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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오늘
검지 손가락 첫마디가 잘려 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꽃이 떨어진다. 이병국(1980~)오래전 젊은 시인의 등단작을 다시 꺼내 본다. 여전히 “가난한 오늘”이다. 청년들은 전세사기로, 직장을 잃은 중년들은 자영업을 하다가 폐업으로, 노인들은 줄어든 복지 예산으로 더 차가워진 장판 바닥 위에서 하루를 연명한다. 빌라들은 깡통이 되었고, 거리마다 텅 빈 상점에는 ‘임대’ 현수막이 더 이상 뜯기지 않으려... -
히말라야 해국(海菊)
모든 꽃이 질 즈음 해국이 핀다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위태로운 꽃 위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채샌들을 신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르는어린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깜박일 때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는눈 덮인 마당을 절룩절룩 걸어 다니며아내가 숨긴 술병을 찾고 있지몹쓸 산기슭이나 대물림한 병든아비가 술잔에 눈물을 부딪칠 때가파른 계곡을 겨우 올라가는 어린 눈망울과몇 번이나 기워 신은 해진 샌들 사이갈라진 뒤꿈치가 딛고 가는 발자국처럼그늘진 비탈에서 비탈로 해국이 번지는 동안벗어날 수도 없는 생을 껴안은 세상 속으로속수무책 비가 내리네 눈이 내리네김명기 (1969~)가을인데 여름이 쉽게 가지 않았다. 한차례 비가 내리자 기다리던 가을이 되었다. “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 아직... -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1917~1945)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에 윤동주의 이름은 단연 빛나고 오롯하다. 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시인은 ‘세상은 온통 환... -
하여간, 어디에선가
안녕,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박승민(1964~)“안녕,”이라고 시작하는 이 시는 “지구인”으로는 마지막 인사지만 전혀 슬프지 않다. 죽음의 문턱에 선 자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안부 같기도 하다. 시인에게 “죽는다”라는 단어는 “... -
빌라에 산다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기차표 옆에서 운동화처럼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햇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데 주제넘게도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그런데, 어머니는 왜서 자꾸 어디니이껴 하고 물을까 안현미(1972~)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시멘트로 사방에 벽을 친 회색 빌라에 모여 혼자인 듯 함께 산다. 옆집, 앞집, 윗집, 아랫집이 내는 왁자한 기척이나 비명들을 함께 들으며 “숨죽이며” 산다. 커다란 울음통... -
돌이 천둥이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사람을 뒤덮고소원을 뒤덮고울분을 뒤덮고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병을 고치는 사람들.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엄마, 하고 부르면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아주 오래전돌로 하늘을 내리치면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울 곳이 없어돌 속으로 들어왔다.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이재훈(1972~)돌이 있었다. 돌돌돌 구르는 돌은 우리 이전에도 있었고, 우리 이후에도 비바람과 파도 속에서 계속 태어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슬픈 짐승’이 되어 주머니 속에 돌멩이 하나씩 숨기고 산다. 세상을 향해 던져질 돌멩이는 조금씩 자라고 있다. 시인은 돌에서 천둥소리를 듣는다. “아득히 높은 곳”... -
마을
자연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라는 당신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정적에 묻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얼마나 무거운 게 자연인지 안다.나일강 반사된 햇빛에 마르면서도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스핑크스처럼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깊은 우수로 덮쳐온다.들러붙은 정적에는 자연 또한 포로이다.자연은 아름답다,라는지나가는 여행자 감상은 젖혀두어야 한다.거기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던 사람과거기 아니면 이어갈 수 없는 목숨 사이에서자연은 항상 다채롭고 말이 없다. 떠들썩한 날들을 살아본 사람이라면안다 정적의 끝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왜 도마뱀은 일직선으로 벽을 오르고왜 매미는 천년의 이명(耳鳴)을 울리는지도,모두들 떠난 마을이제 정적이 어둠보다 깊다.김시종(1929~)유령처럼 멀고 험한 땅을 배회하는 영혼들이 있다. 디아스포라를 사는 경계에 선 사람들, 조국을 등지고 떠돌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우리의 오래된 얼굴들이다... -
위험구간
사랑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못한 마음엔불현듯,이라는 구간이 있다장마 한복판 사거리 이정표 아래서나산마루 노을 질 때 걸리는 붉은 신호등횡단보도를 지운 폭설 앞에서 함부로 펼쳐지는 사랑의 구간어쩌면,이라는 비보호 좌회전성급히 지나온 과속방지턱멈칫거린 황색 경고등이나그럼에도,라는 가로수불안을 단속하는 구간 속도 측정 카메라와부디,라는 유턴 표지판어쩌자고 우리가 만났나 싶다가어쩌자고 우리가 헤어졌나 싶다가다시 페달을 밟는 초록 신호등사랑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못한 마음엔작살나고도 정신 못 차린박살 내고도 지우지 못한위험 구간이 있다권선희(1965~)당신은 늘 달린다. 앉아서도 달리고, 자면서도 달린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달린다. 멈출 수 없어서 매일 달린다. 위험한 구간에 이르면 이탈하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 달린다. 오로지 달리기 위해서 달리는 사람처럼.당신은 ... -
탑동
누군 깨진 불빛을 가방에 넣고누군 젖은 노래를 호주머니에 넣어여기 방파제에 앉아 있으면 안 돼십 년도 훌쩍 지나버리거든그것을 누군 음악이라 부르고그것을 누군 수평선이라 불러탑동에선 늘 여름밤 같아통통거리는 농구공 소리자전거 바퀴에 묻어방파제 끝까지 달리면한 세기가 물빛에 번지는 계절이지우리가 사는 동안은 여름이잖아이 열기가 다 식기 전에 말이야밤마다 한 걸음씩 바다와 가까워진다니까와, 벌써 노래가 끝났어신한은행은 언제 옮긴 거야현택훈(1974~)시인은 제주에 살면서 제주어로 시를 쓴다. 시인이 쓴 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탑동 방파제 앞에 다다르게 된다. 오래전 탑동은 너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지던 곳.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아이들은 보말과 깅이를 잡던 곳. 먹돌들이 구르다가 물처럼 울던 곳이었다. 어느새 먹돌들은 바다와 함께 사라져 광장이 되었고, 위험한 파도가 넘실대던 곳에는 건물들이 고속 엘... -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다 무덤으로 향한다. 뚜렷한 희망과 두려움 없이마지막 남은 힘을 다 쓰고 나면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만나겠지.그리고 자신에게 묻겠지.하필이면 멀고 험한 길을 택해서왜 모르는 곳을 향해 외롭게 걸었을까?그리고 왜 온 힘을 들여그렇게도 급하게 걸어 왔을까?조용히 기어가는 지렁이도 무덤 바로 앞에서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막심 박다노비치(1891~1917) 우리 앞에는 언제나 여러 갈래 길이 있었고, 수많은 별이 안개에 젖은 길들을 밝혀 주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거나 갈라지면서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처럼 살기 위해 언제나 열심히 살았다. 언제부턴가 ‘열심’이라는 말이 우리 대신 살기 시작했다. ‘진심’이라는 말이 우리 대신 바빴다. 벨라루스의 시인 막심 박다노비치의 이 시는, 얼핏 노년에 깨달은 인생의 허무나 달관으로 읽히지만, 시인의 생애를 알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