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방울
수풀들 불타고 있었다―그것들 그러나휘감았다 자기들 목을 자기들 손으로장미 꽃다발처럼사람들 뛰었다 피신처로―그가 말했다 그의 아내 머리카락은그 안에 숨을 수 있을 만큼 깊다고담요 한 장에 덮여그들이 속삭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들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일련의 탄원기도를사태가 매우 악화했을 때그들이 뛰어들었다 서로의 눈동자 속으로,그리고 그 눈동자들 꼭꼭 닫았다너무 꼭꼭이라 그들은 화염을 느끼지 않았다그들이 속눈썹으로 올라왔을 때끝까지 그들 용감했다끝까지 그들 충실했다끝까지 그들 비슷했다두 방울,얼굴 가장자리 궁지에 빠진 두 방울과.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1924~1998)먼 나라 시인의 시를 읽는다. 헤르베르트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의 르부프,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곳이다. 그의 시에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았던 자신의 체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시인이 마주한 세계는 온통 “수풀들 불타고 있”... -
초기화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너는 달력이라고 했다 곧 적당한 때가 올 거라고 했다 믿는다고 했다 그중 하나를 뽑았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었다 하지만 낮과 밤 없이도 서서히 잠이 쏟아지고 그거 기억나? 나 음악 그만둘 때, 바이올린 없이는 못 살거라 생각했는데…… 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빈집이었다 아는 집이었다 엄마가 말없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섭섭했던가 냄비 속에서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마당에는 눈이 소복했다 개밥그릇 속에는 사료가 가득했다 개는 없었다 뒷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생상스의 협주곡이 들려온다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를 그만두게 된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한여진(1990~)네가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이건 달력이야!라... -
한 손
시루에서 콩나물을 뽑아내고 번쩍번쩍 빛나는 갈치의 목을 딴다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두꺼비 손 뚝딱뚝딱 밥이 나오고 공책이 나오고 표준전과가 나오고마음먹고 산 옷의 지퍼가 올라가지 않을 때 사람의 입술이 성벽처럼 완고할 때 돌을 던지고 모래를 흩뿌려댔다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 내 손을 더럽히는 것이었다니손을 잡고 싶었지만 망설였고 손을 내어줄 수 있었지만 주머니에 넣어 두는 편이 안전하다 믿었던 날손쓸 수 없는 일도 세계엔 넘쳐났지보증금 천에 월 삼십, 손 없는 날을 골라 이사했지만 부자가 되거나 갑자기 월급이 오르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은 되었다 더 불행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침대맡에 호랑이 그림을 올려 두고는 손이 하나뿐인 어떤 여인을 손가락이 열한 개인 또 한 여인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겨울이 무던히도 지나갔다, 지나가지 않았다불도 켜지 않은 저녁에 뭉툭한 엄마 손이 겨울 외투를 깁고 있다 오래된 것들이 빚어내... -
희망의 수고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가게를 정리하시며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검은 봉지 속에는칫솔 네 개행주 네 장때수건 한 장구운 김 한 봉지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검은 봉지를 들고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그늘이건 볕이건 허름하게나마 구멍 속에서 비벼진 시절이 가고내 구멍가게의 주인공들에게서마지막인 듯터질 것처럼구멍의 파편들이 가득 든 검은 봉지를 받았다이병률(1967~)“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를 하셨던 시인의 부모가 가게를 정리하면서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넨다. 검은 봉지 안에는 칫솔, 행주, 때수건, 구운 김이 담겨 있다. 문 닫은 구멍가게는 “이 빠진 자리처럼 검”다. 시인은 검은 봉지를 들고 어두워진 거리를 걷는다. “봉... -
모자이크
거의 다 왔어거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채울 것이 남아 있었는데조각을 얻지 못한 틈에서성토하듯 빛살이 쏟아졌는데거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이다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한 조각만 더 모으면 되는데그 조각만 뿌예서 잘 보이지 않는데의도적으로 나를 어지럽히는 것 같은데모아도 모아도결코 채워지지 않는 모자이크처럼거의는 가까워지기만 한다도달하지 못한다내일은 오늘의 미완성에 대하여변명을 짜 맞춰야 한다 최대한화려하게, 자연스럽게거의 몰라볼 정도로 오은(1982~)“거의”는 무언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말. “거의 다 왔다”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인은 모자이크를 보면서 “거의”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거대한 세계를 상상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점, 희미하게 흩어진 무수한 조각들일 것이다... -
눈물을 빛으로
정면은너무 어둡거나 너무 환해요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어요이젠 그 너머를 봐야겠어요뿌리들은 무슨 열매를 준비하고알들은 어떤 죽음의 깃털을 다듬고 있는지세상이 온통 수렁 같을 때도숨을 좀 가다듬고더 깊이, 찬찬히 살펴보면숨어 있는 다른 게 보일지 몰라요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아침 풀밭의 이슬들,유리창에 부딪혀 한쪽 날개가 고장난천사의 쑥스런 표정,냉장고 문을 열면 방긋 웃는 새끼 곰들그래요 나는 지금눈물을 빛으로 바꾸고 있는 중이랍니다내 발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바퀴벌레에게별일 없나? 밥은 잘 먹나?안부를 물으며 전동균(1962~) 우리가 바라보는 정면, 그것은 정말 정면일까? “너무 어둡거나 너무 환해”서 잘 모르겠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우리에게는 늘 혼돈의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너무 거센 바람이라 눈을 질끈 감다가 천천히 뜨면 다른 ... -
꽃잎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보기 싫은 노란 꽃을 김수영(1921~1968)시인에게 꽃은 움직이는 영원성이자, “다른 시간”인 듯하다. “꽃을 주세요”로 시작하는 이 시는 꽃을 달라고, 꽃... -
뜨거운 말
뜨거운 것을 쓰다 쏟았습니다 미안해요 부치진 못할 것 같군요 미지근한 건 문학이 아니야, 말하는 어른 여자를 만난 저녁 주꾸미를 먹었습니다 뛰지 않는 심장과 뛰려는 심장 사이에 사랑을 접어놓고마음이란 뭘까요 호호 불어 먹고 싶은 마음이란 어디에 간직해야 하는 걸까요당신은 오늘 내 손을 꼭 잡고 귓속에 뜨거운 말을 부어주었습니다그것을 안고 멀리 갈 거예요당신이 나를 처음 본 날,쉬운 퀴즈를 풀듯 나를 맞혀버렸다는 걸 기억할 거예요당신이 좋아서다가가고 싶지가 않아요겨울 숲에봄 아닌, 다른 계절이 오면그때 갈게요박연준(1980~)차가운 말보다는 뜨거운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혀는 어느새 차가운 말을 쏟아낸다. 당신에게 “뜨거운 것을 쓰다가 쏟”아버렸기에 부치지 못했다. 시인은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다시 쓰면서 “미지근한 건 문학이 아니야”라고 말했던 “어른 여자”를 생각한다. 문학은 뜨거운 건가. 식지 않는 건가.... -
새벽 한 시의 전복
이 나의 관심사다. 이런 순간 말이다.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도시를 느끼는 것.표준시간대 사이, 바다 사이, 심야의 뉴스 사이에서모든 것의 만남, 전쟁, 꿈, 겨울밤이쏟아져 들어오는 것을.어린 소녀들이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홀로사랑에 빠지게 하는, 혹은 세계의 절반에서화염을 비처럼 맞는 어린아이들이 ― 우리 말이야 ―누군가를 부르며 ― 우리 말이야 ― 와서 좀 도와달라고 외치게만드는 눈더미 속 불빛.이제 어둠의 경계에서야나는 달빛의 극단을 본다.홀로, 내 모든 희망은너무 멀어 들리지도 않는, 한 현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세계의 절반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흩뿌려져 있다.내게 말해본다.경험을 믿으라고. 그 리듬을 믿으라고.네 경험의 그 깊은 리듬을.뮤리얼 루카이저(1913~1980)이 시를 읽는 순간, 그 밤이 생각났다. 우리에게 “새벽 한 시의 전복”은 너무나도 절실한 순간이었다. 만약 계엄이 ... -
늑대들
늑대들이 왔다피냄새를 맡고눈 위에 꽂힌 얼음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얼음을 핥을수록 진동하는 피비린내눈 위에 흩어지는 핏방울들늑대의 혀는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제 피인 줄도 모르고감각을 잃은 혀는 더 맹목적으로 칼날을 핥는다치명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먹는 것은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저녁이 왔고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늑대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나희덕(1966~)늑대들이 오고 있다. 한겨울 혹한에 굶주린 늑대들이 “피냄새를 맡”으며 오고 있다. 눈 위에 꽂힌 “얼음칼” 쪽으로 모여들고 있다. “얼음칼”은 에스키모들이 늑대를 사냥할 때 쓰는 도구, 동물의 피를 칼에 묻혀 얼린 후에 눈 속에 파묻는다. 칼날에 얼어붙은 피를 다 핥고 나면 감각이 마비된 늑대는 자신의 피라는 것도 모르고, 더욱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 너덜너덜해진 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로 눈벌판을 물들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