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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자질론
반세기도 훨씬 넘긴 이야기다. 서독 유학길에 들렀던 도쿄에서 처음 만난 외할머니는 나를 이끌고 절을 찾았다. 먼 외국 땅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할 외손자의 안녕과 성공 그리고 금의환향을 빌기 위해서였다. 주지 스님은 장도의 행운을 빈다면서 떠나는 나에게 ‘오마모리’라고 불리는 부적을 건넸다. 이 부적은 그 후 몇 년간 내 곁에 있었지만 이사하는 도중에 분실되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닌 부적이었다. 학위는 빨리 받았지만, 그 이후 금의환향은 이루지 못했으니 부적의 힘도 그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여의(如意)’라는 불교적 믿음에 따라 상서로운 구름 모양을 지닌 여러 가지 장신구도 있다. 주력(呪力)을 빌려 좋은 일을 성취할 수 있고 액(厄)을 물리침으로써 소원을 이룬다는 부적은 특히 도교적인 생활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다.얼마 전 한 야당 대통령 후보의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쓴 것이 화젯거리가 된... -
공론(公論) 또는 공론(空論)
선거철이 아니더라도 이른바 ‘일요일 질문’이 거의 정기적으로 전화선을 타고 종종 내게도 온다. 독일에서는 선거가 항상 일요일에 있기에 ‘이번 일요일에 선거가 있다면 어느 당에 투표하느냐’라는 한결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선거와 관련된 여론조사가 예견한 결과와 너무 동떨어진 사례가 자주 발생하기에 여론조사를 도대체 믿을 수 있는지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은 여전하다. 물론 모든 여론조사가 그렇다는 식으로 싸잡아 비난할 수 없을 정도로 실제 결과에 아주 근사한 사례도 있다. 앙겔라 메르켈 여성 총리의 16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마감하고 처음으로 사회민주당·녹색당·자민당으로 구성되는 연방정부가 출발할 수 있게 하는, 지난 9월26일 있었던 의회선거의 결과는 많은 여론조사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여론조사의 역사에서 재앙적인 사건이라고 흔히 거론되는, 1936년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확실한 승자로 여겨졌던 공화당의 랜턴은 민주당의 루스벨트에게 36.5 대 60... -
땅과 바다 이야기
며칠 전 남북연극교류위원회가 주관하는 ‘동에서 서로 남북을 걷다’라는 행사에 맞추어 나의 영상강연이 있었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남북종단은 불가능하기에 한반도의 허리를 동서로만 횡단할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을 다시 보았다. 마치 동물원의 우리에 갇힌 호랑이가 온종일 철책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2년 전부터 이주해서 살고 있는 포르투갈에서 기차를 이용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직선거리는 1만여㎞지만 주행거리는 약 14만㎞로 2주 정도 걸려 중국과 한반도의 접경 지점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종단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노정을 폭 4㎞의 비무장지대가 막고 있다.일제 식민지였지만 분단은 없었던 시절,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조선의 청년들이 중국 상하이를 거쳐 기차나 배를 이용해 긴 여정 끝에 독일과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들 중에는 한글학자로서 후에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 -
아프가니스탄 바로 보기
지난 8월15일 탈레반이 20년 만에 다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입성하였다. 미국 대사관 직원의 긴급한 탈출을 돕기 위해 대사관 건물 위에 떠있는 미군 헬리콥터의 사진은 1975년 4월30일 미군 헬리콥터가 베트콩에 의해서 함락된 사이공에서 미 대사관 직원과 조력자를 급하게 실어나르는 장면을 곧 연상시켰다. 20년에 걸친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이어 20년을 끌었던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일단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불명예스러운 퇴각이 베트남에서의 악몽보다 미국에 더 곤혹스러운 것은 아프간 사회의 내부 무장세력인 탈레반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하여 베트남전쟁은 애초부터 동서진영 간의 갈등을 내포한 국제전의 성격을 띠었다.역사적으로는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했던 요충지 아프가니스탄이었지만 나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다.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58년부터 1863년 사이에 뉴욕에서 출간된 백과사... -
배신의 풍경
대선을 앞둔 정국 때문인지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의 과거 행적과 오늘의 행동거지를 둘러싼 설전이나 비방이 거칠어지는 것 같다. 집권당의 후보를 두고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가담했다는 비난이나, 야권의 후보를 두고 불과 얼마 전까지 현 정부의 고위관직을 지낸 경력을 문제로 삼아 심심치 않게 배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는 윤리적인 전제를 깔고 있다. 배신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인간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혹독하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는 은전 30냥에 예수를 배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는 배신의 화신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하늘나라의 왕인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함께 지상의 제왕인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르투스와 롱기누스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얼음 속에 고통스럽게 갇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배신의 대가가 그만큼 무섭다는 것... -
세대 문제에 대한 단상
최근에 ‘이대남’이니 ‘이대녀’라는 신조어가 자주 등장한다. ‘386’이나 ‘586’으로 지칭되는 세대 문제와 관련된 조어가 등장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새로 등장한 이 조어가 남녀를 구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과거와 다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세대교체’처럼 세대는 우선 사회적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생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 문제의 핵심으로 일찍부터 등장한 계급이나 계층 문제보다 세대 문제는 성(젠더) 문제와 함께 비교적 뒤늦게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었다. 유럽에서 세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배경에는 프랑스혁명 이후 과거 사회질서와의 단절 과정에서 인간의 삶의 과정을 합리적으로 나누어 보려는 강한 욕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젊음과 낭만이 분출해 내는 힘에 초점을 둔 세대에 대한 여러 생각은 문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언론과 검찰
반세기도 훨씬 넘은 이야기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인문계 학부를 졸업하고 취직할 수 있는 직종 가운데 신문기자는 그래서 단연 인기가 높았다. 당시에 ‘언론고시’라는 말은 없었으나 주요 일간지 기자 채용시험은 경쟁률이 높았다. ‘고등고시’ 또는 ‘사법시험’이라고 불렸던 법조계의 등용문을 통과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다. 1972년 ‘10월유신’이 선포되면서부터 언론통제가 노골화되자 1974년 10월 동아일보의 일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12월 말부터 광고가 무더기로 해약되었고 이에 겁먹은 신문 경영진이 유신정권의 요구에 굴복하여 1975년 3월, 사내에서 농성 중이던 130여명의 기자와 사원들을 내쫓은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일보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다. 언론계에 발 들여 놓았던 친구나 선후배 가운데 이런 투쟁에 적극적으로 합류한 사람도 있었고 그러지 못... -
코로나 지옥문 앞에서
지난 4월21일 1차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일원화된 유럽연합의 코로나 백신 공급체계라지만 인구 1000만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까지 백신 공급이 제대로 될지 우려했다. 그러나 백신 접종의 속도는 지금 독일이나 프랑스와 비슷하다. 올해 초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코로나 위기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였으나 얼마 전부터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해외여행은 여전히 통제가 심하지만 일상생활은 거의 정상화되었다. 반년 가까운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엄격한 통제 덕분이다. 백신을 맞기 전날 옥스퍼드대학 백신그룹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아스트라제네카’를 개발한 둘째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무더웠던 작년 여름, 하루도 쉬지 못하면서 내놓은 결과를 부모가 공유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유감스럽게도 아스트라제네카는 아니었다. 백신 접종은 의무도 아니고 선택권도 없다. 학수고대했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작년 11월 말 ... -
4월에 떠올리는 상념
코로나19 사태가 급속하게 악화된 2020년 말 포르투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단어가 무엇인지를 두고 설문조사가 있었다. ‘코비드19’나 ‘팬데믹’이 아니라 ‘사우다지(Saudade)’였다. 전문적인 번역가도 다른 외국어로 옮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우다지 - 포르투갈 사람만이 이 감정을 알 수 있다. 오로지 그들만이 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단어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포르투갈의 민족시인 페르난두 피수아(Fernando Pessoa, 1888~1935)도 이를 강조했다. 사우다지의 정확한 어원은 여전히 분명치 않다. ‘외로움’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또는 ‘우울’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널리 이용되는 <후아이스(Houaiss) 포르투갈어 사전>은 이 단어의 복합적인 의미를 “불완전함에 대한 어떤 우울한 감정이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부재로 인해서 또는 과거에 특별하게 원했던 체험이나 즐거움이 사라진 상황을 뒤돌아보는... -
자유주의의 위기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독일 남서부에 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회의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다. 녹색당 32.6%, 기민당 24.1%, 사민당 11.0%, 자유민주당 10.5%, 그리고 극우 정당인 대안당 9.7%였다. 독일 자유주의의 종가(宗家)답게 이 지역에서 자유민주당은 선전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의회 진출의 하한선인 5%를 겨우 턱걸이하는 상황이다. 한때는 사민당이나 기민당과 함께 중앙정부를 구성했던 당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에 발표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전 승리를 선언했다.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요즘, 특히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의 위기에 관한 저술이 눈에 띄게 많다. 저자의 성향도 자유주의로부터 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과 극적인 퇴장, 브렉시트를 둘러싼 갈등, 세계 곳곳에서 위세를 보이는 극우 포퓰리즘과 함께 코로나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