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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 [지금, 여기] 도끼 들고 숲을 향하는 당신들에게
    도끼 들고 숲을 향하는 당신들에게

    옛 문헌을 보러 전주에 다녀왔다. 도심의 옛 건물 사이에는 생활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마스크 없이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난 몇년의 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지독한 역병의 시대가 끝나는 걸까. 우리는 답답하고 두려웠던 지난 시간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게 될까. 전주의 도서관들은 좋았다. 나는 정작 열람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어느 공공도서관의 로비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치된 발간물의 수준이 높았고, 선별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메모를 하고 주석을 정리하는 동안, 함께 간 중학생 아이는 12~16세 전용 열람실에서 놀며 책을 읽었다. 몇 시간 후에 만난 아이는 즐거워했다. 도서관은 어땠니? “훌륭했어!” 어떻게 훌륭했는데? “총류 서가가 비어 있지 않았어!”이는 사전이나 전집, 총서, 신문 합본 같은 것이 꼼꼼하게 수서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책은 비싼 데다 열람 빈도가 낮아서 청소년 열람실에서는 구색 정도만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

    2023.02.06 03:00

  • [지금, 여기] 건강보험은 전진해야 한다
    건강보험은 전진해야 한다

    지금 청년 세대에게는 원래 있는 제도이지만, 필자의 건강보험 자격득실확인서를 떼어보면 1987년부터 가입 내역이 시작된다. 그 이전에는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모가 공무원이나 교사, 대기업 직원인 경우에만 의료보험이 있었고, 그래서 동네에서 누가 의료보험 있는 직장에 다닌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했다. 엄연한 불법임에도 다른 사람의 보험증을 빌려 병원에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의료보험은 그야말로 ‘특별한’ 혜택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은가? 전 국민 건강보험 시대는 겨우 한 세대 전인 1989년에야 도래했다. 한참 뒤 본인 일터에서 건강보험에 강제 가입한 친구들은 한동안 성토대회를 열었다. “나는 생전 병원에 안 가는데 왜 의료보험료를 ‘따박따박’ 내야 하는지 모르겠어. 들고 싶은 사람만 들게 하면 안 되나?” 이런 경솔한 불만은 몇 년 안 지나 사라졌다. 건강보험의 보편성은 뜻밖의 곳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채용 과정에서 고용 이력을 확인할...

    2023.01.30 03:00

  • [지금, 여기] 이동권 보장되는 새해가 되길 바란다
    이동권 보장되는 새해가 되길 바란다

    지난주 월요일 새벽 재난문자 알림에 잠을 깼다. 강화도 인근 지진을 알리는 문자를 보며 강화에 사는 친구가 생각났다. 다행히 함께 있는 단체채팅방에서 괜찮다는 글이 올라왔고, 안심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재난문자에 익숙해진 지 오래이다. 확산 초기에는 감염인의 개인정보를 지나치게 자세하게 알리는 등 감염병 예방과 무관한 정보들이 마구 오는 것에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에 행정안전부에서는 2021년 4월 ‘재난문자방송 기준 및 운영규정’을 마련하여 발송 근거와 체계를 정비하였다.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울리는 알람을 볼 때면 대체 기준이 무엇인지, 지침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보내서는 안 되는 문자가 오기도 했다. 바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대한 재난문자다. 1월2일 오후 9시4분, 나를 포함해 많은 시민들이 ‘4호선 삼각지역 상선 당고개 방면 전장연의 지하철 타기 불법시위로 무정차 통과...

    2023.01.16 03:00

  • [지금, 여기] 새해, 국회개혁이 절실하다
    새해, 국회개혁이 절실하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과 인권침해를 소송이나 민원으로 싸우다 보면 제도의 허점들이 보인다. 유사한 피해를 막기 위해 법률 제정안이나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의원실을 통해 의원입법 발의를 하거나, 소관 정부 부처와 논의해 정부 입법안 연구에 참여해왔다. 의원이나 정부가 법안을 발의한 이후 그 법안의 국회 처리 상황을 수시로 확인해 보면, 그간 법안을 만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심히 허탈해질 때가 있다. 국회는 법안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오히려 법안의 무덤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하는 국회’에 대한 시민의 큰 열망과 다르게 돌아가는 모습에 실망해 이제는 아예 정치에 관심 끄겠다는 사람, 먹고살기 힘들어져 국회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다는 사람도 심심찮게 만난다. 의원이 발의한 법률안의 수가 각 국회 임기마다 가파르게 늘었다는 것은 일하는 국회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 발의 이후 법안이 어떻게 심사·수정·통과되는지보다, ‘몇 ...

    2023.01.09 03:00

  • [지금, 여기] 불안의 바다서 눈 덮인 산사 떠올릴 때
    불안의 바다서 눈 덮인 산사 떠올릴 때

    10년 전 겨울, 첫 회사를 그만둔 나는 <모비 딕>을 들고 어느 산사에 갔다. 책을 만들며 밥벌이를 하는데도 두꺼운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게 억울해서 홧김에 산 책이었다. 나는 두툼한 책을 책상에 놓아둔 채 연이은 야근을 견뎠다. 몸과 마음이 지쳐 탈진할 지경일 때 표지의 고래 그림을 보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면 차분히 이 책을 읽을 거라고, 나는 당장 도망치자며 아이처럼 조르는 자신을 어르고 달랬다. 그런데 모처럼 산사에 앉아서 읽기 시작한 <모비 딕>은, 슬프게도, 무지막지하게 재미가 없었다. 물론 당시의 내게 그랬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 책이 800페이지 내내 고래를 쫓고 싸우는 투쟁과 파멸과 분노와 우정의 이야기일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면도 있었지만, <모비 딕>은 고래에 대한 방대한 박물지이자 백과사전의 성격이 강했다. 고래의 어원과 옛 문헌, 포경선의 구조, 선원의 역할, 포경과 고래 해체 기술, 심지어 포...

    2023.01.02 03:00

  • [지금, 여기] 구간 단속, 고속도로에만 필요할까
    구간 단속, 고속도로에만 필요할까

    동방예의지국에서 함부로 내뱉을 말은 아니지만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의문을 갖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어? 이거 예전에 해봤던 건데’하는 일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9년 3월11일 오전 9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건물 앞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들의 긴급 공동 기자회견에 나는 보건 분야 전문가로 참석해 한마디를 보탠 적이 있다. 당시 발언의 요지는,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바짝 장시간 노동을 한 다음 충분히 쉬기만 하면 괜찮은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법정근로시간은 엄연히 주 40시간이니, 연장근로 한도까지 포함된 주 52시간을 마치 표준인 것처럼 쓰지 말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날은 경사노위 본회의가 예정되었던 날이다. ‘주 52시간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현행 3개월로 정해진 탄력근로제의 산정 기간을 1년으로 연장하고, 연장·휴일근로 시간을 적립해서 나중에 길게 휴가를 쓰도록 하는 근로시간저축계좌 도입이 핵심 의제에 속해...

    2022.12.26 03:00

  • [지금, 여기] 문제의 교육과정, 재검토가 맞다
    문제의 교육과정, 재검토가 맞다

    지난 14일 국가교육위원회는 2022 개정 교육과정 심의본을 의결했다. 토론을 거쳐야 한다는 일부 위원들의 항의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통과시킨 교육과정의 내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성소수자, 성평등, 성·생식 건강과 권리는 성 건강 및 권리로 수정됐다. 심지어 완전한 성인을 뜻하는 ‘전성(全性)적 존재’라는 용어는 “성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는 항의를 받아 삭제되었다. 9월26일, ‘2022 교육과정, 성평등으로 나아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공청회에서 예상되는 성소수자, 성평등을 지우려는 혐오 앞에 흔들리지 말 것을 요구했다. 공청회 때 온갖 혐오발언이 나오고 폭력사태까지 일어나기도 했지만, 다행히 교육과정 연구진은 기존 시안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결국 교육부였다. 교육부는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고, 성소수자 등의 표현을 삭제한 행정예고안을 발표했다. 그러고는 그보다 더 후퇴된 내용의 심의본을 국가교육위에 상정해 통과시...

    2022.12.19 03:00

  • [지금, 여기] 교권과 학생 인권은 반대말이 아니다
    교권과 학생 인권은 반대말이 아니다

    교원의 학생생활지도 조항을 신설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 통과를 위해 교원단체는 “교단에 드러눕는 학생에게 교사가 손가락도 대지 못할 정도로 교권이 추락했다”며 백방으로 국회에 로비를 했다. 언론도 ‘날개 잃은 교권’ ‘교실 붕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반복하며 비슷한 기사를 열심히 찍어냈다. 그리고 이 법은 전광석화처럼 빠른 속도로 처리되었다. 학생 인권을 보호하면 교권이 침해되는가? 이 물음은 교권과 학생 인권이 서로 대립관계에 있음을 전제로 하며, 이 둘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결책인 양 호도한다. 그러나 교권과 학생 인권은 대립관계가 아니다. 교권은 시민이자 미래인 학생을 잘 교육하기 위해 국가가 교원에게 위임한 권한이기에 당연히 학생의 인권 존중을 기반으로 한다. 교권의 범위 내에 학생에 대한 체벌이나 모욕이 포함되지 않듯이, 학생 인권을 들먹이며 교사에 대한 폭력이나 폭언을 해도 안 된다. 다...

    2022.12.12 03:00

  • [지금, 여기] 왕을 칭찬하던 맹자 마음처럼
    왕을 칭찬하던 맹자 마음처럼

    대학 시절, <맹자>를 배웠다. 물론 자발적 학구열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종의 필수 과목이었다. 열등생이었던 나는 뭔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했다. 특히 맹자와 왕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앞부분 구성 자체가 괴로웠다. 맹자는 융통성 없는 꼬장꼬장한 노인이었던 반면, 왕들은 눈치가 너무 없었다. 첫머리에서 양혜왕은 맹자에게 묻는다. 어르신께서 먼 길 와주셨으니 우리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죠? 보통 사람들은 허허 웃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시느라 수고했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맹자는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하필 이익을 말씀하셨습니까? 오직 어짊과 의로움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고는 의로움이 왜 이익보다 중요한지에 대한 설교가 하염없이 이어진다.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그래도 왕인데?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왕들은 또 눈치 없는 질문을 한다. 현명한 분들도 저처럼 동물을 좋아하시나요? 지금 힘이 좀 있는데 옆 나라들과 한판 붙을까요? 맹자는 ...

    2022.12.05 03:00

  • [지금, 여기] 반복되어서는 안 될 말
    반복되어서는 안 될 말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다. 치과 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TV를 등지고 앉았는데, 맞은 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TV에 집중된 것을 깨달았다. 몸을 돌려보니 화면 속에서 커다란 배가 기울어지며 가라앉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큰 배가?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라고?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빨간 바탕에 커다란 흰색 글자, 탑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속보 자막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아유, 그럼 그렇지. 저 고등학생들, 오늘 저녁에 무용담 자랑 엄청나겠네. 그러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현실을 알게 된 것은 치료를 마치고 지하철로 이동해 일터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8년 전 일이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냥 ‘얼음’이었다. 4주 전 주말 저녁, 바로 이 코너의 글을 쓰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휴대전화에 재난 알림 메시지가 떴다. 코로나19 이후 재난 알림 문자에 둔감해졌지만, 이날은 달랐...

    2022.11.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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