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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공포
2800년 전쯤 쓰인 고대 서사시 <일리아스>를 읽었을 때 놀란 점 중 하나는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과 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처참한 죽음 묘사였다. 예를 들어 <일리아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오른손으로 휘두르는 날카로운 창에서 광채가 번쩍였다. 아킬레우스는 가장 적당한 곳을 찾아 그의 고운 살갗을 살폈다. (…) 쇄골이 어깨에서 나와 목을 감싸고 있는 부분, 즉 목구멍만은 드러나 있었으니 그곳은 치명적인 급소다. 바로 그곳으로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덤벼들어 창을 밀어 넣자 그의 부드러운 목을 창끝이 곧장 뚫고 나갔다.”<일리아스> 속 숱한 죽음은 통계 숫자로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전사자 개개인에게 모두 처절한 죽음의 정황이 주어진다. “오른쪽 엉덩이를 치자, 창끝이 곧장 방광을 지나 치골 밑을 뚫고 나왔다” “한 사람은 청동 날이 달린 창으로 젖꼭지 위를 찔러 죽였고... -
기자와 소설가 사이
장강명을 처음 본 것은 2003년 겨울이었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그는 언론계 입사 선배였다. 이후 우리는 몇 차례 마주쳤다. 미소 지으며 안부를 묻고 곧 헤어지는 사이였다. 2011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표백>의 작가 이름이 장강명이라 했을 때, ‘그 장강명?’ 하는 생각이었다. 그가 소설 쓰기에 관심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신문기자는 취재 결과를 어떻게든 글로 표현해내는 직업이라, 많은 기자들이 소설 쓰기에 도전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직업 세계에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릴만큼 성공한 이는 매우 드물다. ‘기자 출신 소설가’ 김훈은 예외적 사례다. 장강명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면서도, 그가 계속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지 의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강명이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그는 다산의 작가가 됐다. 2015년에는 장편만 세 편을 펴냈다. 그중 많은 작품들이 여러 문학상을 받았고, 판매도 잘됐다.... -
“알아서 해”라고 했을 때…
흔한 마피아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을 상상해본다. 마피아들이 관리하는 지역에 새 식당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 식당 주인은 조직에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그는 마피아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자릿세를 뜯겨선 안된다고 주변 상인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조직에 이 식당 주인은 점점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결국 행동대장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는 보스에게 다가가 식당 주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다. 보스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알아서 해.” 행동대장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자리를 뜬다. 얼마 후 갑자기 자취를 감춘 식당 주인은 한 달쯤 뒤 인근의 강에서 시신으로 떠오른다. 다행히도 정의로운 검사가 식당 주인 사망 사건을 끈질기게 수사해 행동대장을 법정에 세운다. 검사는 행동대장이 독단적으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 뒤, 살인사건 배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보스까지 잡아들이려 한다. 보스의 변호인들은 무죄를 주장한다. 보스는 식당... -
마이클 잭슨 딜레마
지금 서구 대중음악팬들에게 가장 뜨거운 논쟁 대상이 된 사람은 마이클 잭슨이다. ‘팝의 황제’라는 별칭만으로 잭슨에 대한 수식은 충분하다. 잭슨 같은 스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세상을 뜬 지 10년 된 잭슨이 다시 소환된 것은 4시간짜리 다큐멘터리 <네버랜드를 떠나며(Leaving Neverland)> 때문이다.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 영화는 최근 미국과 영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며 시청자를 혼란과 충격에 빠트렸다. 영화는 웨이드 롭슨과 지미 세이프척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에 담는다. 10세 전후의 어린이였을 때 롭슨과 세이프척은 잭슨의 팬이었는데, 운좋게도 잭슨과 사적으로 친해질 기회를 가졌다. 두 어린이에게 잭슨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다. 아낌없이 귀한 선물을 주고, 자신의 네버랜드 저택에 초대하고, 어린이의 가족들에게도 큰 호의를 베풀었다. 그리고 롭슨과 세이프척은 잭슨이 어렸던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증언한다. 사... -
AI판사와 재판청탁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목포 문화재거리 투기’ 의혹에 휩싸였을 때,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사람은 같은 당의 서영교 의원일지도 모른다. 지난 15일 손 의원이 자신과 지인들의 명의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있는 다수 건물을 매입했다는 SBS 보도가 나오자, 손 의원은 곧바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자유한국당이 ‘손혜원 랜드’라 명명하며 공세를 펼치자, 손 의원은 사실이 아니라는 데 ‘목숨’과 ‘전 재산’과 ‘국회의원직’을 걸겠다고 대응했다. 급기야 손 의원은 탈당을 선언하면서 검찰 수사를 의뢰했고, 투기 의혹이 사실이면 의원직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서영교 의원의 ‘재판청탁’ 의혹 역시 손 의원의 ‘목포 문화재거리 투기’ 의혹과 같은 날 불거졌다.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추가 기소 내용이 밝혀지면서다. 사정당국은 서 의원이 2015년 5월 국회 파견 판사를 자신의 의원실로 불러 지인 아들 재판의... -
'로마', 극장에서 봐야할까
지난 13일 저녁 광화문 씨네큐브에 <로마>(감독 알폰소 쿠아론)를 보러 간 건 완전한 돈낭비였을지도 모른다. 내겐 넷플릭스 아이디가 있고, 몇 시간 후면 넷플릭스에서 <로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아이디가 없다 하더라도, 신규 가입하면 첫 한 달은 무료다.)유명 배우 하나 나오지 않는 1970년대 초반 멕시코 배경의 흑백영화였지만, 객석은 의외로 거의 찼다. 멕시코시티 한 상류층 가정의 가사도우미 클레오가 중심인물이다. 클레오는 의사인 가장 안토니오와 그의 아내 소피아, 아이 4명을 뒷바라지한다. 클레오의 무책임한 남자친구는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잠적하고,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 역시 외도로 가정을 떠난다. 임신한 클레오와 당황한 소피아는 안간힘을 내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낸다. 관객은 영화 시작과 함께 곧바로 클레오의 공간으로 깊숙이 초대된다. 3D 안경이나 VR 기어를 쓰지도 않았지만, 마치 클레오와 소피아와 아이 네 명... -
'무진기행'을 어떻게 읽을까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수십년 전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세밀하게 직조된 문장의 진의를 알기 위해 여러 차례 다시 읽었던 것 같고, 우울과 허무에 가득 찬 젊은 시절의 바닷가 자취방을 다시 찾은 정취에 빠졌던 것도 같고, 그 방에서 벌어진 남녀 간의 정신적·육체적 실랑이를 ‘칼’과 ‘절망’과 ‘조바심’으로 표현해낸 작가의 감수성에 놀랐던 것도 같다. 하지만 확실히, 그때의 나는 이 대목에서 성폭행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무진기행’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사이 소설은 글자 하나 바뀌지 않았는데, 독법은 크게 달라졌다. 가수 겸 책방주인 요조는 경향신문 ‘내 인생의 책’... -
출산과 국가
가까운 미래,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획책한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들은 국명을 ‘길리어드’라 바꾸고, 신정주의·전체주의·가부장제에 기반해 나라를 운영한다. 이곳에선 책이 사라진다. 화장품, 대중영화, 개성 있는 의상같이 쾌락을 주는 물건들도 찾을 수 없다. 공개처형이 부활해 가톨릭, 퀘이커 등 ‘이교도’의 시신이 거리에 내걸린다. 인간은 오직 신의 뜻, 혹은 신의 뜻이라고 가장된 국가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길리어드에서 특히 영향받은 건 여성들의 삶이다. 길리어드는 주변국들과의 오랜 전쟁, 환경 오염 등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 길리어드에는 소수의 남성 ‘사령관’과 그들의 아내가 있다. 아내는 대부분 불임이기에, 조금이라도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은 사령관의 집에 ‘시녀’로 배속된다. 시녀는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을 잊은 채 ‘오브프레드’(‘프레드’의), ‘오브글렌’(‘글렌’의)처럼 사령관의 성(姓)을 이름으로 받고,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 -
참사와 ‘재기억’
1856년 1월의 무섭도록 추운 어느 날, 흑인 여성 노예 마거릿 가너가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켄터키 노예 농장을 도망쳐 나왔다. 당시 가너는 임신 중이었다. 노예사냥꾼과 보안관은 즉각 도주 노예들을 뒤쫓았고, 불과 하루 만에 가너와 아이들이 숨은 농가를 둘러쌌다. 가너는 가장 어리고 사랑스러운 두살배기 막내딸의 목을 직접 베었다. 노예로 돌아가게 두느니, 죽음으로 해방시키겠다는 섬찟한 의지의 발로였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죽이고 자살하려던 가너는 추격자 그룹에 의해 제지돼 수감됐다. 이 이야기는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의 소재가 됐다. 사건 이후 십수년이 흘러, 소설 속 시이드는 딸 덴버와 함께 124번지에서 살고 있다. 124번지는 ‘원혼 깃든 집’이다. 쳐다보기만 해도 거울이 산산조각 나고, 케이크에는 누군지 모를 조그만 손자국이 찍힌다. 두 아들은 124번지를 견디다 못해 진작 도망쳤다. 시이드는 죽은 아기의 영혼이 집에 ... -
글의 응축, 책의 확장
정유정의 소설은 영화계에서 인기가 많다. <내 심장을 쏴라>와 <7년의 밤>은 이미 영화화돼 개봉했고, <28>과 <종의 기원> 역시 판권이 팔렸다. 특히 정유정의 대표작인 <7년의 밤>은 다수의 영화사가 경쟁한 끝에 1억원대 판권료에 러닝 개런티까지 붙는 기록을 남겼다. 강렬한 캐릭터와 굴곡 있는 서사, 극적인 감정 묘사는 한국영화 관계자들이 끌릴 만한 요소다. 책이 아무리 많이 팔린다 해도, 영화 관객 수에는 대체로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유정은 더 넓은 시장인 영화를 의식하고 글을 쓸까. 정유정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인 후, 실제에선 경험하기 힘든 일을 실제처럼 겪게 함으로써,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어 안전한 현실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밝힌다. 자신의 소설이 영화처럼 ‘시각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한다. 카메라는 화면의 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