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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고병권의 묵묵
  • [고병권의 묵묵]이 겨울의 방어태세
    이 겨울의 방어태세

    이 겨울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이렇게 말이 없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라가 조용하다는 건 아니다. 사실은 아주 소란스럽다. 상대 정파의 지지율을 1%라도 낮추기 위해 혹은 자기 콘텐츠의 구독자 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글을 써대고 영상을 제작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좋아요’와 ‘싫어요’를 원하는 한가한 말들뿐이다. 내가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은 생존 위기에 처한 ‘우리들’의 말이다. 도대체 이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한탄이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말을 나눌 사람도, 기회도 없다. 이 겨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당국으로부터 지침은 받고 있다. 매일 신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통보받고, 거리 두기 단계가 어떻게 조정되었는지를 통보받는다. 가게 영업시간을 통보받고, 몇 명이 모일 수 있는지를 통보받고, 우리들의 품행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통보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포고령이지 말이 아니다....

    2020.12.07 03:00

  • [고병권의 묵묵]상원의원과 전역하사
    상원의원과 전역하사

    2012년 미국 아메리칸 대학의 한 학생이 학생회장 임기를 마치며 신문에 ‘진짜 나(The Real Me)’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고백했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안의 여성을 억누른 채 남성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사소한 일이든 짜릿한 일이든 나는 내가 해낸 일을 여성인 내가 행하는 모습으로 다시 상상함으로써만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내 삶은 그런 식으로 내 곁을 지나쳐 갔고,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로서 삶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가 벽장문을 열고 나올 용기를 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도전하지 않는다면 내 꿈과 정체성은 서로 배타적인 채로 남고 말 겁니다.” 꿈을 선택하면 정체성을 감춰야 하고 정체성을 선택하면 꿈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 자신이 아닌 채로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을 청년은 견딜 수 없어 했다.꿈을 위해 ...

    2020.11.09 03:00

  • [고병권의 묵묵]두 번째 사람 홍은전
    두 번째 사람 홍은전

    세상에는 두 번째 사람이 있다. 심보선 시인은 바로 시인이 그렇다고 했다. 시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면서 쓰는” 거라고. 첫 번째 자리는 슬픔의 자리이지 글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슬픔에 관한 첫 번째 글은 두 번째 자리에서 나온다. 그런데 어찌 시인만이겠는가. 세상에는 시인 말고도 두 번째 사람들이 있다. 내가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 홍은전 작가도 두 번째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세상에서 제일 많이 비어 있는 자리다. 첫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하고,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한데 두 번째 자리는 그렇지 않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슬퍼했다거나 분노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듣고 시뻘게진 눈알을 본다. 무엇보다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다. 그걸 알기에 나는 세 번째에 서고, 겁이 날 때는 ...

    2020.10.12 03:00

  • [고병권의 묵묵]변호사에게 먼저 건 전화
    변호사에게 먼저 건 전화

    지난주 인천 을왕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가해자들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음주운전도 문제였지만 사고 직후 보인 태도가 더 큰 분노를 자아냈다. 영상을 보면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내버려둔 채 차량 안에 머물렀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서야 바깥에 나왔는데 이때 변호사와 통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구급차를 부른 것은 이들이 아니었다. 사건의 진상은 조사가 끝나야 알 수 있겠지만, 가해자가 119가 아닌 변호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다. 내게는 이 행동이 하나의 징후처럼 보인다. 가해자들이 차량에서 바로 나오지 못한 것은 사고를 낸 충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 맨 먼저 떠올린 생각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가 아니라 ‘형량을 줄여야 한다’였다는 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내가 이 일을 우리 사회의 징후로 간주하는 것은 가해자들이 죽어가는 피해자를 내버려둔 채 자기방어적 행동에 몰두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변호사의 존재...

    2020.09.14 03:00

  • [고병권의 묵묵] ‘약자의 눈’
    ‘약자의 눈’

    그가 시설에 남은 건어쩌면 시설 밖 세상을 알고,장애인 인권을 알고 난 뒤에더 강해졌기 때문이다부디 그의 ‘눈’으로 정치하길지난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확대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는데 주관 단체 이름이 눈에 띄었다. ‘약자의 눈’. 의원들이 만든 연구단체인데 지난달 20일 출범했다고 하니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소개 리플릿에는 노인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행복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당찬 포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겉면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치는 ‘약자의 눈’을 통해 ‘미래의 눈’이 되는 것입니다.” 단체 소개 문장을 내가 이렇게 뚫어져라 본 적이 있던가.약자의 눈. 이 말을 몇 번인가 되뇌었더니 한 사람이 떠오른다. 이종강 선생. 가톨릭사회복지회가 운영하는 장애인시설에서 지내는 최중증장애인이다(그의 이야기는 <나, 함께 산다>(오월의 봄)에 실려 있다). 열아홉의 나이...

    2020.08.17 03:00

  • [고병권의 묵묵]말과 폭탄 사이에서
    말과 폭탄 사이에서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말은 말일 뿐이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엔 말뿐인 사람들만 넘쳐나고, 아무리 소리쳐도 말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8월 개봉 예정)을 보고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1975년 기업들에 폭탄테러를 가한 일본의 무장 운동 단체다.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던 미쓰비시중공업에서만 8명이 죽고 300명이 다쳤다. 언론은 이들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생각 없는 폭탄 마니아’라고도 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이후 일본 사회에서 누구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이들의 테러에는 현재의 상황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이들의 테러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미쓰비시는 전쟁 중에 조선 인민을 강제연...

    2020.07.20 03:00

  • [고병권의 묵묵]정말로 ‘노동의 권리’가 이런 거라면
    정말로 ‘노동의 권리’가 이런 거라면

    헌법은 사회가 지향하는 기본 이념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전혀 공감이 안 되는 조항들이 있다. 헌법 32조의 1항과 2항. 이 조항들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지며 또한 근로의 의무를 지고 있다. 과연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상황을 권리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을 모든 국민이 의무로 져야 하는가.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많은 사람들의 유일한 생존책이고, 이 조항들 없이는 국가를 향해 고용과 임금에 관한 대책을 요구할 근거가 없어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역사 문헌들을 읽다가 ‘노동의 권리’라는 말을 헌법에 담고자 했던 투쟁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의의가 있음을 알게 됐다. 1848년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르주아들과 협력해서 왕정을 타도한 파리의 노동자들은 정부를 향해 국민작업장의 설립을 요구했다. 예전에 나는 이것을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대책으로만 읽었다. 그...

    2020.06.22 03:00

  • [고병권의 묵묵]동물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
    동물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

    발가벗은 내 모습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던 고양이. 자크 데리다는 <그러므로 나인 동물(L’Animal que donc je suis)>에서 벗은 몸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고양이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보통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즉 그 시선의 주체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일 때 이런 감정을 느낀다. 타인은 그 출현만으로도 내 세계를 흔든다. 새나 고양이가 나타난 것과는 다르다. 내가 어떤 못난 행동, 이를테면 열쇠구멍으로 누군가의 방을 훔쳐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때 나는 메두사의 눈이라도 본 것처럼 돌덩어리가 될 것이다. 남의 방이나 엿보는 놈으로 비친 것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사실은 작은 소리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깜짝 놀라 문에서 눈을 떼고는 그런 내 모습에 부끄러워할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한 이야기다.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한 이 ...

    2020.05.25 03:00

  • [고병권의 묵묵]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 혼자여선 안돼
    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 혼자여선 안돼

    며칠 전 미국의 한 연구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코로나 시대 시민들의 상호부조와 연대에 대한 책을 함께 쓰고 싶다고 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돕고 있는지,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를 모두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발코니에 나와 노래하고 연주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사회심리학적 백신 개발의 시급성에 대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다른 존재에 대해 형성하는 어떤 표상들은 코로나19 이상으로 전파력도 크고 치명적이다. 인간은 공포를 느낄 때 심리적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다. 이런 때 사람들은 평소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쏟아내고 터무니없는 폭력을 공공...

    2020.04.26 20:52

  • [고병권의 묵묵]다시 최옥란을 기억하며
    다시 최옥란을 기억하며

    봄마다 장애인들은 ‘420공동투쟁단’이라는 걸 꾸린다. ‘장애인의날’인 4월20일에 맞춰 장애인 차별의 현실을 고발하고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투쟁단은 매년 3월26일 출범해서 4월20일까지 활동한다. 올해도 3월26일, 지난주 목요일에 출범식을 가졌다. 코로나19 때문에 간격을 유지한 채 간소하게 진행되었지만 날짜가 바뀌지는 않았다. 도대체 3월26일이 무슨 날이기에 그럴까. 이날은 장애해방열사 최옥란의 기일이다. 생전에 나는 그를 TV에서 보았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었던 그가 12월의 칼바람을 맞으며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하는 사정을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다.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 이것이 그가 내건 요구였다.사정은 이랬다.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면서 경제력이 없는 국민들에게 최저생계비가 지급되었다.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하던 최옥란도 28만원 남짓의 생계비를 받았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이 돈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

    2020.03.2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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