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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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여기]마음껏 이동하며 살아갈 권리

    마음껏 이동하며 살아갈 권리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역에서 명절 인사 중인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앞에서 한 여성이 손팻말을 들고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장애인 권리 법안들을 올해 꼭 통과시켜달라는 요청이었다. 기차역이라는 공간에서 고향을 향해 재촉하는 발걸음들은 장애인을 비롯한 교통약자의 취약한 이동권과 사뭇 대조되는 듯 보였다.사실 권 원내대표와 장애인단체의 서울역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2022년 추석 전, 장애인단체는 명절 인사 나온 권 원내대표에게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당시 잘 살펴보고 합리적인 대책을 만들겠다고 대답했다. 그 뒤로 3개월이 지난 2022년 말, 그는 장애인단체의 출근길 지하철 탑승 행동에 대해 ‘떼법의 일상화, 불법의 습관화’라 평했다. 명절 때마다 서울역에서 반복되는 정치인과 장애인단체의 만남은 고작 그 정도의 의미였을까.우리나라에는 2005년 제정되어 올해 스무 살 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이 있다. 교통약자는 장...
  • [지금, 여기]인과성 왜곡

    인과성 왜곡

    내 전공은 역학(疫學)이다. 오랫동안 물리학의 역학(力學), 명리학의 역학(易學)에 밀려 존재감이 없었는데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며 ‘역학조사’와 함께 전 국민에게 조금은 낯익은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천공스승, 건진법사, 아기보살 같은 분들이 나타나면서 역학(易學)에 또다시 밀리고 있다.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말대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역학조사라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보건학의 분과학문으로서 역학(疫學)의 본질은 인과성 규명에 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파헤치는 것이다. 질병의 원인이 뭔지 찾아내야 예방을 할 수 있고, 질병이 호전된 것이 정말 지금 투약 중인 신약의 효과인지 확인해야 치료제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일을 역학이 한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척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면 굳이 이를 직업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인이 있는데 사실은 그 요인 때문이 아니라 제3의 혼란 요...
  • [지금, 여기]세월호 판결과 대통령지정기록물

    세월호 판결과 대통령지정기록물

    ‘버터플라이 효과’라는 것이 있다. 작은 변화가 시간이 흐른 후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운명을 바꾸는 현상을 말한다. 세월호 참사 정보공개 판결로 윤석열 정부의 민낯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행적이 대통령기록물로 확인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1월9일 대법원은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기록관을 상대로 제기한 ‘세월호 7시간 관련 기록물’ 비공개 처분 취소소송에서 ‘대통령기록물로 봐야 한다’는 원심 판결(비공개)을 파기하고 공개 취지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10년 만에 세월호 관련 기록물들이 대부분 공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소송의 쟁점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의 사법적 심사 제외 여부였다. 그동안 대통령이 퇴임과 동시에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분류하면 정보공개법과 관계없이 비공개를 최대 15년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내용 검토 없이 비공개 처분을 할 수 있었고, 행정소송을 하더라도 사법부에 대통령지정기록물이라는 이유로 열람·복사본을 제출하지 ...
  • [지금, 여기]인권위를 몰락시키는 이들에게

    인권위를 몰락시키는 이들에게

    연일 뉴스를 보며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2020년대에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국회에 군인이 난입하는 모습을 전 시민이 지켜봐야 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지만, 뒤를 이은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선별 임명 등 대통령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내란수괴는 적법하게 발부된 체포영장을 부정하며 관저를 요새화하고 있다. 지금 가장 자주 들리는 단어인 ‘법과 원칙’이 말 그대로 무너지고 있다.그러한 상황을 더욱 가중시킨 기관이 있다. 모든 시민의 인권과 존엄을 보호하고 민주적 기본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이다. 지난 9일 김용원, 강정혜, 김종민, 이한별, 한석훈, 5명의 인권위원이 13일 개최되는 전원위원회에 긴급안건을 제출했다.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의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이라는 거창한 안건의 내용은 읽어볼수록 놀랍다. 비상계엄 선포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으므로 탄핵이 바람직하지 않고, 오히려 야당의...
  • [지금, 여기]그래도 어딘가는 나아지는 중이다

    그래도 어딘가는 나아지는 중이다

    실로 참담한 연말이었다. 12월이 시작되자마자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로 정국은 탄핵과 수사의 소용돌이에 마비되었다. 그런 와중에, 한 해 마지막 날을 사흘 앞둔 12월29일에는 무안공항에서 최악의 여객기 참사까지 발생했다. 절망의 도가니 속에서 정치뿐 아니라 경제도 직격탄을 맞으며, 슬프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연말이 고통스럽게 흘러갔다.많은 사람이 차마 뉴스를 켜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디며 지나던 12월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안에 작은 기적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소외된 어떤 사람들의 인권이 법 앞에서 인정받았고, 늦었지만 국가가 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판결로 준엄하게 선포된 것이다.먼저, 지난달 18일 발달장애인을 위해 이해하기 쉬운 공보물과 그림 투표용지 등 보조용구를 제공해야 한다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사건의 원고인 발달장애인 당사자 박경인과 임종운은 최초 소송이 제기된 지 거의 3년을 견뎌 이번 항소심 판결...
  • [지금, 여기]존재의 소멸을 가져오는 빛

    존재의 소멸을 가져오는 빛

    1940년대 미국에서 발표된 ‘빈티지 시즌(vintage season)’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5월 어느 날 주인공 집에 지나치게 세련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방인들이 찾아와 한동안 집을 빌려 머물기로 계약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이방인이 찾아와 시가의 3배 가격을 제시하며 당장 이 집을 사겠다고 한다. 5월 말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많은 방문객이 이곳을 찾아든다. 나중에 밝혀진 이들의 정체는, 최적의 시기에 최고의 스폿에서 역사적 스펙터클을 즐기려고 옮겨 다니는 시간여행자 관광객들이었다. 지금 이곳에 몰려든 것도 임박한 재난을 앞두고 가장 구경하기 좋은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운석이 근처 마을에 떨어지고 이 집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타오르며 폐허가 된다. 잔혹한 대장관을 감상한 이들은 이제 화려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9세기 샤를마뉴 황제의 대관식을 구경하러 다시 길을 떠난다.오래전에 읽었던 이 소설을 떠올린 것은 지난 한 ...
  • [지금, 여기]12·3과 대통령기록물 폐기 금지

    12·3과 대통령기록물 폐기 금지

    모든 증거는 기록에서 시작되고 기록의 해석은 역사를 만들어 낸다. ‘12·3 내란 사태’ 이후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우리 사회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다. 이 사태의 해결은 관련 기록물을 모으고, 폐기 금지를 선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란 사태의 주요 장소가 대통령실과 국방부 등 외부 접근이 제한적인 곳이어서 기록물 멸실이 걱정된다.계엄법 2조 5항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거나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한다. 국무회의는 회의 명칭, 일시, 장소, 상정 안건, 참석자 현황, 주요 발언 등에 대해 기록한 후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 게시한다.지난 13일 고기동 행안부 차관은 국회에서 “국무회의 실체와 형식과 절차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회의록은 없다”고 답변했다. 계엄의 절차적 불법성을 인정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식 회의를 대신해 국무위원에게 각종 조치사항을 담은 문건을 전달했다고 알려졌다.이는 내란 사태의...
  • [지금, 여기]인권이 무시되는 만행을 막기 위해

    인권이 무시되는 만행을 막기 위해

    지난 12월10일은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76년이 되는 날이었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것은 두 차례의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등을 겪으며 인권이야말로 이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장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언문의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격분시키는 만행을 초래하였다.”그리고 세계인권선언일로부터 일주일 전 시민들은 또 다른 만행을 목격했다. 바로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비상계엄 선포와 그 후 나온 계엄사령부 포고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준수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내용도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담고 있었다.포고령 1호가 전면 금지한 것이 정치적 집회·결사의 자유였는데, 계엄군을 막고 계엄 해제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의 집회였다는 것은 의미 깊다. 모이고 말하며 이를 통해 정치를 만들어나가는 것, ...
  • 그래도 국회는 ‘민생’을 저버리지 말라

    계엄이라는 블랙홀에 온 정국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연일 새로 밝혀지는 구체적인 12월3일 밤의 상황을 보면, 천만다행으로 유혈사태는 없었으나, 도저히 2024년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시도되고 실행되었다. 어찌 이러한 참담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배경을 샅샅이 밝히는 것은 물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헌법과 법률에 따른 조치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만 있다면 윤석열 대통령에게 왜 이런 일을 하필 12월 초에 벌였는가 따져 묻고 싶다. 물론 1년 중 그 어느 때라도 발생해서는 안 되는 반헌법적인 일임은 분명하나, 특히 12월이 서민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시절인지 대통령은 정녕 몰랐을까.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 춥고 힘들어지는 시기이자, 국회와 정부가 올해 묵은 일들을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앞두고 많은 일을 처리하는 달이다. 그럼에도 난데없는 비상계엄으로 정부와 국회가 마비 상태에 빠져버렸다.일단, 새해 예산이 문제다. 대한민...
  • [지금, 여기]지게 공동 구매를 제안하며

    지게 공동 구매를 제안하며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며 새로운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했다. 역사를 정권 입맛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학계와 시민사회의 비판이 거셌다. 사안의 중대성과 별개로 당시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작은 뉴스가 하나 있었다. 은퇴한 노교수가 국정 역사교과서의 대표 필진으로 초빙된 사실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대거 몰려와 그를 만류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예정된 기자회견에 불참하기까지 했다. 그의 정치색이나 학문적 역량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스승의 잘못된 결정을 말리기 위해 모여든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흥미로웠다. 그동안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장면 아닌가. 결국 성추문 때문에 사퇴하는 어이없는 결말을 맞기는 했지만, 공적 활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저런 종류의 ‘안전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우리는 온갖 이상한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과거를 뒤집는 갈지(之)자 행보를 서슴지 않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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