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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기술을 통한 신경과학 발전
필자는 2017년부터 지금까지 경향신문 지면에 칼럼을 써왔다. 시의성이 있거나,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소재(예: 동물 사이의 공감 등)를 연구한 논문 중에서도 ‘네이처’나 ‘사이언스’급 저널에 실린 논문을 주로 소개해왔다. 하필이면 이들 저널에 실린 논문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다. 역사가 깊고 피인용지수가 높은 이 저널들의 엄격한 동료 평가제도와 책임감을 신뢰하고 있기도 하고, 이 저널들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에 기대는 측면도 있었다. 지금이야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필자는 학위를 마치기도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직위의 원로 연구자도 아닌 데다 드문 여성과학자로서 이야기하자니 공연히 위축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원래 건전한 과학 소통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이런 염려 때문에라도 과학 소통의 원칙을 지키려고 더 애써왔다. 저자 이름의 표기 방식, 전문용어의 영어 병기 등 흔치 않은 요구를 받아준 경향신문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늘, 언제... -
앞사람이 쌓은 것을 딛고 진전하는 세상
자신의 연구를 동료 연구자에게 소개하는 역량과 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소개하는 역량은 다르다. 그래서 뇌과학 연구를 하면서 대중을 위한 저술도 활발히 하는 과학자는 많지 않다. BBC 다큐멘터리 <더 브레인(The brain)>을 제작한 데이비드 이글먼,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들, 오랫동안 공포와 불안을 연구해 온 조지프 르두 정도다.얼마 전 조지프 르두를 줌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EBS에서 교육부와 평생교육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전 세계에 흩어진 각 분야 대가들의 강연을 <위대한 수업>이라는 시리즈로 방영하고 있는데, 그중 조지프 르두 편의 감수를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과학 연구를 처음 시작하던 2000년대 중반에 르두 교수의 논문을 읽었다. 당시 나는 감정에 관심이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뇌과학에서 감정을 연구한다고 하면 공포를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포 회로와 공포 반응은 많은 동물종 사이에 보... -
번역청을 세워주세요
전공인 수학·과학을 제외하면, 중·고등학교 교과목 중 살면서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영어다. 영어는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온갖 자료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한국어를 쓰지 않는 수많은 이들에게 나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작은 나라 한국에 태어났으면서도 세계의 변화를 따라가고, 내 성과를 인정받게 해준 것은 영어였다. 그래서인지 상당수 직장에서 영어 실력을 요구하고, 많은 사람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마다 한글날이면 세종대왕께 감사하지만, 그러면서도 영어 공부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영어 따윈 필요 없을 거라며 위안도 해보지만, 우리말의 번역은 유난히도 더디다. 구글 번역기조차도 문화와 어순이 다른 한국어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한다. 양질의 번역자료가 적으면 인공지능도 번역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한 단어인 ‘오빠’마저도 ‘my brother’(구글번역기)나 ‘old man’(넷플릭스 <... -
몸과 생각의 에너지 조율
한낮이면 35도를 넘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다. 일교차가 10도 가까이 벌어졌고 한두 달만 더 지나면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것이다. 환경이 크게 변하는 데 반해 신체의 내부는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생명 활동을 위해서는 체온, 삼투압, 혈압, 혈당 등의 조건이 일정한 범위에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뇌는 이와 같은 항상성의 유지에도 관여하고 있다. 체온, 혈압, 혈당 등은 기계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조절되어야 한다. 혈당을 생각해보자. 맹수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스트레스 상황에는 근육이 에너지를 끌어다 쓰기 쉽도록 혈당이 높아지고, 안전한 곳에서 백일몽을 꿀 때는 혈당이 낮아져야 한다. 이처럼 외부 환경에 맞게 움직이면서도 혈당을 ‘적절하게’ 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환경에 맞는 움직임을 계산해내고 혈당을 조절하는 기관인 뇌부터가 다량의 포도당을 소비한다. 뇌가 하루에 소비하는 포도당은 약 90g(340㎉)이며 이는 신... -
‘위드 코로나’의 문제 설정
공학은 목표를 달성할 수단을 제공한다. 예컨대 날씨가 더울 때면 선풍기 등 체온을 낮출 수단을 제공한다. 공학 덕분에 우리는 수천년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기적을 매일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공학으로 난관을 타개하려 할 때 반드시 선행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1) 어떤 문제를 풀지, (2) 한계 조건이 무엇인지, (3)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가 목표인지를 명확히 정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호복을 입은 구급대원들이 너무 더워서 일하기 힘든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의 문제는, 방호복 때문에 구급대원들의 체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한계 조건은 구급대원의 활동성을 보장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면서도 체온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가격이 비싸지 않아야 하며 사용법도 쉬울수록 좋다. 문제가 해결된 상태는, 구급대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바이러스로부터 보호받으면서도 너무 덥지 않은 상황이다.이처럼 문제와 한계조건, 목표상태가 명확하면 공학은 아무리 ... -
시도도 시작도 하지 말 것
어느새 8월이다. 2021년이 5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연초의 다짐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연초의 다짐을 지키긴커녕 기억도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을까? 8월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그동안 수십번 새해를 맞았지만 새해의 다짐을 그 해 1월 말까지라도 지킨 경우조차 드물 것이다. 이처럼 우리 대부분은 유리 세공품처럼 섬세하고 나약한 의지의 소유자다. ‘드라마를 딱 한 편만 봐야지(혹은 게임을 딱 한 판만 해야지)’ 하고는 멈추지 못해서 늦게 잠들며, 매일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은 종종 작심삼일에 그친다. 이렇게 실낱같은 의지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아편, 코카인 같은 마약이다. 중독성 약물들은 의사결정과 관련된 뇌 부위의 작동 방식을 바꿔서 약물 섭취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약에 중독된 이들이 마약에 저항하는 의지력은 중독되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약하다. 가족과 친구를 잃고, 생활이 무너지고, 반복된 복용으로 쾌감은 줄고 금단증상만 늘... -
사회경제적인 지위와 뇌 발달
35억~43억년 전, 지구에 최초로 생명이 출현한 후 지구 환경은 끊임없이 변했다. 이에 따라 살아남는 데 필요한 능력 또한 변했다. 지구를 다녀간 모든 생명체가 생존과 번식이라는 성공을 위해 절실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노력’이라고 판단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변화된 환경에 적합한 노력을 기울이고 적합한 능력을 획득한 생물종만이 살아남았다. 생물 개체가 보유한 생존 능력의 적합성은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같은 유전자도 환경에 따라서 장점이 되거나 단점이 되었다. 한편 유전자는 개체가 생존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반응의 범위를 제한하기는 했으나 매 순간 어떤 반응을 할지 결정하지는 않았다. 유전자의 발현은 개체가 경험하는 환경에 따라 변했고, 신경계를 가진 동물들은 보다 적극적이고 기민하게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 신경계는 개체가 경험하는 환경에 의해 다듬어지며 개체의 생존 능력을 키워갈 수 (혹은 뜻하지 않게 감소시... -
로봇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
보스턴 다이내믹스라는 회사에서 2016년에 만든 4족 보행 로봇 ‘스폿’을 기억하시는가? ‘스폿’이 지잉지잉 소리를 내며 산길을 걸어가는 영상이 한동안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유명해졌다. 그런데 작년 하반기, 중국의 한 스타트업이 ‘스폿’과 비슷하게 생긴 ‘알파도그’라는 로봇을 출시했다. 이 로봇의 입문용 모델의 출시가는 약 630만원으로 8300만원 선인 ‘스폿’에 비해 무척 저렴했으며, 지금은 가격이 더 내려가 중국에서 270만원 선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알파도그’는 출시 한 달 만에 1800대 이상 팔렸다. 물론 ‘알파도그’는 여전히 고가이고, 굳이 사야 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포드가 중산층을 위한 자동차를 내놓았을 때도, 애플이 가정용 컴퓨터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싼 데다 불필요해 보이는 자동차와 컴퓨터가 지금처럼 널리 쓰일 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미래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새벽 햇살처럼 구석구석 스미는 모양이다. 이번 ... -
감정에 대한 이해
마음의 온갖 현상들 중에서 정서만큼 흥미를 끄는 것도 드물다. 뇌과학에서도 오랫동안 정서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 왔는데, 특히 공포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공포는 많은 동물종에 보존되어 있고, 관측이 수월하며(예: 벌벌 떠는 시간을 통해 공포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도 중요하기(예: PTSD, 포비아)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뉴욕대의 조셉 르두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공포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르두 교수는 오랫동안 공포와 불안에 대해 연구했으며, 공포 학습과 기억의 신경생리학적 기전을 밝힌 공로로 2013년 미국 국립과학원의 회원이 된 뇌과학자다. 먼저 공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대부분은 ‘두려움’이라는 불유쾌한 느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의식적인 자각은 공포 반응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1) 벌벌 떨기와 같은 신체 반응, (2) 위협적인 대상(예: 포식자)과 주변 환경에 대한 주의 집중과 뇌의 전반적인 각성, (3) (1)... -
변화에 대비하는 재미난 상상
세상은 코로나19로 멈춘 듯하면서도 부지런히 바뀌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도 고요히 계속되던 비대면,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은 코로나19로 인해 급속히 진전됐다. 카톡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대면 만남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줌 화상회의는 일상이 되었으며, 클럽하우스라는 새로운 모델도 부상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로 우리에게 충격을 안겼던 인공지능도 성큼성큼 발전하고 있다. 이제 SNS와 인공지능 두 가지를 합친 서비스를 상상해보자. 기왕이면 코로나19로 수요가 폭증한 분야면 좋겠다. 이를테면 정신건강 같은 분야 말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기분장애로 치료받은 사람이 사상 최초로 100만명을 넘었다. 기분장애란, 기분 조절이 어렵고 비정상적인 기분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태를 뜻한다. SNS에 올라온 정보로 사용자의 우울증, 자살 위험, 약물 남용 등을 진단 또는 예측하는 인공지능은 이미 몇 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