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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드라마의 비극적 대단원
20년 전 바로 오늘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던 날이다. 소박한 교외 식당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숨죽이며 TV 화면을 지켜봤다. 출구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민주노동당 9~12석’이라는 뉴스가 화면에 등장했다. 다 함께 환호했다. 내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을 알고 있는 지인들의 축하 문자, 전화가 이어졌다. 내가 당선된 것도 아닌데! 민주노동당 당원이든 아니든,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 순간이었다.오랫동안 반공이데올로기가 진보정당의 출현을 가로막았다. 어려운 시작 이후에도 민정당과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거대 양당의 치열한 접전 속에서, 진보정당은 매번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정책 공약도 ‘사표(死票)’ 우려 앞에서 번번이 힘을 잃었다. 그런데 17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1인 2표제가 도입되었다. 최소한 비례명부에서는 정치공학적인 고려 없이, 사표 걱정 없이 지지 정당에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비례명부에서... -
윤석열 대통령과 선거방송심의위원회
대통령은 대선 출마 과정에선 정치인 신분이지만 취임 후엔 공무원 신분도 가진다. 특히 각종 선거 기간 동안 공개적 행보를 조심해야 하고, 발언도 공정과 중립을 지켜야 한다.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가 헌법적으로 적용된 것은 2004년 제17대 총선 이후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법 위반이긴 해도 탄핵할 만큼 중대 사안이 아니라고 판시했지만 아래와 같은 중요한 기준을 만들었다. “선거에 임박한 시기이기 때문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는 때에, (중략)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로써 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한 것이므로, 선거에서의 중립 의무를 위반하였다.” 이 판결 이후 취임한 대통령들은 선거 기간 동안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유독 윤석열 대통령은 헌재 결정문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번 총선 기간 동안 최악의 장면을 꼽으라면 ‘민생토론회’... -
인권위,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20년 넘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해 온 기관이다. 설립 직후인 2003년부터 차별금지법 성안 작성을 추진하였고, 2006년 국무총리에게 제정을 권고했다. 이후 2007년 법무부의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이 성소수자 혐오로 좌절된 이후에도, 인권위는 계속해서 이를 이야기해왔다. 2020년 제21대 국회 출범 직후에는 평등법 시안을 공개하며 다시 한번 강력히 국회에 제정을 권고했다.그런 인권위에서 표결로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가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지난 3월25일 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미 일본군 성노예제 권고, 비동의간음죄 제정 등 주요한 내용에 관하여 몇 차례의 진통이 있었던 보고서이다. 그런데 심지어 최종 보고서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가 아예 제외되었다. 출석한 10명의 위원 중 4명만이 찬성 의결을 던졌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지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생각... -
권력자의 개혁은 왜 이리 투박한가
사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19년 정부와 국회가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힘껏 내달린 결과가 경찰에 수사종결권을 주는 것이 될 줄 말이다. 검찰개혁 법안 초안에는 검찰의 수사지휘를 없애는 내용도, 경찰이 수사를 종결한다는 내용도 없었다. 이미 판은 벌였으니 뭔가는 해야겠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우려를 덮으려다 보니 개혁의 동기와 초안의 뼈대는 이리저리 휘었다. 그렇게 누더기가 된 검경수사권 조정안은 패스트트랙의 급물살을 타고 기어이 2020년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경찰에 수사종결권이 생겼고 ‘불송치’라는 새로운 단어가 법에 들어왔는데, 정작 사건 처리에 바쁜 수사 현장의 경찰은 어리둥절했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2022년 봄, 문재인 대통령의 퇴임을 겨우 한 달 앞두고 휘몰아친 검수완박 입법도 비슷하다. 검경수사권 조정 이후 극심해진 수사 지연을 해소할 방책 마련은 뒷전이고, 정부와 여당은 유행가 가사처럼 또 검찰개혁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위장탈당과 회기 ... -
최선이자 유일한 대안, 공공이 미래다
얼마 전 일본의 ‘의료취약지 공공병원’ 견학을 다녀왔다. 인구가 채 3만명이 안 되고 노인 인구 비율이 40%에 달하는 농촌지역 시립병원들이었다. 이들 역시 의료인력, 특히 의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황은 훨씬 나았다. 우선 병상 150개, 그중에서도 급성기 병상은 50개에 불과한 아키타현 오모리 시립병원은 내과, 외과, 정형외과 전문의 13명을 고용하고 있는데, 외래는 이들 3개 과 외에도 신경과, 신장내과, 호흡기내과, 소아과, 비뇨기과, 안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재활의학과 등을 열고 있었다. 비결은 ‘파견’이었다. 아키타 의대에서 전문의들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여 주민들에게 필요한 외래 서비스를 제공했다. 병원 규모가 이렇게 작아도 위암과 대장암 수술을 직접 시행할 만큼 진료 역량도 탄탄한데, 이때 필요한 마취과 의사 또한 아키타 의대에서 파견해주었다. 영상 검사 역시 아키타 의대와 원격 진단 체계를 갖추고 판독 지원이 필요할 때 도움... -
이승만기념관 설립 적절한가
우리 사회는 2007년 대통령기록물법 제정 이후 대통령기록관과 ‘전직대통령법’에 의한 대통령기념관(혹은 도서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기록은 가치중립적이며, 사료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 풍부할수록 각종 연구와 문화적 콘텐츠 개발에 도움이 된다. 대통령기록관은 법에 의해 엄격히 관리하며 그 비용도 전액 국가 예산이다.기념은 특정 대통령을 미화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며, 부정적 평가 사료에 대해서는 수집 및 전시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통령의 집권 기간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지역과 시민들이 있다면 ‘기념관’은 그들의 상처를 계속 노출시키는 격이 된다. 이런 이유로 ‘전직대통령법’에는 국가는 기념관 설립을 주도하지 않으며 일부 사업비용과 문서 및 도화 등 전시물을 지원할 뿐이다. 이것이 기록관과 기념관이 구별되는 점이다. 이승만기념관 설립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송현광장에 이승만기념관을 지을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해 큰 논란이 벌어졌다. 기념관... -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3판에서 동성애를 제외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성명을 통해 “동성애가 그 자체로서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또는 직업 능력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동성애자에 대해 행해지는 모든 공적 및 사적 차별에 개탄한다”고 선언하였다. 그 후 1990년 세계보건기구는 국제질병·사인분류 제10판에서 역시 동성애를 정신장애 범주에서 제외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 그 어떠한 정신의학 진단 기준에서도 동성애는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다.다른 모든 학문도 그러하지만 의학 역시 학계의 공식적 입장은 수많은 관찰, 실험, 검증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나아가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것은 의학만이 아닌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제에서의 축적된 연구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때때로 이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과학적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2001년 동성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며 학술지에 기고를 했... -
녹음으로만 증명되는 학대도 있다
이달 초, 용인 장애아동 학대 사건의 피고인 특수교사는 벌금형의 선고를 유예받았다. “버릇이 매우 고약하다. 싫어 죽겠어. 너 싫다고. 나도 너 싫어. 정말 싫어”라고 말한 부분이 유죄로 인정되었다. 피해아동의 부모가 유명인이라 더욱 지대한 사회적 관심을 받은 이 사건에서 떠오른 법적 쟁점은 ‘녹음의 증거능력’이었다. 스스로 녹음을 할 수 없는 피해자를 위해 누군가가 대신 실행한 녹음 덕분에 범죄가 세상에 밝혀진 사례는 적지 않다. 사회복지재단 가정지원센터에 근무하며 한 가정에 파견된 아이돌보미가 10개월 된 아기를 돌보며 “미쳤네, 미쳤어, 돌았나, 제정신이 아니제, 미친O 아니가 진짜”라고 말하는 것이 부모가 몰래 설치한 녹음기에 담겼다. 아이돌보미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몇년 전 대리한 사건 중에는 침조차 스스로 못 삼키는 최중증 장애아동이 특수학교 담임교사로부터 폭언을 들으며 교실 안 화장실에 갇혀 있던 건도 있었다. 부모가 아이 옷 속에 넣었던 녹음기 안에는 ... -
YTN 매각과정과 법치주의
17세기 영국 대법원장인 에드워드 쿡 경은 영국 국왕인 제임스 1세와 논쟁을 벌이면서 “국왕이라 할지라도 신과 법 밑에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절대군주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에 의해서만 통치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쿡 경은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의회의 법률이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권리청원 초안 작성을 주도했다. 이를 법치주의라고 부른다.대통령의 권력도 국회에서 제정된 법에 의해 통제되며, 이를 위반할 시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7일 방송통신위원회는 YTN 최대주주를 유진그룹으로 변경하는 것을 승인했다. 공영방송을 민영화하는 것은 정권 성격에 따라 찬반이 있을 수 있지만 매각 과정은 구성원과 시청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므로 법 절차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방통위는 합의제로 운영되는 기구다. 방통위법에 따라 위원 5인 중 위원장을 포함한 2인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3인은 국... -
든 자리는 알아도 난 자리는 모른다
연말에 독일 여행을 다녀왔다. 버스, 트램(전차), 지하철, 지역 일반열차, 광역 고속열차, 비행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낯설었던 것은 어디에나 유아차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대중교통, 특히 버스에서 유아차를 만나는 건 진짜 드문 일이다. 한국의 대단한 저출생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이건 이상한 일이다. 1990년대 말 처음 방문한 유럽 미술관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너무 많아 놀랐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옛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와 반대였다. 버스, 지하철, 기차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안 보이고, 유아차를 탄 아기들이 안 보여도 이들의 부재(不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이들이 눈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비로소 예전의 부재를 깨닫게 된 셈이다. 사실 수도권의 대중교통, 특히 출퇴근 시간은 적자생존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렝게티 생태계나 다름없다. 지구력, 민첩성, 유연성, 그리고 불굴의 정신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