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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 [고병권의 묵묵]그들을 포기하는 건 우리를 포기하는 것
    그들을 포기하는 건 우리를 포기하는 것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핍박받는 이방인을 돕는 걸 자랑스러워했던 아테네인들도 오이디푸스가 변방의 마을 콜로노스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당장 이 나라를 떠나시오. 그대가 우리 도시에 큰 짐을 지우기 전에 말이오.” 오이디푸스에 대한 끔찍한 소문을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테네인들은 재앙에 대해 오이디푸스한테 직접 들은 후에는 그를 받아들였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다가가기를 주저하면서도 그를 보호할 용기를 낸 지도자 테세우스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 또한 한때 ‘이방인’이었으며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한낱 ‘인간’이라고 했다. 이방인을 환대한 주인은 어제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며, 내일 다시 이방인일 수 있음을 인식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개인사처럼 고백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다. 모든 주인은 한때 손님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정적으로 이방인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방인을 배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

    2018.07.01 20:42

  • [고병권의 묵묵]돈 되는 일자리와 의미있는 일자리
    돈 되는 일자리와 의미있는 일자리

    한국사회에서 요즘처럼 일자리를 갈구한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의 생존이 노동력의 판매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4차 산업혁명’이 구원자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인공지능은 천재 바둑기사의 재능조차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던가. 집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데 직장에서 보면 너무나 두렵다. 어떻든 지금은 모두가 일자리를 외치는 중이다. ‘일중독’이라는 말조차 사치로 들릴 정도로 일자리가 절박하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파산에 직면했던 한국지엠에 8000억원을 투입하면서 이를 ‘남는 장사’라고 했다. 수익을 올려서가 아니라 일자리를 지켰다는 뜻에서다. 이제는 기업가가 ‘파산’이라는 말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협상의 무기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업이 일자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기업을 보장하는 꼴이다.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우리...

    2018.06.03 21:25

  • [고병권의 묵묵]카를 마르크스, 그 사상의 거처
    카를 마르크스, 그 사상의 거처

    카를 마르크스. 그가 세상에 온 지 200년이 되었다. 한 사상가가 세상에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이 오는 것이고, 그 눈으로 본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다짐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상은 사상가와 더불어 오지만 사상가와 더불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사상가는 한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지만 그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눈이 있고, 부끄러움이 있고, 다짐이 있는 한에서 말이다. 그처럼 많은 적과 동지를 가진 사상가가 또 있을까.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이 땅에서도 그랬다. 지금은 납골당 같은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고 이따금씩 교양인을 위한 추천 도서로 얼굴을 내밀지만, 얼마 전까지 그의 책은 집에 모셔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었다. 그를 읽는다는 게 지성과 열의만이 아니라 용기를 필요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젊은 날의 우리는 그를 많이 읽지 않고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공부하지 않은 채 지지자가 ...

    2018.05.06 20:42

  • [고병권의 묵묵]어느 탈시설 장애인의 ‘해방의 경제학’
    어느 탈시설 장애인의 ‘해방의 경제학’

    “바구니에/ 야채를 넣고/ 과일을 넣고/ 이만원/ 계산대에 가보니/ 오만원/ 과일 빼고/ 야채 빼고/ 참치는 놔두고/ 밥은 먹어야지/ 참치 고추장 참기름은/ 떨어지면 안 돼.” 민들레 장애인야학의 신경수씨가 쓴 시 ‘꼭 사야 할 것’이다. 그는 세 살 때 파출소에 맡겨진 뒤 서른이 다 돼서야 탈시설 자립생활을 시작한 중증장애인이다. 출간 예정인 탈시설 장애인들의 인터뷰집에서 그의 인터뷰와 시 몇 편을 읽었는데, 방금 인용한 시도 여기서 본 것이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그의 경제학이다. 계획된 예산을 넘자 그는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빼놓는다. 그런데 과일과 야채를 빼내면서도 끝까지 사수하는 재료가 참치와 고추장, 참기름이다. 그는 밥에 참치,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장애인 수급비가 소득의 전부인 그로서는 지출계획을 신중히 짜야 한다. 특히 식자재는 지출항목 중 비중이 큰 것이어서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데 식자재 ...

    2018.04.08 20:38

  • [고병권의 묵묵]나의 고통을 일깨워준 그의 고통
    나의 고통을 일깨워준 그의 고통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은 그것을 말할 때 통증을 느낀다. 기억이란 게 정신에만 저장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이 과거를 불러오는 것처럼 몸도 과거를 불러온다. 그리고 정신이 그때를 증언할 때 몸도 그때처럼 아파온다.유력한 대권 후보인 안희정의 성폭행을 고발한 여성의 얼굴이 그랬다. 그는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막겠다며 대단한 용기를 낸 사람이다. 하지만 TV에 비친 그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고 곧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한마디씩 이어가는 증언이 마른 수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왜 곧바로 고발하지 않았는가. 왜 오랜 시간 그대로 있었는가. 그런 악의적 질문들이 성립할 수 없음을 몸이 보여주었다. 입이 말하는 것과 별개로 몸도 그때의 일을 말했다. 그가 어떤 상태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이다. 몸에 서리가 내린 듯 그는 얼어붙었음에 틀림없다. 증언할 때처럼 창백하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핏기 없이 있었을 것이다. 왜...

    2018.03.11 20:54

  • [고병권의 묵묵]생명 쓰레기
    생명 쓰레기

    한 달 전쯤 동네 사는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다. 동네 외곽에 작고 낡은 교회가 있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방치된 채 학대받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사정은 더 끔찍했다. 거기 개집은 피자배달통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이었는데 전혀 청소를 하지 않아 분변이 가득했다고 한다. 목줄이 짧아 강아지는 별수 없이 그 분변에 파묻혀 지냈다. 게다가 줄이 조금만 꼬이면 추운 겨울밤을 바깥에서 보내야 했고. 너무 안쓰러웠던 친구는 먹을 것과 핫팩을 넣어주었고, 동사무소를 통해 주인에게 보살핌을 부탁하는 말도 전했다. 친구는 한국의 법도 모르고 한국말에도 부담을 느낀 외국인이었지만 어떻게든 강아지를 살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울먹이며 말했다. 강아지가 죽었다고. 강아지가 보이지 않아 개집에 손을 넣었는데 싸늘한 시신이 있었다고.그는 내게 교회에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했다. 시신이라도 받아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고. 그런데 교회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고 여러모로 외국인 여...

    2018.02.11 21:10

  • [고병권의 묵묵]‘내일’을 빼앗긴 그들의 4000일
    ‘내일’을 빼앗긴 그들의 4000일

    3999일. 어떤 날을 거기까지 세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강 한파가 덮친 지난 금요일, 세종로공원 한편에 세워진 작은 텐트를 찾았다. 기타 생산업체인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이다. 4000일, 예정된 특별한 행사는 없다고 했다. “해탈한 것 같아요. 4000일이라고 뭔가 요란스레 할 것도 없고.” 그리고는 언제부턴가 시작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의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했다.나오는 길에 책 한 권을 받았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임재춘씨의 농성일기를 묶어 펴낸 것이다. 집에 돌아와 한쪽한쪽, 그러니까 이들의 하루하루를 읽어가며, 나는 억울했던 날, 희망찼던 날, 정의를 울부짖던 날을 보았다. 그러다 책 제목을 다시 보고 알았다. 3999일이라는 긴 시간에도 가질 수 없었던 날이 있었음을. 하루를 이어 붙여 4000일을 만들어도 이를 수 없는 날이 있었음을. 그건 바로 ‘내일’이다. 해고된 날 사장이 빼앗아간 ‘내일’ 말이다....

    2018.01.14 21:03

  • [고병권의 묵묵]후원자의 무례
    후원자의 무례

    동정하는 자가 동정받는 자의 무례에 분노할 때가 있다. 기껏 마음을 내어 돈과 선물을 보냈더니 그걸 받는 쪽에서 기쁜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하자. 돈이랑 선물은 매번 챙겨가면서도 감사의 표시가 없다면, 주는 쪽에서는 꽤나 서운할 것이고 그 서운함은 언젠가 분노로 돌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매년 이맘때쯤 많은 시설들에서는 후원자들의 방문일에 맞춰 대청소를 하고 며칠간 공연을 준비하고, 후원자들을 향해 활짝 웃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편지도 쓴다. 그것은 후원자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가질지도 모를 서운함과 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그런데 배은망덕한 이들에 대한 자선가의 분노에는 따져볼 것이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자선가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서도 왜 분노하는가. 그가 원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보상이었던가.철학자 니체는 선행을 통해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자들의 책략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2017.12.17 21:07

  • [고병권의 묵묵]계몽을 거부하는 낡은 볼테르들
    계몽을 거부하는 낡은 볼테르들

    한국도 지진으로 흔들리는 나라가 되었다. 건물 외벽이 쏟아져내렸고 아파트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포항의 많은 사람들이 기울어진 아파트의 각도만큼이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조금만 더 흔들렸다면, 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이제 집도 학교도 다시 지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르게 지어야 한다. 한 번 일어난 것은 두 번 일어나고, 작게 일어난 것은 크게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금이 간 마음을 치유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 것이다. 이제 마음도 집을 잃어버렸다. 마음을 다시 지을 수 있을까. 건물은 지진을 반영해서 달리 설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골조를 달리 세울 수 있을까.거대한 재앙은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리스본 대지진이다. 1755년 11월에 큰 지진이 리스본을 강타했다.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고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덮쳤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죽었고 ...

    2017.11.19 13:22

  • [고병권의 묵묵]말할 수 없는 존재란 없다
    말할 수 없는 존재란 없다

    말하는 침팬지 부이(Booee). 그는 1967년에 태어났다. 부이의 엄마는 미국 국립보건원의 실험용 침팬지였다. 거기서 태어난 부이는 잦은 발작 때문에 뇌절제술을 받았다. 예후가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를 가엾게 여긴 의사 한 사람이 몰래 데리고 나와 집에서 3년을 돌보았다. 그러고는 오클라호마에 있는 영장류 연구소로 보냈다. 부이는 거기서 젊은 연구자 로저 파우츠를 만났다. 파우츠는 영장류의 언어습득에 대해 연구하던 중이었다. 부이는 파우츠에게 수화를 배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파우츠는 논문을 쓴 후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연구소는 부이를 뉴욕의 영장류 연구소에 팔아넘겼다. 그런데 이 연구소는 의약품을 개발하는 곳이었다. 부이는 여기서 약물 실험 대상으로 13년을 보냈다. 이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던 방송사에서 파우츠에게 연락을 해왔다. 혹시 부이를 만날 생각이 있느냐고. 처음에 파우츠는 미안함과 두려움 ...

    2017.10.2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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