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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논문
    논문

    지금껏 적지 않은 수의 물리학 논문을 썼다. 그래도 여전히 무척 어렵다. 과학 논문을 펼치면 제목과 저자 목록 바로 아래에 ‘초록’이라고 불리는 논문 요약부분이 보인다. 다른 이의 논문을 살펴볼 때 나는 먼저 초록을 잠깐 읽는다. 초록이 재밌으면, 본문을 꼼꼼히 읽기 시작한다. 제목과 함께 논문 저자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 초록일 수밖에. 지금까지 본 가장 재밌는 초록 1등은 바로 ‘Abstract’ 아래에 적힌 딱 하나의 문장이었다. “Yes, but some parts are reasonably concrete.” “네, 추상적인 것 맞아요. 그런데 논문 일부분은 그래도 어느 정도 구체적이랍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초록을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논문 초록’이라는 뜻과 ‘추상적인’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 ‘Abstract’를 가지고 한, 논문 저자들의 작은 농담이다. 과학자도 사람이다. 논문으로 가끔 장난도 친다.‘우리’를 뜻하는 ‘We’...

    2021.07.22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이해
    이해

    “그럴 수도 있지. 다 이해해.” 실수한 사람을 위로할 때 하는 말이다. 사정을 헤아려 보니 당신의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내가 당신을 이해한 순간이다. 이해했다고 해서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은 또 아니다.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해’의 영어 단어 ‘understand’에는, 겸허한 마음으로 당신이 있는 곳 아래(under) 서는(stand) 것이 올바른 이해의 자세라는 뜻이 담겼다. 상대보다 낮은 곳에 한 번씩 번갈아 서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위아래 구별 없이 나란히 함께 서 있는 장면이 이해가 이루어진 다음의 모습이다. 어쩌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둘 사이 교감과 공감의 출발점이 될 공통의 나무 그늘을 찾았다는 뜻일 수 있다. 그 아래에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한 우산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모습이 ‘이해’의 모습이다. 한 나무...

    2021.06.24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꼼짝
    꼼짝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영화에서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자주 등장하는 대사다. 몸을 조금만 움직이는 모양을 우리는 ‘꼼짝’이라고 한다. 용의자가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이 신분증일 수도, 권총일 수도 있다. 어떤 행동도 허락하지 않는 “꼼짝 마”로 불확실성의 여지를 아예 없애는 것이 낫다. 물리학자인 내게 ‘꼼짝’의 크기는 위치 정보의 불확실성이다. 자연이 허락한 가장 낮은 온도가 절대영도다. 섭씨온도 눈금으로 영하 273.15도에 해당하는 낮은 온도다. 유한한 온도에서 기체분자는 마구잡이 열운동을 해서 운동에너지를 가진다.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해 절대로 0보다 작을 수 없고, 따라서 기체의 평균 운동에너지에 비례하는 절대온도도 절대로 0보다 작을 수 없다. 온도를 점점 낮추는 과정을 이어가면 결국 고전역학을 따르는 기체분자의 운동에너지가 0이 되는 절대영도에 도달하게 되고, 이보다 더 낮은 온도는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거꾸로 절대온도의...

    2021.05.27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자연
    자연

    텃밭을 가꾸며 떠오른 생각을 적은 조선시대 윤현(尹鉉)의 칠언절구가 있다. 뾰족한 마늘 싹, 가는 부추 잎, 아욱과 파의 파란 새싹이 돋는 것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 시인은 무사자연귀유사(無事自然歸有事)라고 적었다. 정민은 <우리 한시 삼백수: 7언절구 편>에서 “일없는 자연에서 도리어 일 많으니”로 새겼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자연에서 저절로 놀라운 생장이 일어나는 것에 감탄한 글귀다. 매년 봄 목련이 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감동해 경이감을 느낀다. 봄은 늘 기적처럼 저절로 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때맞춰 변하는 자연을 보며 우리는 매번 감탄한다. 하지만 자연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기나긴 겨울 지난한 과정을 묵묵히 이어갔기에 때맞춰 목련이 피어난다. 창공의 새도 저절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고 먹이를 물어와 새끼를 기르는 온갖 노력의 과정이 이어지지만, 우리는 하늘을 나는 새를 잠깐 보며 아무...

    2021.04.29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음모
    음모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에 나오는 이야기다. 기장이 운항 중 깜빡 졸아 비행기 사고가 났다.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꾸벅 존 바로 그 기장을 처벌해 조종간을 맡기지 않는 것만으로 장차 다른 기장이 조는 것을 모두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항 일정이 과도해 휴식시간을 갖기 어려웠던 것은 아닌지 살피고, 역할분담의 장벽이 높아 부기장이 기장을 돕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조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책임자를 찾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책임질 누군가를 찾아 처벌하고는,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넘어가는 상황이 이어지면 똑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팩트풀니스>에 나오는 다른 얘기다. 여전히 큰 문제인 말라리아에 대한 연구를 거대 제약회사가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수업 중 들려주자, 한 학생이 제약회사 사장의 면상을 한 대 갈겨주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사장 혼자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제약회사 이사...

    2021.04.01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꼰대
    꼰대

    세상에는 두 종류의 꼰대가 있다. 꼰대라는 것을 아는 꼰대와 그것도 모르는 꼰대. 두 번째가 더 문제다. “오늘 저녁은 내가 쏜다. 아무거나 다 시켜! 난, 짜장면!”을 외치는 직장 상사와 비슷하다. 훌쩍 50대 중반에 들어선 나도 물론 꼰대다. 주변 대학 교수 중 꼰대가 특히 많다. 꼰대에도 중증과 경증이 있다면, 교수는 분명한 중증 꼰대다. 법원 판사, 병원 의사도 마찬가지다. 정보 비대칭성이 커 상대가 반박하거나 토 달기 어려운 직업일수록 꼰대가 되기 쉽다. 가만히 속으로 삭이며 틀린 말을 참고 들어줄 뿐인데, 상대가 가만히 있으니 자기가 옳은 말만 한다고 믿는다. 결국 꼰대라는 안정적인 고정점(stable fixed point)에 도달한다. 꼰대가 많은 회의는 코미디 코너 ‘봉숭아 학당’을 닮았다. 자기 의견이 옳다고 믿으며 회의를 시작한 모든 꼰대는, 회의가 끝나면 자기 의견이 정말로 옳다고 생각한다. “회의 중 결정할 수 없으니, 이 문제를 논의하는 위원회를...

    2021.03.04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역설
    역설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이 우리의 직관과 상식에 어긋날 때, 이를 역설이라 한다. 결론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논리적인 허점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역설이 더 재미있다. 역설(逆說)의 영어 단어 paradox에서 para는 반대 혹은 비정상을 뜻하고 dox는 의견 혹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역(逆)은 para에, 설(說)은 dox에 일대일 대응한다. 흥미롭게도 para는 가깝다는 뜻도 있다. 역설은 참에 가까워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참은 아닌, 직관에 반하는 주장이다. 얼핏 봐서는 틀린 것을 찾기 어려운.학생 때 들은 재미있는 역설이 떠오른다. 흰 돌, 검은 돌, 많은 바둑알이 마구 섞여 있는 통에서 내가 몇 개의 바둑알을 집어내도 이들 모두가 같은 색이라는 역설이다. 먼저, 바둑알 하나를 집어내보자. 당연히 색은 하나다. 검거나 희거나 둘 중 하나지, 한 바둑알이 다른 색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 다음에는, 통...

    2021.02.04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풍경
    풍경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2015년 드라마 <송곳>에서 본 명대사다. 같은 사람이어도 경제적 상황이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눈도 변한다는 의미다. 한 사람이 보는 풍경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누적된 삶의 경험이 천양지차인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의 차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도 떠오른다.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제각각 다른 기준을 갖는다는,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주장이다. 프로타고라스가 한 이 말에 등장하는 인간은 단수형이어서, 인간이라는 유(類)를 뜻하지 않는다. 각자가 주장하는 각자의 진리만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서있는 곳이 달라 세상도 달리 보는 이들이, 서로 자기가 보는 풍경만이 옳다고 우기는 형국이다. 자기가 가진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옳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틀...

    2021.01.07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인연
    인연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내 인생 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아름다운 헌정사다. 칼 세이건과 앤뿐이겠는가. 우주의 공간적 규모에 비하면 티끌처럼 작은 행성인 지구에서,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를 살다 사라지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야 가능한, 일어날 확률이 거의 0인 사건이다. 두 사람의 사랑 얘기뿐이겠는가. 걸어가다 옷깃만 스쳐도, 모든 인연은 천문학적 규모의 우연이다. 인연의 소중함은 우연의 확률에 반비례한다.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을 떠올리고 이들이 모여 내 몸을 이루는 과정이 담긴 상상의 동영상을 머릿속에서 거꾸로 돌려본다. 내 손톱을 이루는 한 원자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동영상에서 얼마 전 내가 먹은 고등어에 들어 있고, 그 전에는 바닷물 속에 보인다. 동영상이 너무 더뎌 고속으로 바꾸고 기다리니, 지구 형성 이...

    2020.12.10 03:00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경계
    경계

    어린 시절 밥 먹으라는 부름을 듣고 뛰쳐나오다 문턱에 발가락을 찧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문을 닫으면 문이 안과 밖을 나눠 넘을 수 없는 확실한 물리적 경계가 되지만, 문이 열려 있어도 문턱은 안팎을 가르는 경계다. 배고파 뛰쳐나오다 보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초등학생 때 짝꿍과 다투고 나면 곧이어 하는 일이 책상 한가운데에 볼펜으로 선을 긋는 것이었다. 여기 넘어오면 안 돼. 지우개가 바닥에서 저쪽으로 굴러가면 책상에 그은 선이 공해상으로 연장되는지를 두고 다퉜던 기억도 난다. 책상 위의 선처럼, 어느 날 그렇게 하기로 정해 생긴 경계가 더 많다. 내 집 땅과 옆집 땅을 가르는 차이는 지적도에만 있지 땅을 봐선 알 수 없고, 도로 위를 차로 달려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접어들 때 표지판 없이 도의 경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보이지 않는 선을 두고 우리는 나와 너,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는 셈이다. 눈에 잘 띄는 경계도 있고, 주의를 기울여야 볼 수 있는 경계도 있...

    2020.11.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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