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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 [지금, 여기]존재의 소멸을 가져오는 빛
    존재의 소멸을 가져오는 빛

    1940년대 미국에서 발표된 ‘빈티지 시즌(vintage season)’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5월 어느 날 주인공 집에 지나치게 세련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방인들이 찾아와 한동안 집을 빌려 머물기로 계약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이방인이 찾아와 시가의 3배 가격을 제시하며 당장 이 집을 사겠다고 한다. 5월 말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많은 방문객이 이곳을 찾아든다. 나중에 밝혀진 이들의 정체는, 최적의 시기에 최고의 스폿에서 역사적 스펙터클을 즐기려고 옮겨 다니는 시간여행자 관광객들이었다. 지금 이곳에 몰려든 것도 임박한 재난을 앞두고 가장 구경하기 좋은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운석이 근처 마을에 떨어지고 이 집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타오르며 폐허가 된다. 잔혹한 대장관을 감상한 이들은 이제 화려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9세기 샤를마뉴 황제의 대관식을 구경하러 다시 길을 떠난다.오래전에 읽었던 이 소설을 떠올린 것은 지난 한 ...

    2024.12.29 21:11

  • [지금, 여기]12·3과 대통령기록물 폐기 금지
    12·3과 대통령기록물 폐기 금지

    모든 증거는 기록에서 시작되고 기록의 해석은 역사를 만들어 낸다. ‘12·3 내란 사태’ 이후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우리 사회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다. 이 사태의 해결은 관련 기록물을 모으고, 폐기 금지를 선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란 사태의 주요 장소가 대통령실과 국방부 등 외부 접근이 제한적인 곳이어서 기록물 멸실이 걱정된다.계엄법 2조 5항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거나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한다. 국무회의는 회의 명칭, 일시, 장소, 상정 안건, 참석자 현황, 주요 발언 등에 대해 기록한 후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 게시한다.지난 13일 고기동 행안부 차관은 국회에서 “국무회의 실체와 형식과 절차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회의록은 없다”고 답변했다. 계엄의 절차적 불법성을 인정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식 회의를 대신해 국무위원에게 각종 조치사항을 담은 문건을 전달했다고 알려졌다.이는 내란 사태의...

    2024.12.22 20:48

  • [지금, 여기]인권이 무시되는 만행을 막기 위해
    인권이 무시되는 만행을 막기 위해

    지난 12월10일은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76년이 되는 날이었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것은 두 차례의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등을 겪으며 인권이야말로 이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장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언문의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격분시키는 만행을 초래하였다.”그리고 세계인권선언일로부터 일주일 전 시민들은 또 다른 만행을 목격했다. 바로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비상계엄 선포와 그 후 나온 계엄사령부 포고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준수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내용도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담고 있었다.포고령 1호가 전면 금지한 것이 정치적 집회·결사의 자유였는데, 계엄군을 막고 계엄 해제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의 집회였다는 것은 의미 깊다. 모이고 말하며 이를 통해 정치를 만들어나가는 것, ...

    2024.12.15 20:41

  • 그래도 국회는 ‘민생’을 저버리지 말라

    계엄이라는 블랙홀에 온 정국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연일 새로 밝혀지는 구체적인 12월3일 밤의 상황을 보면, 천만다행으로 유혈사태는 없었으나, 도저히 2024년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시도되고 실행되었다. 어찌 이러한 참담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배경을 샅샅이 밝히는 것은 물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헌법과 법률에 따른 조치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만 있다면 윤석열 대통령에게 왜 이런 일을 하필 12월 초에 벌였는가 따져 묻고 싶다. 물론 1년 중 그 어느 때라도 발생해서는 안 되는 반헌법적인 일임은 분명하나, 특히 12월이 서민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시절인지 대통령은 정녕 몰랐을까.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 춥고 힘들어지는 시기이자, 국회와 정부가 올해 묵은 일들을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앞두고 많은 일을 처리하는 달이다. 그럼에도 난데없는 비상계엄으로 정부와 국회가 마비 상태에 빠져버렸다.일단, 새해 예산이 문제다. 대한민...

    2024.12.08 20:26

  • [지금, 여기]지게 공동 구매를 제안하며
    지게 공동 구매를 제안하며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며 새로운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했다. 역사를 정권 입맛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학계와 시민사회의 비판이 거셌다. 사안의 중대성과 별개로 당시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작은 뉴스가 하나 있었다. 은퇴한 노교수가 국정 역사교과서의 대표 필진으로 초빙된 사실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대거 몰려와 그를 만류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예정된 기자회견에 불참하기까지 했다. 그의 정치색이나 학문적 역량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스승의 잘못된 결정을 말리기 위해 모여든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흥미로웠다. 그동안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장면 아닌가. 결국 성추문 때문에 사퇴하는 어이없는 결말을 맞기는 했지만, 공적 활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저런 종류의 ‘안전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우리는 온갖 이상한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과거를 뒤집는 갈지(之)자 행보를 서슴지 않는 정...

    2024.12.01 20:37

  • [지금, 여기]대구대 사회학과를 추모하며!
    대구대 사회학과를 추모하며!

    시민활동가로 살다 보면, 사회학과 전공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들은 시민단체 등과 각종 활동을 함께하며 성과를 논문으로 정리해 주는 일이 많다. 김동춘, 신진욱, 조희연, 이나영 교수 등은 평생 활동가들과 함께 운동하고, 가족처럼 지냈던 사회학과 학자들이다.대학에서도 사회학과는 특별한 곳이다. 학생운동을 조직하고, 연대하는 일을 기획하고 직접 실행한다. 특히 학생운동의 역사가 끊어진 지역대학에서 이들의 존재는 더욱 소중하다. 대학생 대다수가 자신의 취업에 매달린 채 4년을 보내지만, 사회학과 학생들은 대학과 지역의 미래를 고민하는 측면이 강하다.나는 대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동기들이 대부분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증을 공부할 때 시민활동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자연스레 사회적 문제를 공부했고, 각종 잡지나 언론에 나의 고민을 담은 글을 보냈다. 과 동기들과 많은 토론을 하고 싶었으나 한가해 보이는 얘기에 관심을 두는 친구들은 없었다....

    2024.11.24 21:50

  • [지금 여기]11월20일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11월20일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독일 성별 스스로 결정… 한 달간 1만5000명 신청.” 최근 나온 기사들의 헤드라인이다. 독일에서 어떠한 조건도 없이 등기소에 신고만 하면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성별자기결정법이 통과되었다는 내용이다. 기사는 이러한 법률이 성범죄자에 의해 악용되어 여성, 청소년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고 스포츠의 공정성도 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얼핏 건조하게 다양한 입장들을 전하는 기사 같지만 핵심은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어떻게 독일이 이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독일은 이 사안에 있어 후발주자이다. 2012년 전 세계 최초로 성별자기결정법을 만든 나라는 아르헨티나이다. 그 후 현재까지 덴마크, 아일랜드, 콜롬비아, 우루과이 등 전 세계 20여개국에서 어떠한 조건도 없이 성별을 변경할 수 있다.이들 20여개국의 인구수를 고려하면 12년간 아마 수백만명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성별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로 인해 세상이 더 위험해졌다는...

    2024.11.17 21:28

  • [지금, 여기]‘소수자 위한 정치’가 절실한 급변기
    ‘소수자 위한 정치’가 절실한 급변기

    다짜고짜 신경질적인 상담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계속 통화를 이어가야 하나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왜 그리 화가 났는지 물어보고 싶은 궁금함이 그 망설임보다 더 크기 때문에 숨을 고르고 들어본다. 그중에는 발달장애인인 자식을 살해하고 바로 이어 자신도 자살하기로 결심한 후 실행하기 직전 걸어온 전화도 있었다. 굽이굽이 굴곡진 그의 인생사를 들으면서 영문도 모른 채 보호자로부터 살해당할 뻔한 중증 발달장애인 자식 생각에 눈물이 났다. 긴 통화로 그의 잘못된 결심을 간곡히 달랜 후, 얼른 긴급 복지지원 체계를 연결해 비극을 막았다.며칠 전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의 세월 동안 발생했던 부모의 ‘살해 후 자살’ 사건 102개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가 공개되었다. 부모의 정신질환, 경제적 곤란, 부부 불화가 복합적인 원인이었으며, 목숨을 잃은 아동 중 73.5%가 9세 이하 어린아이였다. 이 아이들이 곧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 것을 예상했거나 동의했을 리 만무하다. 가장 많은...

    2024.11.10 20:38

  • [지금, 여기]전태일에게 진 빚 갚기
    전태일에게 진 빚 갚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이였고, 그동안 봐왔던 것은 앳된 청년 시절의 사진뿐이다. 그래서 그가 1948년생이고, 살아 있다면 이제 곧 팔순을 바라볼 나이라는 사실이 도통 믿기지 않는다. 1970년 11월13일의 세상과는 그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1970년만 해도 일하는 사람 중에서 농림수산업 종사자 비율이 50%에 달했다. 지금은 그 비중이 5%가 채 안 된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산업사회로 바뀌었다. 노동자 규모가 크게 늘어났을 뿐 아니라 1970년대 통계분류에는 없었던, 예컨대 ‘정보통신업’ ‘과학기술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같은 산업군, 새로운 업무가 생겨났다.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제도도 달라졌다. 전태일 생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근로기준법을 통해 노동환경을 규제했지만,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있는지도, 정해진 법정근로시간이란 것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장시간 노동을 했다.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고 나서 잠...

    2024.11.03 21:34

  • [지금,여기]교육감 선거 참관인으로 참여해보니
    교육감 선거 참관인으로 참여해보니

    평소 건강을 자신하던 사람이 암 진단을 받는 순간, 충격과 불안이 시작되면서 부정하는 단계로 이어진다고 한다. 진단 결과를 믿지 못하고, 다른 병원을 찾아다니며 다시 확인하게 된다. 선거 결과도 본인이 원하는 후보자가 당선되지 않으면 부정하는 단계가 생긴다. 선거철마다 일부 세력들에 의해 벌어지는 부정선거 의혹은 열렬한 지지자일수록 잦은 편이다.30년 동안 선거에 참여했지만, 선거 과정을 관찰할 기회는 없었다. 시민활동가로 일하면서 선거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 늘 아쉬웠다. 얼마 전 지인이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 투표참관인을 해보라는 추천을 했다. 묘한 호기심으로 참관인 신청을 했다. 며칠 뒤, 10월16일 낮 12시30분까지 잠실의 한 투표장으로 출석하라는 안내 문자가 왔다.투표 당일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후, 간단한 안내와 설명 자료를 받았다. 정근식 후보자 투표참관인 자리를 안내받았다. 이곳은 대단지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투표장소다. 투표참관인은 총...

    2024.10.2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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