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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엄마가 새끼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부두도 눈이 부어 있다맹골수도 바람은 세고바다는 하염없이 끌려간다바람도 바다도 제 존재를 괴로워한다사람들은 영혼을 말하고오래된 눈물을 흘리고 있다나부끼는 리본들은하늘에 있는 것 같다말은 살아남은 자처럼말이 없다모든 비유가 열리고 닫힌다초록이 너무 푸르다 임선기(1968~)십 년 전, 4월16일 인천에서 떠난 ‘세월호’는 뒤집힌 채로 차가운 맹골수도에 떠 있다.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과 보내지 못하는 유가족의 마음속에 아직도 기울어진 채로 떠 있는 배. 시인은 팽목항에서 그들의 눈물을 대신 받아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모습은 어미들이 새끼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 아닐까. 그 거룩한 밥을 줄 “새끼”를 잃어버린 “엄마”의 슬픔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우리는 온전히 그 심연으로 내려갈 수 없다. 자식을 잃은 엄마처럼 “부두도 눈이 부어 있다” “바람도 바다... -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가령 이런 것콩나물시루 지나는 물줄기 ― 붙잡으려는 ―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물줄기 지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 ―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다시 가령 이런 것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물 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 ―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낭창하게 가늘은 목선의 짠함짠해서 자꾸 놓치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물줄기 지나간다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 편다아 ― 너를 붙잡고 싶어 요동치는여리디여린 콩나물 몸속의 역동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 김선우(1970~) 콩나물에게는 “콩나물의 시간”이 있다. 시루 안에 빼곡하게 서서 물줄기를 기다리는 콩나물들의 싱싱한 생명력은 비좁은 집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 ... -
검은 돌에 새겨진 子, 혹은 女
살아 있었다면큰형님뻘이었을큰누님뻘이었을아무개의 子, 혹은 女라고만 새겨진 위패 앞에서겨울바람에 떨어져 누운동백의 흰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져까마귀 모른 제삿날에도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애써 잊혀진 목숨들거친오름의 그림자를 밀어낸 양지바른 터에복수초 노란 빛깔보다 선연한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었습니다이 섬에 피는 꽃과 바람들곶자왈 숨골로 스미는 비와 태풍들저 이름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종형(1956~)4월이 오면, 붉은 동백꽃이 떠오른다. 동백꽃은 제주도 4·3을 상징한다. 동백꽃은 겨울에 피는데, 질 때는 통꽃으로 툭, 떨어진다. “동백꽃의 흰 눈동자”는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진 사람들의 표상. 오랜 시간 4·3은 금기어였... -
아 에 이 오 우
외할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미친 너는 아침을 먹었다아침을 먹다 말고 여전히 미쳐서 설탕 단지를 마루로 내던졌다마루에 찐득거리는 별가루처럼 쏟아진 흰 설탕그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이상하고 조그마한 소리미친 너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외할머니가 느닷없이 죽은 것을 알았다이상하게도 알았다 그 순간 네게서 ‘미친’이 떨어진 것도 알았다새끼 노루의 까만 똥처럼 ‘미친’이 뭉쳐져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외할머니를 설탕가루들 위에 옮겨 눕혔다119에 전화를 걸다 말고 바라본 마루 위의 네 발가락 자국눈 내린 것처럼 쌓인 하얀 설탕 위 네다섯 개의 발가락 동그라미들눈 위에서 총 맞아 죽은 외할머니 노루와그 주위를 맴도는 새끼 노루 한 마리를 둘러싼발가락 자국들, 아 에 이 오 우 다섯 모음으로 발음되는 김혜순(1955~) 너는 외딴집에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너는 미친 아이. 너는 “... -
새와 토끼
또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고 졸았다.광부들이 갱 밖으로 탈출했다.사장은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고새의 목을 비틀어 입갱금지 조치를 내렸다.광부들이 유독가스에 중독돼 쓰러져갔다.전쟁 때 잠수함 속의 토끼가 죽자선장의 명령으로 토끼 역할을 대신한「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병사가 떠올랐다.누가 병든 새와 토끼를 넣었을 수도 있다.그래서 일찍 숨을 멈추었을 수도 있다.지키는 자는 누가 지키나.그 지키는 자는 또 누가 지키나.이제는 먼저 아픈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낡은 것은 갔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그 순간이 위기다.아직 튼튼한 새와 토끼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산하(1960~) 카나리아는 어두운 갱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는 생명의 새이다. 만약 이 새가 울지 않는다면, 유독가스가 유출되어 갱 밖으로 뛰쳐나와야 살 수 있다. “전쟁 때 잠수함 속의 토끼”는 ... -
밝은 곳에 거하기
아이가 물항아리를 들고 내게 왔다한 손으로 덮개를 꽉 잡은 채 아이는 말한다자신이 물에서 헤엄치는 빛을 잡았다고빛을 풀어놓으면이곳도 밝아질 거라고아이는 내 앞에서 물항아리를 열어 보였는데빛은 담겨져 있지 않았고물만 찰랑거렸다나는 울상이 되어버린 아이에게빛은 이곳이 낯설어 무서운 나머지숨어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나는 보고 있던 사진첩을 내려놓고물항아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아이와 함께볕이 드는 곳으로 갔다그곳에서 우리는 항아리 속 빛이 놀라지 않도록천천히 덮개를 열었고우리는 함께 항아리에 담긴 빛이 헤엄치는 것을 보았다 설하한(1991~)나는 한때 빛을 잃어버린 마음을 안다고 생각했었다. 돌아보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의 빛들이 새나가는 줄도 모르고, 안개를 쫓아다녔다. 아이가 “물에서 헤엄치는 빛”을 ... -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1942~2012)문득 봄이 문 앞에 와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의 전령들이 도착했다. 봄이 오려면 폭설을 이겨 낸 바람이 필요하다. 눈과 입이 틀어막힌 채 “썩은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봄을, 바람이 달려가 “흔들어 깨”운다. 그리하여 “눈 부비며” 기어이 봄은 온다. 풀들을 일으키며 온다... -
수도국산
네 식구단칸방 살 때도둑이 들었다자는 척이불 속에 누워 있는데고장 난 비디오를들었다 놨다들었다 놨다선이 끊어져서조용히 나갔다옆집 아저씨 민구(1983~)시인은 수도국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곳은 인천 송림산에 배수지를 만들면서 생긴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개발로 사라졌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가난한 사람들이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던, 설움과 애증으로 얼룩진 장소였다. 멀리서도 잘 보였던, 산비탈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집들, 폐자재나 나무판자를 엮어 지었던 무허가 집들, 악다구니와 비명이 연탄재처럼 매일 나뒹굴고 깨졌던 집들, 그 집들의 단칸방에서 서너 가족이 ‘달세’를 내면서 하루하루를 견뎠다. 어느날 시인은 식구와 나란히 누워 잠을 자려는데 도둑이 들어왔다. 숨죽이며 이불 속에서 “자는 척”하고 있는데, 도둑이 자꾸만 비디오를 “들었다 놨다” 했다. 죄책감... -
순한 먼지들의 책방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혹시라도 기역아 먼지라니, 곧 망하라는 뜻이냐고 언짢을 것도 같아 살짝 귀띔하는데, 우리가 먼지의 기세를 몰라서 그래.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 정우영(1961~)우리는 우주를 떠돌던 먼지였다. 그 먼지들은 순하고 고요했지만 어디든 멀리 갔다. 우리는 한때 별이었고, 별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떠돌던 후배... -
식구
제 몸이 의자인지도 모르고옹기종기 모여 있는 의자들과탁자인지도 모르고 그 가운데 넙적엎드려 있는 탁자와 장롱인지도 모르고속에 온갖 것 담고 투박하게 기대 있는 장롱과침대인지도 모르는 침대와 TV인지도 모르고중얼거리는 TV와 벽인지도 모르고 허공에칸을 질러대는 벽들과, 그 벽 속의 물소리와지붕인지도 모르고 그 위에 수굿이 덮혀 있는지붕과 그 밑 조그만 화분에 발 오그리고아슬히 피어나는 제 몸이 꽃인 줄 모르는 꽃들과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저 들숨 날숨의 그 속에 캄캄하게 뜨고 지는 햇덩이와새벽녘 저 혼자 후둑후둑 지는 제 몸이 별인지도 모르는 별들과그것들 한아가리에 넣고 언젠가 콱입 닫을 악어 한 마리! 이경림(1947~) 이 시는 “모르는” 것들로 빼곡하다. 시인은 인간의 정체성이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 몸이” 제 몸인지도 모르는 의자, 탁자, 장롱, TV, 지붕, 꽃, 해, 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