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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 [지금, 여기] ‘해물찜’ 같은 출판은 없을까
    ‘해물찜’ 같은 출판은 없을까

    서점 한복판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10여년 전이었고, 서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며 집중적인 주목을 받던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였다. 예쁜 사진책도 사고 멋진 서점 구경도 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떠난 일본 도쿄 여행의 첫날, 나는 한숨을 쉬며 쓰타야의 매장 한가운데를 맴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쓰타야는 멋진 서점이다. 공간의 배치와 서가의 구성, 책의 선별, 다른 라이프스타일 상품과 책을 함께 배치하는 솜씨가 모두 놀라웠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한 것은 공간의 규모에 비해 책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대형 서점의 10분의 1이나 될까. 서가에 있는 책들 상당수는 책등이 아니라 표지를 앞으로 한 채, 우산이나 가방, 문구류 등과 함께 놓여 있었다.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는 특강에서 출판사와 대형 서점이 일종의 맹약을 맺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출판사가 책을 출간하면, 서점은 이를 매장에 입고한다. 이것은 꽤 중요하다. 판매 금액을 추후...

    2023.10.22 20:24

  • [지금, 여기] ‘시기상조’ 뒤에 사람 있어요
    ‘시기상조’ 뒤에 사람 있어요

    빠른 시일 내에 법률이 제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으로 논문을 끝맺었다. 2003년 ‘노동자의 죽음은 기업의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기업살인법 운동’의 진화를 분석한 논문이었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거치면서 기업에 책임을 묻는 사회적 요구가 거셌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제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진보적 정당 정치가 허약하다는 것이 당시 우리 연구팀의 진단이었다. 영국과 캐나다에서 노동 친화적 정당이 희생자 단체, 노동조합과 함께 입법에 나섰던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이를 기대하기 어려워보였다. 2017년, 고 노회찬 의원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했지만, 논의도 못해보고 폐기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우리 논문이 출판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대법)이 통과되었다. 개혁을 갈망하는 노동-시민 연대가 국회를 움직였고, 이는 연구자의 소심한 예측을 뛰어넘는 것이었다.이 법은 사업주가 ...

    2023.10.15 20:26

  • [지금, 여기] 10·29의 기억과 안전의 길
    10·29의 기억과 안전의 길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올라오면 수많은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밀톤호텔 옆 골목 앞에는 포스트잇이 놓인 작은 책상이 마련돼 있고, 지나가는 시민들은 각자의 마음을 담아 메시지를 남긴다. 때로는 음식이나 음료수, 꽃 등을 놓고 가기도 한다. 어느덧 1주기가 다가오는 10·29 이태원 참사 현장은 추모와 애도의 마음들로 채워지고 있다.포스트잇에 적힌 많은 메시지는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것들이다. 그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내용이 ‘미안하다’는 것이다. 이태원 지역 주민, 참사 당일 현장 인근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몰랐던 것에 대해 남긴 미안함, 너무 늦게 현장을 찾아온 희생자의 지인이 남긴 미안함 등이 그러하다. 당일 현장에서 희생자와 함께 있었던 생존자, 구조자가 더 많은 이를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적은 글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한편으로 한 명의 시민으로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메시지도 많이 있다. 세월호 참사를...

    2023.10.08 20:36

  • [지금, 여기] 보호출산제로 태어나는 아기에게
    보호출산제로 태어나는 아기에게

    세상에 와 줘서 고맙구나. 배 속에서 세상은 어떤 곳일까 설레며 열심히 자라났을 네가 대견하고 고마워. 힘들게 세상에 왔는데 왜 너를 반겨주는 엄마와 아빠가 없는지 의아하고 불안할 수 있겠지. 지금부터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차분히 설명해주려고 해. 마음이 아픈 이야기지만 한 번은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라서. 너도 알겠지만 모든 아이는 부모가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고, 친생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날 권리가 있어. 부득이하게 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연락할 권리도 있단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에서 이 권리들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뿌리를 안다는 것이 한 사람의 전체 인생을 지탱하는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야. 네가 태어난 이 대한민국은 30년 전에 이미 아동권리협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네게 이런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그런데 네가 태어나기 몇년 전부터 사람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도 낳지 않는 문제로 나라 전체가 큰 고민에 빠지...

    2023.09.24 20:20

  • [지금, 여기] 김태흠 지사의 책 추천을 기대하며
    김태흠 지사의 책 추천을 기대하며

    김태흠 충남지사를 좋아한다. 내가 출판 자영업자이기 때문이다. 김 지사는 민주주의와 기후변화에 관한 좋은 책을 거듭 추천하는 드문 정치인이다. 예를 들어 지난달 그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소개한 여름휴가에 읽을 책 3권 중에는 마이클 샌델의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가 포함돼 있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소비자’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되기 위해 모든 이가 자신의 생활 방식과 윤리적 가치를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는 책을 추천하는 유력 정치인에 큰 감명을 받았다.그는 몇년 전에도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책을 추천한 바 있다. 2020년 7월22일, 당시 야당 의원이던 김태흠은 특유의 이글이글한 눈으로 총리와 장관 등에게 여당 소속 선출직 지자체장들의 성폭력 문제를 놓고 사납게 질타했다. 정치인들의 ‘선별적 젠더 감수성’을 비판하며 피해자 보호를 주장하는 그의 말은 단호하고 시원시원했다. 더 많은 의원이 피해자 편을 들어준다...

    2023.09.17 20:26

  • [지금, 여기] 생로병사 해탈한 존재, 그의 이름은
    생로병사 해탈한 존재, 그의 이름은

    올해 합계출산율이 0.7명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항상 핵심을 벗어나는 정책만 내놓던 정부가 이번에는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자녀 돌봄의 부담을 낮춰서 출산을 유도하려 해도 가사도우미를 구하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니, 이주노동자를 데려와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하고 월 급여를 100만원 이내로 한다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법안은 철회되었지만 사업 자체는 시행된다. 지난 1일 국무조정실은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추진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송출 국가와의 협의를 거쳐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100명 규모로 시작할 예정이다. 사업체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여 서비스 신청 가구로 파견하는 방식이라 안타깝게도(!) 최저임금제도나 근로기준법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원래의 목표, 즉 ‘저렴한 비용’이 빛을 잃을까 우려한 정부는 시간당 1만5000원 내외인 현재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서비스가 제공되도록 ...

    2023.09.10 20:35

  • [지금, 여기] 기재돼야 할 다양한 가족의 진실
    기재돼야 할 다양한 가족의 진실

    지난해 11월24일 대법원은 11년 만에 판례를 변경해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도 성별 정정을 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다만 대법원의 결정 이전에도 하급심에서는 몇 차례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을 허가한 사례는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트랜스젠더인 부모가 성별 정정을 한 경우에 법적 관계는 어떻게 될까. 자녀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이렇게 표시된다. 성별 여성, 관계 부 또는 성별 남성, 관계 모. 부모의 성별은 바뀌지만 부모로서의 관계는 안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는 현재 ‘남성인 어머니’와 ‘여성인 아버지’들이 존재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여성 부모가 탄생했다. 지난 8월30일 딸 ‘라니(태명)’를 낳은 김규진·김세연 부부이다. 둘은 2019년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했고, 같은 해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해 12월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다. 출산을 앞두고 이루어진 베이비샤워 이...

    2023.09.03 20:29

  • [지금, 여기] 교육부의 엉성한 데칼코마니
    교육부의 엉성한 데칼코마니

    지난주 교육부는 ‘교권 회복 및 보호 강화 종합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4월 발표된 학교폭력 종합대책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학교가 아닌 교육청에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를 열어 재판하듯 결정을 내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이 정책은, 학교폭력 조치 사항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하는 정책과 만나 학교폭력 소송 전면전의 시대를 열었다. 이번 교권 회복 종합방안도 마찬가지이다. 교사의 요청만으로 쉽게 열리는 교권보호위원회는 학교가 아닌 교육청에 설치되며, 학교 내부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외부인들이 위원으로 들어온다. 이 위원회가 내리는 학생에 대한 조치 사항은 생활기록부에 기재된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소송이 남발되기 쉬운데, 여기에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까지 더해지면서 남소의 가능성은 더 높아지게 되었다. 왜일까?고시는 법적 효력을 전제로 하기에 필연적으로 세세한 법적 해석이 필요하다. 교육부도 조만간 생활지도고시에서...

    2023.08.27 20:22

  • [지금, 여기] 사랑하지 않고 노동할 수 있기를
    사랑하지 않고 노동할 수 있기를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저마다의 출판 노동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꾸린다. 지나친 호기심과 부족한 자제력 때문에 영 두서없는 일들을 하며 살아온 편이지만, 나 역시 책을 만들며 밥벌이를 해온 시간이 가장 길었다. 대부분 그렇듯 첫 직장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서른 살이 조금 넘어서 입사한 출판사는 두꺼운 학술서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는 내가 완전히 ‘초짜’였다는 것이고, 큰 문제는 어쩌다 편집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나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탁월한 이들도 많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햇병아리 팀장은 나이 많은 팀원들의 교정지를 흘끗거리며 책 만드는 일을 배웠다.그때의 동료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물론 멍청하고 서투른 팀장에게 종종 짜증도 냈지만,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책 만드는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번은 초대형 사고를 치고 멍하게 앉아 있던 내게 당시의 나이 든 팀원...

    2023.08.20 20:42

  • [지금, 여기] 유급 병가,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유급 병가,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3년 반 전. 지금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코로나19 유행 초기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회사나 학교, 심지어 방문했던 식당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에 머물렀다. 회사에서도 눈치는 줄지언정 출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확진이 되면 입원·격리 기간 동안 정부가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고, 직원에게 유급휴가를 제공한 사업주에게도 일부 비용을 지원했다. 이내 ‘아프면 3~4일 집에 머물기’는 정부의 5대 생활 방역수칙 중 하나가 되었다. 의심 증상이 있지만 노동자들이 쉽사리 일을 중단할 수 없거나 작업장 내 방역 조치가 미흡했던 콜센터, 물류센터 등에서 유행이 시작되어 지역사회로 급속히 확산되자, 병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누려보지 못한 ‘호사’였다.하지만 지난 6월1일부터 코로나19 감염과 관련한 격리 ‘의무’가 사라지고, 5일 격리 ‘권고’ 조치가 시행되면서 일터의 시계는 빠르게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

    2023.08.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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