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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라면 전두광을 어떻게 했을까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2차대전 당시 미군 특수부대를 다룬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시나리오를 쓰면서 ‘히틀러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옛날 영화를 재탕하고 싶진 않았어요. 영화가 그러면 실망스럽잖아요. (암살 위기의) 히틀러를 뒤로 빼내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할까. 새벽 4시쯤에 시나리오를 쓰다가 결심했어요. ‘그냥 죽이자.’ 그래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렇게 썼어요. ‘X발 그냥 죽여.’ ”(2019년 5월 <지미 키멜 라이브>)역사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인 1945년 4월30일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전한다. 오랜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한 직후였다.2차대전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따른다. 전투의 세부묘사를 부풀리고 등장인물을 가공하기는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바꾸거나 히틀러의 죽음 정황을 각색하는 일은 거의 없다... -
‘블루 자이언트’의 청년과 세 어른
개봉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는 ‘재즈 영화’다. 재즈를 소재로 했던 실사영화 <위플래쉬>나 <라라랜드>보다도 훨씬 재즈에 충실하다. 상영시간 120분 중 4분의 1 정도가 극중 밴드 재스(JASS)의 라이브 연주 장면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연주는 인간 배우 이상으로 박력 넘친다. 보컬리스트의 가사 없이 색소폰, 피아노, 드럼 연주만으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재즈 영화지만 재즈 음악만으로 성립될 수는 없다. <블루 자이언트>의 주인공은 갓 고교를 졸업한 후 색소폰을 들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 다이, 작곡하고 피아노 치는 유키노리, 다이의 고교 시절 친구로 재즈의 매력에 빠져 뒤늦게 드럼을 배우는 슌지, 세 명의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특정 분야에 빠져 모든 것을 바치는 청춘의 성장기는 일본 만화의 특기 중 하나다.세 친구는 재즈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 ‘세계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가 되겠다며 밤마다 강... -
일론 머스크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기행(奇行)은 차고 넘친다. ‘모성 충동’이 강한 비혼의 여성 임원에게 자신의 정자를 기증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더 많은 아이를 가져야 하기에, 자신의 정자를 활용하라는 이유였다. 이 여성 임원이 임신 말기 입원했던 병원에는 그의 아이를 품은 또 다른 여성이 머물렀다. 그와 아내가 시험관으로 수정한 여자아이를 가진 대리모였다. 비디오 스트리밍 팟캐스트에 출연해 진행자가 권하는 대마초를 피운 다음날 그의 회사 주가는 연중 최저치로 떨어졌다. 동굴에 갇힌 태국 소년들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준 탐험가를 두고는 별다른 증거 없이 ‘소아성애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몇몇 일들은 ‘세계 최고 부자의 기행’ 정도로 간주하기 어렵다. ‘언론 자유 수호’라는 명목으로 트위터를 인수한 뒤 혐오표현, 인종차별 등을 이유로 계정 정지된 유명 사용자들을 복귀시켰으나, 정작 자신을 비판한 기자들의 계정은 정지시켰다. 밤이든 주말이든 휴가기간이든 원하면 언제나 직원들을 호출해 일을 시킨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악의 스펙트럼
지은 지 40년 넘은 구축 아파트라 공간이 부족해 주차가 몹시 어렵다. 가급적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고, 피치 못하게 사용하더라도 주차하기 쉬운 시간에 맞춘다. 이사 나가는 집이 버리는 가구와 가전제품, 이사 들어오는 집이 가져오는 가전제품 상자를 통해 요즘 트렌드를 짐작한다. 초등학교가 단지 안에 있어 아이들의 성장 환경은 대부분 비슷하다. 길 하나로 마주 보는 신축 아파트와 신설될 도로 위치를 두고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이후 도로 신설 계획이 유야무야돼 다툼도 흐지부지됐다.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동양대 교수는 2011년 펴낸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1인칭 시점으로 “신중산층이 나를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내가 그들을 빚어냈다. 그들의 욕망은 내 피조물이었다”고 적었다. 1970~1980년대 정책 입안자들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에 따라 군사기지를 닮은 모양새”로 만든 아파트는 “대량 복제를 통한 특정한 주거 모델의 확... -
어느 모험가의 말년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레이더스>(1981)에 묘사된 인디아나 존스는 말이 고고학자지 사실상 도굴꾼이다.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지역의 성스럽고 유서 깊은 문화유적 안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가 보물을 들고나온다. 치부가 아니라 연구를 위함이고, 개인 소유가 아니라 박물관 기증이 목적이라 해도 존스의 행동이 무분별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상, 성궤 등 지역 고유의 전통, 신앙과 밀착했을 때 의미 있는 유물들을 별다른 문화적 맥락 없는 서구의 박물관으로 가져오는 행위는 독단적이고 무도하다. 이 과정에서 지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레이더스>에서 지역민은 대사 한 줄 받지 못한 채, 백인 도굴꾼들이 시키는 대로 땅을 파고 물건을 나른다. 때로 호전적으로 독화살을 쏘는 이도 있지만, 이 역시 독자적으로 살아 있는 캐릭터라기보다는 백인 정복자의 죄의식이나 공포가 만들어낸 허상처럼 보인다.... -
뤼미에르 형제와 마동석
“영화의 역사는 한 번의 ‘대폭발’(빅뱅)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영화학자 파올로 케르키 우사이는 말한다. 18세기 후반부터 정적인 이미지들을 광원 앞에 빠르게 통과시켜 이미지가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창조하는 실험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1891년 특허를 취득한 ‘키네토스코프’는 앞선 기술력을 보여줬다. 구멍 뚫린 창을 통해 한 번에 한 사람씩 권투, 스트립쇼 등을 볼 수 있게 한 장치였다. 에디슨은 1894년 미국 뉴욕에 각기 다른 영화를 보여주는 10대의 키네토스코프를 들였다.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이보다 늦은 1895년 12월을 영화의 탄생 시점으로 본다. 이때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상영한 짤막한 다큐멘터리들의 관객이 개인이 아닌 다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뤼미에르 형제가 상영한 50초 길이의 <기차의 도착>은 오늘날까지 ‘최초의 영화’로 불린다. 스크린 앞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란 관객이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
과학책을 읽으며
2010년대 중반 출판 담당 기자로 일했다. 매주 신문사에 도착하는 수많은 책들 중 토요일자 ‘책과 삶’ 지면에 들어갈 만한 책을 고르고 북리뷰를 작성했다. 책의 종류는 다양하다. 한국 종합일간지의 책 지면은 전통적으로 인문·사회 서적을 선호하지만, 매번 같은 분야의 책만 다룰 수는 없기에 경제학, 심리학, 과학 책도 종종 지면에 올렸다.그때 의식적으로 자주 눈길을 두었던 건 과학책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지혜가 현대에도 통용되는 인문학과 달리, 과학의 교양 수준은 10년이 멀다 하고 업그레이드돼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간 과학책을 읽다가 학창 시절 교과서로 배웠던 과학 지식은 이미 무용한 것으로 판명난 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도 많았다. <이기적 유전자>와 <코스모스>가 너무 오랫동안 양분했던 과학 스테디셀러 목록은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국내 출판계에서도 좋은 과학책이 잇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흐름은 ... -
영화로운 스필버그
스스로 진지하다고 생각하는 1980~90년대 영화팬들 사이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백안시되곤 했다. 마틴 스코세이지, 데이비드 린치 혹은 팀 버튼을 언급해야 미국 영화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 시절 스필버그는 상업적으로 뛰어나지만 깊이는 부족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처럼 인식됐다. 어린이나 청소년도 보기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피터팬 콤플렉스’와 연관해 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쥬라기 공원>의 흥행수입이 자동차 150만대 수출과 맞먹는다”는 식으로 영화의 산업적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영화팬들은 영화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이런 인식이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쥬라기 공원> 사이에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쉰들러 리스트>는 상업적인 감독이 자신도 진지한 감독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이례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스필버그에 대한 내 인식이 바뀐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
‘피지컬 : 100’과 고통의 기쁨
‘러너스 하이’란 말이 있다. 장거리 달리기를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도취감을 말한다. 팔과 다리가 가벼워지고 리듬감이 생겨 피로를 잊고 계속 달릴 수 있는 힘이 나온다고 한다. 수년째 달리기를 해왔지만 난 한 번도 러너스 하이를 경험한 적이 없다. 첫발을 뗀 순간부터 달리기를 멈출 때까지 줄곧 고통이다. 숨이 차오르고 발목과 무릎이 아프다. 조금 무리하게 달린 날이면 통증이 며칠간 이어지기도 한다. 이대로 무릎이 고장나는 거 아닐까 두려워하다가도 통증이 가라앉으면 다시 뛰었다. 비나 눈이 오면 원망스럽게 하늘을 바라봤다. 혹한이 이어진 이번 겨울에는 조금이라도 기온이 오르는 날만 기다렸다. 러너스 하이를 느낀 적도 없으면서, 매번 힘들어하면서 왜 달렸을까. 잘게 이어지는 내 발자국 소리가 좋았고, 1~2㎞쯤 달린 뒤 땀이 서서히 배어나는 순간이 좋았고, 마구 들이마시는 공기가 좋았고, 두 다리만으로 밟아냈던 길들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목표로 삼았던 거... -
AI와 피노키오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은 1883년 출간된 아동문학의 고전이다. 목수 제페토는 자신이 만든 말하는 목각 인형 피노키오에게 글자 공부 책을 사주기 위해 한 벌뿐인 외투를 팔 정도로 정성을 들이지만, 피노키오는 지지리도 말을 듣지 않는다. 꾀를 부리고 온갖 유혹에 빠지던 피노키오는 수차례 죽을 위기를 겪는다. 개과천선한 피노키오는 결국 바라던 대로 인간이 된다. 소설 결말부 제페토의 대사인 “못된 아이들이 착해지면, 그 아이들의 가정에도 새롭고 웃음 가득한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에서 느껴지듯, 상당히 교훈적이다. 현대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이 인기 있는 이야기를 ‘공부 안 하면 벌받는다’는 교훈담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A.I.>(2001)는 30편이 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연출작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인간이 되고 싶은 피노키오는 이 영화에서 사랑받기 위해 제작된 AI 데이비드의 모티브가 된다. 데이비드는 불치병에 걸려 치료제가 개발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