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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 [지금, 여기] 함께 한자를 공부하자
    함께 한자를 공부하자

    나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다. 독자들의 언어를 상상하고 변화를 가늠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무지하다고 탓하는 습관이 내게는 없다. 주어진 원고를 잘 읽히는 한국어로 다듬는 일도 벅차다. 문제는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모호하고 흐릿한 대상이 수천만의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들의 집합이라는 점이다. 교육 수준과 독서량뿐 아니라 출신 지역이나 가족 구성, 심지어 식습관이나 취미 생활에 따라서도 언어는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받은 원고 중 ‘심심한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라는 표현이 있다면, 편집자들은 ‘심심한’을 ‘깊은’으로 고친다. 문맥상 반드시 사과의 마음이 잘 전달되어야 한다면 그편이 낫다.물론 작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에게 ‘심심한’은 ‘깊은’보다 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한국어에서 ‘심심한’은 대체로 ‘깊고 간절한’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삼십년 전 청춘소설 인물들은 ‘심심한’이라는 단...

    2022.09.05 03:00

  • [지금, 여기] 사람 중심의 방역이 필요하다
    사람 중심의 방역이 필요하다

    코로나 위중증 환자 수가 418명을 기록했던 지난 11일,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코로나19위중증피해환자보호자모임이 주최한 ‘위중증 환자 및 사망자 증가 상황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이다. 지난 4월, 거리 두기 조치가 대부분 해제되고 코로나19가 2급 감염병으로 분류되면서 유행이 종식될 것처럼 여겨졌지만, 지금 코로나19 상황은 심각하다. 확진자가 매일 10만명이 넘고 사망자와 위중증 환자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보다 고통이 큰 사람들이 위중증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유가족일 것이다. 이에 시민인권단체들은 7일 격리 해제 후 강제 전원조치, 개인에게 가해지는 치료비 부담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대책을 촉구해왔다. 그럼에도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현장에서 느껴지는 방역대책은 근본적으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정부의 방역을 정치방역으로 규정하며 ‘과학방역’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코로나1...

    2022.08.22 03:00

  • [지금, 여기] 검수완박은 살아 있다
    검수완박은 살아 있다

    법무부는 지난주 검사의 ‘수사 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국회 입법권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법무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검수완박법은 그대로 살아 있으며, 그 시행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법무부 발표의 골자는 두 가지이다. 기존에 장황하고 복잡했던 검사의 수사 개시 범죄 범위를 간명하고 이해하기 쉽게 고침으로써 국민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한다는 것과, 경찰에서 송치한 사건에 대하여 검찰이 직접 관련성이 있는 범위에서 적극 수사하여 범죄자를 잘 기소하라는 것이다. 입법권 무력화가 아니라 잘못된 입법 정상화이다.왜 검경수사권조정은 잘못된 입법인가. 정치적 계산으로 국민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히는 내용으로 입법되었기 때문이다. 2019년 민주당이 패스트트랙으로 검경수사권조정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키면서, 문재인 정부 초반 입법 방향과 크게 달라진 법안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원안은 검찰...

    2022.08.15 03:00

  • [지금, 여기] 목이 곧은 이들의 슬픔
    목이 곧은 이들의 슬픔

    초여름부터 합천을 다녔다. 깨진 그릇 조각과 녹아내린 유리조각, 낡고 오래된 통장과 문서 같은 것들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땅거미가 드리워진 산자락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난 길을 차로 한참 달려 들어가다 보면, 합천과 해인사가 놓인 지형을 ‘지극히 깊다’고 표현하던 건축사학자 전봉희 교수의 명료한 설명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옛날에는 영남 서부 내륙의 한복판에 자리한 합천 땅에 다다르기 위해 거친 산자락과 굽이치는 물줄기를 겹겹이 지나야 했을 것이다. 물론 특정한 지역을 ‘멀다’거나 ‘깊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충분히 신중해야만 한다. 이 말은 서울이나 대도시를 ‘가까운’ 곳으로, 지역을 ‘먼’ 곳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쪽과 서쪽은 험준한 소백산맥으로, 동쪽은 영남의 수많은 지류가 합류하는 낙동강으로, 남쪽으로는 지리산에서 출발해 해안을 따라 솟아난 산들로 둘러싸인 이 지역을 설명하는 데 마땅한 다른 표현이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2022.08.08 03:00

  • [지금, 여기] 더 많은 정치방역이 필요하다
    더 많은 정치방역이 필요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에 오르기에는 좀 모자란 감이 있지만, 어쨌든 현재 대한민국 최고 미스터리 중 하나를 꼽자면 단연 ‘과학방역’이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그 실체를 본 사람도, 알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주로 ‘정치방역’에 대비되어 쓰이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정치란 당파적·음모론적·비과학적인 것이고, 그에 비해 과학은 불편부당·객관적·합리적이며 진리에 더 가까운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과학과 전문가는 코로나19에 대응할 수 있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 정치가 자꾸 끼어들어 ‘오답’을 제출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대목은 과학방역을 주창하는 이들이 주로 정치인, 즉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토록 겸손한 태도를 가진 이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겸양지덕도 과유불급. 전문가는 세상만사 만물박사라서 전문가가 아니라, 자신의 분야를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인 것이다. 전문...

    2022.08.01 03:00

  • [지금, 여기] 타투, 범죄화가 답이 아니다
    타투, 범죄화가 답이 아니다

    지난 21일 헌법재판소는 의료인이 아니고는 타투시술(문신시술)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이를 처벌하는 의료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지난 3월 합헌 결정을 내린 것과 동일한 결론이다. 4개월의 간격을 두고 이어진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여전히 국내의 수많은 타투이스트는 범죄화의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비의료인의 타투시술이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것은 1992년 대법원 판결에 근거해서이다. 당시 대법원은 타투시술이 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본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며, “문신시술 행위가 의사의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으로써 시행되지 아니하면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일반 공중위생에 밀접하고 중대한 위험이 발생할 염려가 있는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판시하였다.그렇게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3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와 같이 타투시술을 의료인만 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

    2022.07.25 03:00

  • [지금, 여기] 우영우라는 사람
    우영우라는 사람

    며칠 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어느 신문사의 기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며 대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시청하는지 물어왔다. 드라마에 대한 의견을 말해달라는 요청이었으나, 스스로 드라마를 평론할 깜냥이 못 되는 것을 잘 알기에 왜 그런 요청을 하는 건지 되물었다. “아무래도 장애인이시니까 좀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안타깝게도 질문자는 그 드라마를 잘못 보고 있었다. 사람은 그 존재 안에 수많은 다양성을 안고 살아간다. 드라마 속의 우영우도 나도 그러하다. 그런데 장애인은 종종 그 사람 안의 다양한 특성이 ‘장애’라는 한 단어로 납작해지는 경험을 한다. 장애는 질병과 다르기에 앓는 것도 아니며 단지 한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이렇게 장애라는 개념만으로 존재가 납작해지면 세상은 그 사람의 노력이나 성취 역시 장애라는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하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니 거의 필연적으로 지겨운 장애 ‘극복’ 서사가 뒤따라오...

    2022.07.18 03:00

  • [지금, 여기] 어둡고 흐릿한 이의 존경심
    어둡고 흐릿한 이의 존경심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면서 갖게 된 확신이 있다. 죽도록 노력하더라도 나는 어느 한계 이상의 글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얄팍한 공부나 흐릿한 판단력 때문만은 아니다. 전자는 계통적이고 성실한 독서와 배움으로, 후자는 눈 밝은 동료들과의 문답으로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 시간과 노력이 꽤 필요하겠지만. 에둘러 말할 생각은 없다. ‘서울 출신의 고학력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년 남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솔직히 저 비릿한 단어들 중 몇 개는 이미 반쯤 부서진 이빨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듯이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소수자성을 찾아내 들이밀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하다.물론 글쓰기가 자신을 배신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믿는다. 질 들뢰즈는 <대담>에서 이렇게 썼다. “자신이 속한 체제, 자신의 성, 자신의 계급, 자신이 속한 다수를 배반하기 - 글을 쓰는 데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 그리고 글쓰기를 배반하기.”...

    2022.07.11 03:00

  • [지금, 여기] 공리주의 수난시대
    공리주의 수난시대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의 악당 타노스는 독특한 존재였다. 그전까지 영화 속 악당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인자가 되겠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히거나 파괴적 복수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반면 타노스는 자신의 영광이나 복수, 눈먼 파괴욕이 아니라 전체 우주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악당이었다. 자원은 점차 줄어드는데 이렇게 인구가 늘어간다면 모두 고통스러운 삶을 맞이하리라. 그는 고심 끝에 우주 인구의 절반을 랜덤하고 공평하게, 순식간에 날려버린다. 그는 대업을 이룬 후에도 왕관을 쓰고 권력을 휘두르기는커녕, 귀촌하여 텃밭을 가꾸며 자연인으로 살아간다. 과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만을 묵묵히 추구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자의 풍모였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이제 생존자들은 더욱 풍요로운 환경에서 ‘복리가 증진된’ 삶을 살아가야 했지만, 웬걸 온 우주는 슬픔과 허무에 휩싸인다. 영화 속 악당 캐릭터 묘사에나 쓰일 줄 알았던 일차원적 공리주의 주장을 현실에서 마주치...

    2022.07.04 03:00

  • [지금, 여기] 차별 없는 광장을 열어라
    차별 없는 광장을 열어라

    지난 5월 서울시는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낸 서울광장 사용 신청에 대해 열린광장시민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수리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미 2019년 서울시 인권위원회가 퀴어문화축제에 대해서만 심의를 거치도록 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판단했음에도 또다시 발생한 수리 지연이었다. 그리고 지난 15일 위원회는 신체 과다 노출과 유해 음란물 판매를 하지 않는 ‘조건부’로 광장 사용을 수리하기로 결정했다. 어찌되었든 광장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문제없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서울광장은 ‘허가제’로 운영되던 것을 주민들의 힘으로 누구나 이용 가능한 ‘신고제’로 바꾸어낸 곳이다. 그럼에도 특정 집회의 내용을 판단해 광장 사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위헌적 발상이다. 무엇보다 퀴어문화축제에 노출과 음란의 꼬리표가 붙으며 성소수자 혐오가 확산되어 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위원회의 결정은 광장 사용에 있어 차별을 금지한 헌법과 법령에도 반한다 할 것이다....

    2022.06.2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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