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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고병권의 묵묵
  • [고병권의 묵묵]죽음의 설교자들
    죽음의 설교자들

    지난 3월28일 법원은 병원에서 잠든 아들의 목을 졸라 죽인 어머니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사건 내용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에게 고작 집행유예형이라니. 그런데 그 아들이 중증장애인이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피살자에서 살인자에게로 옮겨간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실제로 사건 내막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짐작하는 ‘오죽했으면’이 맞다. 죽은 아들은 41세였는데 세 살 때 자폐 판정을 받았다. 초보적인 수준의 언어소통만 가능했으며 나이 들어서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20세가 넘어서는 증세가 심해져서 병원 치료를 받았는데, 매번 소란을 일으켜 입원 연장이 거부되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날’도 아들이 소리를 질러대고 주먹으로 벽을 두드려서 진정제를 투약했다고 한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는 아들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없고 자신에게 더 이상 돌볼 기력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

    2019.04.21 20:45

  • [고병권의 묵묵]이주민을 추모하는 토착민의 춤
    이주민을 추모하는 토착민의 춤

    지난 15일 호주 출신의 한 백인 남성이 뉴질랜드의 이슬람 사원에 총격을 가해 50명을 살해하고 그 장면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중계했다. 말 그대로 ‘테러 라이브’였다. 사냥을 하듯 혹은 게임을 하듯 그는 사람들을 죽였다. 무려 74쪽 이르는 선언문도 내보냈다. 선언문에서 그는 무고한 아이들까지 죽이는 이유도 적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백인 아이들의 자리를 다 차지할 테니 후손들을 위해 미래의 적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행동이나 말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변호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고 심지어 ‘상당히 명쾌해’ 보인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이 변호인조차 필요 없다며 해임시켰다. 법정에서 직접 신념을 설파할 모양이다.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당연히 이 연설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것이다. 총리는 테러범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겠다고 했다.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같은 행동은 드물지만 신념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2019.03.24 20:48

  • [고병권의 묵묵]함석헌이 겪은 3·1운동
    함석헌이 겪은 3·1운동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이다. 솔직히 내가 3·1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국사책과 참고서에서 보았던 정보 이상은 아니어서 아무리 늘려 잡아도 몇 쪽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험대비용 연표 속에 넣어 외운 것들이라 납골당 유골처럼 가지런히 죽어 있다. 내게는 1894년의 청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경술국치 하는 식으로 1919년의 3·1운동인 것이다. 인물들도 그렇다. 아이들이 단어장처럼 외워 부르는 ‘역사는 흐른다’의 노랫말처럼 “삼십삼인 손병희, 만세만세 류관순”일 뿐이다. 이런 내게 3·1운동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인상을 심어준 글이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읽은 함석헌의 글 ‘고난의 의미’다. 글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녹취해 정리한 것이다. “제가 지내봤던 삼일절 얘기나 조금 하겠습니다.” 글머리에서 깜짝 놀랐다. ‘제가 지내봤던’이라는 말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겪은 3·1운동’을 들어본 적이 없다.“저는 삼...

    2019.02.24 20:51

  • [고병권의 묵묵]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정확히 십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건의 이름표다. 용산참사. 이 네 글자를 보거나 들으면 내게는 자동으로 한 남자가 떠오른다. 그는 불타는 망루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펄쩍펄쩍 뛰었고 다시 난간을 손바닥으로 치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주저앉았다. 이제껏 나는 그렇게 슬픈 몸짓을 본 적이 없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을 본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시민도 아니고, 식당 주인도 아니고, 철거민도 아니고, 시위대도 아닌, 맨손, 맨얼굴 같은 ‘맨사람’ 말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사람에게는 ‘사람’이라는 원초적 사실 하나만 남는다. 아무런 울타리나 보호막이 없을 때, 소위 인권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은 맨사람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망루에서 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사실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은 불이 나기 전부터 거의 맨사람이었다. 이들은 서울에 뉴타운 광풍이 몰아치고...

    2019.01.20 20:29

  • [고병권의 묵묵]보이지 않게 일하다 사라져버린 사람
    보이지 않게 일하다 사라져버린 사람

    “시골 저택에 사는 부인에게 ‘함께 사는 분이 없어요?’라고 물어본다고 가정하세. 질문을 받은 부인은 ‘하인 한 명, 마부 세 명, 하녀 한 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을 걸세. 비록 하녀가 방 안에 있고 하인이 바로 뒤에 있다 해도 말이야. 그 부인은 아마 이렇게 답하겠지. ‘네, 함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도 없다’가 이 사건에서의 ‘아무도 없다’일세. 하지만 어떤 의사가 전염병을 조사하면서 ‘함께 지내는 분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부인은 하녀와 하인,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낼 걸세.” 길버트 체스터턴의 추리소설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브라운 신부가 한 말이다. 범인이 예고한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입구를 감시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범인은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우편배달부였다. 체스터턴은 무언가를 숨...

    2018.12.23 20:32

  • [고병권의 묵묵]열두 친구 이야기
    열두 친구 이야기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부하는 내게는 열두 친구가 있다. 1월의 명학은 며칠 전 노들에서 환갑잔치를 열었다. 학교에는 가 본 적 없지만 올해로 25년이 된 노들을 25년간 다녔다. 노들과 연을 맺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챙겨간 것은 한 조각의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온전한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노들의 깃발도 언제나 그의 품으로만 파고든다. 지금도 사람들은 거리에서 노들을 찾을 때마다 깃발의 둥지인 그를 찾는다. 노들에서 공부해서 좋고, 밥 먹어서 좋고, 투쟁해서 좋다는 이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김명학, 노들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2월의 경남은 지적장애인이다. 복도 벽을 타고 오는 노랫소리가 언제나 그녀보다 조금 일찍 등교한다. 행사 때 음악이 나오면 그녀는 친구를 맞이하듯 뛰쳐나가 춤을 춘다. 노들에서 글자를 하나씩 익히고 있다. “야학 오기 전에 이름은 썼어요. 근데 글자들은 너무 많아요. 배워도 배워도 새로운 글자가 계속 나와요. 아는 글자는 반가운...

    2018.11.25 20:39

  • [고병권의 묵묵]미누, 부디 안녕히
    미누, 부디 안녕히

    “왜 아프고 그래요. 빨리 나으세요.” 통증과 피로를 느끼며 벽에 기대 쉬던 나를 일으켜 세운 목소리. 2009년에 헤어진 친구 미누였다. 20년 만에 병원 신세를 지고 있던 날이 하필이면 10년 만에 친구가 찾아온 날이라니. 반가움에 말들이 순서를 무시하고 튀어나갔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이젠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그는 조금 들뜬 소리로 답해주었다. DMZ 영화제에 초대받아 짧게 들어왔다고. 이번에 들어왔으니 또 올 수 있을 거라고. 잘 지내고 있다고. 어서 빨리 나으라고. 곧 보자고. 그러고는 수화기 너머로 사라졌다. 미누는 1992년에 한국에 왔다.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정책과 제도가 전무했던 시절이다. 그는 이주노동자의 첫 세대였다. 스무 살에 와서 18년을 살았다. 네팔에서 보낸 유년기와 한국에서 보낸 성년기가 같았다.미누는 요즘 방송하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외국인이 아니다. 3박4일 동안 한국의 음식과...

    2018.10.28 20:23

  • [고병권의 묵묵]불법 체류자가 남긴 장기
    불법 체류자가 남긴 장기

    이것은 어떤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그러나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원통하고 미안하고 서글픈 이야기. 주인공은 미얀마에서 온 청년 싼 소티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가족을 부양해왔고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앞둔 듬직한 청년이었다. 며칠 전 그가 죽었다. 그를 살해한 사람은 없었다. 병사나 자살도 아니었고, 우연한 사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음에 어떤 미스터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현장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고 그 순간을 비디오로 찍은 사람도 있었다. 사실의 차원에서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백했다.당시 그는 오전 일을 마치고 공사장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있었다. 건장한 사람 몇몇이 끈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의 정체를 직감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뒤쪽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식당 창문을 뛰어넘는 순간 추적자의 손이 닿았다. 허공에서 균형이 무너진 그는 의도한 착지점을 벗어나 8m 아래 바닥으로 ...

    2018.09.30 20:41

  • [고병권의 묵묵]24시간 활동지원, 늦출 여유 없다
    24시간 활동지원, 늦출 여유 없다

    8월이 끝나간다. 용광로 같은 낮과 한증막 같은 밤이 교차하던 날들이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온열질환자가 4000명이 넘었고 사망자도 48명에 이르렀으니 가히 재난이었다. 그런데 이 4000명과 48명 사이, 그 생사의 문턱에 우리 야학의 학생 한 분이 누워있었다. 최중증 뇌병변 장애인 김선심씨. 서울의 대낮 온도가 40도를 육박하던 날, 그녀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으로 발견됐다. 아침에 그녀를 발견한 활동지원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야학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체온이 39도였는데, 의사가 이대로 두면 죽는다고 했다고. 열사병이었다.에어컨은 없었고 선풍기는 틀지 않았다. 아니,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은 활동지원사 없이 혼자 지내야 하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퇴근하는 활동지원사에게 콘센트를 확인해달라고 했다. 누전사고가 날 수 있으니 선풍기를 꼭 꺼달라고. “불나면 나만 죽는 게 아냐. 이 아파트가 다 죽어.” ...

    2018.08.26 21:04

  • [고병권의 묵묵]‘생각 많은 둘째 언니’의 일깨움
    ‘생각 많은 둘째 언니’의 일깨움

    내 안에 10년째 답변을 기다리는 물음이 있다. 울산의 한 고등학생이 던진 것인데 그 학생의 떨리는 음색까지 그대로 마음에 남아있다. 2008년 겨울밤이었다. 강연주제는 ‘현장과 인문학’이었고 청중은 대부분 교사들이었다. 그날 원고의 제목은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였다. 당시 교도소에서의 인문학 강연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던 글이다. 강연장에는 선생님과 함께 온 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내게 질문을 던진 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나는 인문학과 가난한 사람들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실제로 인문학 공부의 현장에서 나는 여러 긍정적인 신호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나만이 아니었다. 울산 강연 전날 서울에서 현장인문학 워크숍이 열렸는데 흡사 인문학의 효험에 대한 간증대회 같았다. 워크숍에 참여한 여러 활동가들의 입에서 빵보다 장미, 돈보다 인문학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울산 강연에서도 나는 전도사처럼 현장인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

    2018.07.2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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