 노동자 이흥섭

    이것은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반도체가 아니라 소년이다. 소년의 나이는 열일곱.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밑으로 어린 동생이 둘 있었다. 그날은 아버지와 콩밭을 매고 있었다. “마을 이장과 면사무소에서 나온 사람, 그리고 다른 네 명 정도가 밭에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마을 이장이 아무 말 없이 노란색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넸습니다.” 훗날 소년이 담담히 구술한 그날은 너무 평온해 더 슬프다. 사람들은 봉투만 전달하고 돌아갔고 아버지는 점심이나 먹자며 소년의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옷장을 열어 하얀 목면 양복을 입히고는 말없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겼다. 결국에 밥은 먹지도 못했다. 급히 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소년도 아버지에게 봉투에 대해 묻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강제징용이었다. 황해도 곡산에서 콩밭을 매던 소년은 그렇게 일본 규슈의 탄광에 끌려갔다....

    2019.08.11 20:35

  • [고병권의 묵묵]문제는 등급이 아닌 장애인별 맞춤 서비스다
    문제는 등급이 아닌 장애인별 맞춤 서비스다

    7월1일, 서초동에서 잠수교를 거쳐 서울역까지 행진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풍선이 들려 있었다. 몇 사람이나 알아보았을까. 그것은 개선 행렬이었다. 지난 30여년의 싸움을 이겨낸 사람들. 1988년 11월부터 실시된 장애등급제가 마침내 폐지되었다. 이날 한 운동가는 한국 장애인 운동의 역사는 7월1일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다. 7월1일은 그만큼 중요한 날이다. 하지만 그날의 행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애인을 보지는 못했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무려 1842일의 농성도 불사했던 사람들인데 어깨를 들썩이기는커녕 토닥이는 말들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가 조금은 해낸 거야.’ 행진은 저녁 무렵 끝났다. 서울역 광장에서 몇몇은 승리를 자축하겠다며 소리를 질렀고 몇몇은 악대를 따라다니며 어설프게나마 춤을 추었다. 그러나 곧이어 모두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날 밤 사회보장위원회 건물 앞에서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요구하는 1박2일의 노숙 농성에 들어갈 참이었다. 경찰이...

    2019.07.14 20:36

  • [고병권의 묵묵]구차한 고통의 언어
    구차한 고통의 언어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이 말에는 우리가 앓는 두 겹의 고통이 들어 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상처로 인한 생리적 고통만이 아니라 그런 상처를 가졌다는 사실로 인한 해석적 고통도 앓는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의 고통과는 다른 고통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끼고, 장애인은 손상된 몸이 주는 고통 이상의 고통을 사람들의 편견에서 느낀다. 몸의 멍에 더해 마음의 멍이 생기는 것이다. 흔히 고통은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치통처럼 간단한 것조차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앓던 치통을 떠올려볼 뿐이다. 그래도 생리적 고통은 해석적 고통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해석적 고통의 경우, 특히 그 고통이 자신이 사회적 척도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생겨난 경우, 고통의 호소는 부적합한 존재로서 자신을 확증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 고통스럽다. 상대방은 내 호소를 내가 비정상적이고 뭔가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받아...

    2019.06.16 20:46

  • [고병권의 묵묵]용서를 구하며
    용서를 구하며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는가. 전두환 일당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내게 떠올랐던 물음이다. ‘5·18 민중항쟁’에 대한 망언이 넘쳐나던 올해는 특히 그랬다.모두가 아는 것처럼 전두환은 군사반란과 내란,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뉘우친 적이 없다. 범죄에 대한 사법적 추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일련의 과정을 ‘근거 없는 술책’이라며 비난했다. 2년 전 펴낸 회고록에도 속죄는 없었다. 진실에 대한 개인적 고백인 회고록을 그는 속죄보다는 자기정당화에 활용했다. 오히려 고해성사하듯 헬기 사격의 진실을 증언했던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이 그를 가리켜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속죄는 고사하고 피해자를 모욕하며 호의호식하는 학살자. 그러나 그는 법적으로는 용서받은 자이다. 대법원 판결 8개월 만에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 내란, 살인 등의 무시무시...

    2019.05.19 20:45

  • [고병권의 묵묵]죽음의 설교자들
    죽음의 설교자들

    지난 3월28일 법원은 병원에서 잠든 아들의 목을 졸라 죽인 어머니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사건 내용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에게 고작 집행유예형이라니. 그런데 그 아들이 중증장애인이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피살자에서 살인자에게로 옮겨간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실제로 사건 내막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짐작하는 ‘오죽했으면’이 맞다. 죽은 아들은 41세였는데 세 살 때 자폐 판정을 받았다. 초보적인 수준의 언어소통만 가능했으며 나이 들어서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20세가 넘어서는 증세가 심해져서 병원 치료를 받았는데, 매번 소란을 일으켜 입원 연장이 거부되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날’도 아들이 소리를 질러대고 주먹으로 벽을 두드려서 진정제를 투약했다고 한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는 아들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없고 자신에게 더 이상 돌볼 기력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

    2019.04.2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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