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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 전체 기사 304
  • [詩想과 세상]모임
    모임

    물을 붓고 불을 켠다 네가 탄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복도에서 발소리와 말소리가 뒤섞인다 옆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까지불꽃이 일렁인다 기포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오고 있니? 가고 있어 아직 오지 않은 너는 수화기 너머에 있다 잘 가라는 소리가 들린다 복도가 울린다 누군가 멀어진다물을 다시 붓는다 들끓던 수면이 잦아든다 모르는 사람이 좋아지기도 해 낯선 말투로 울렁이게도 하고 같은 곳에서 만났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헤어져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숨고 싶은데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함께 있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물이 다시 끓어오른다 불꽃을 줄인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네가 탄 버스에서 너는 내리지 않았고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해변으로간다고 했다 황정현(1968~)시인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곧 도착할 사람을 위해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켠”다. 아직 그 사람은 도착하지 않고, 복도...

    2025.08.03 21:21

  • [詩想과 세상]매미가 운다
    매미가 운다

    여름은 타오르고 매미가 운다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제 몸을 거는 것오랜 어둠을 지나온 목숨만이할 수 있는 일이다매미가 울고 배롱나무는 아프다이 세상에 울음이 없다면 노래도 없고처마를 와락 껴안는 소나기도 없다뙤약볕은 보름이고 쏟아지라지그래도 울음은 그칠 수 없고새로운 숨소리는 조금 가까워졌다피도 어제보다 자랐다매미가 울고 계곡물은 멈추지 않는데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역사를 대어보는 것은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존재만이가진 긍지다매미가 운다이 여름을 다 운다황규관(1968~)이 여름의 열기 속에서 매미가 운다. 매미가 우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깊은 땅속의 오랜 시간을 견디고 땅 위로 올라온 매미는, 천적이 잠든 밤에 우화(羽化)한다. 오래된 자신의 몸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변신한다. 오직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살고, 사랑을 위해 죽는다. 매미의 허물은 빈껍데기 같은 마음의 외투일 ...

    2025.07.27 21:14

  • [詩想과 세상]재개발
    재개발

    이 집에는빛이 머무를 자리가 없다국도의 수많은 차들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창가에 걸터앉아라디오 안테나를 고치다서성이듯 기침이나 뱉는 하루앞집 담벼락의 가시철조망처럼내일이 가슴을 파고든다 어제도 덜 잊었는데오늘밤을 어떻게 해야 하나어느새 현관에 칠해진 독백을 헤아린다 아무리 찢어도 쌓이는아무것도 아직 추하지 않아서접시를 씻는 어머니는 우리가 철거당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어두운 뒷모습 속에도 성실히피가 돌고 있다언제까지 이 집에서 잠들 수 있을지 생각할 때마다어쩌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것 같다 현기증마냥 오늘도시퍼런 해는 썰물이 밀려가듯이눈물이 흐르는 쪽으로 지고최백규(1992~)재개발 구역에 있던 시인의 집에는 “빛이 머무를 자리”가 없었다. 빛마저 도망치던 집. 빛보다 점점 느는 빚들이 오래 머물던 집. 장롱 안에는 가계의 눅눅한 사연들이 마르지 않은 채 겨우 숨을 쉬었...

    2025.07.20 21:04

  • [詩想과 세상]붉은 악보
    붉은 악보

    오늘은 7월14일불란서 혁명 기념일그래서 그런지담장의 장미꽃들이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피의 폭죽을펑, 펑, 터뜨리고 있다저 불순한 것들이어정쩡히 살아온 나를박열朴烈 같은 젊은 아나키스트로잘 못 본 것일까오늘 밤만은장렬한 불꽃 축제에주저 없이 가담하여함께폭죽을 쏘아 올리자고자꾸만 손짓한다이가림(1943~2015)죽은 시인이 오래전 보낸 투병통신이 지금 도착했다.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를 꺼내 천천히 펼치니 “오늘은 7월14일”이고, “불란서 혁명 기념일”이라고 적혀 있다. 한때 시인의 눈동자에 담겼을 “담장의 장미꽃들”이 “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 “피의 폭죽”을 “펑, 펑, 터뜨리고” 있다. 시인은 붉은 장미를 보며, 젊은 혁명가 박열을 떠올린다. 한 혁명가의 붉은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정쩡히 살아온” 자신을 돌아본다.프랑스 혁명의 거대한 파도는 자신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

    2025.07.13 21:05

  • [詩想과 세상]가방
    가방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가방 속엔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재수록한 시그날의 마지막 석양빛이별의 낙수(落水) 소리백합과 접힌 나비건강한 해바라기맞은편에 마른 잎어제의 귀띔나를 부축하던 약속희락의 첫 눈송이물풍선 같은 슬픔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해변을 걸어가는군가방 속에파도치는 나를 넣고서문태준(1970~)누구에게나 오래된 가방이 있다. 버리지 못하는, 끝내 버릴 수 없는 낡은 가방 속에는 많은 것이 살고 있다. 어느 해변을 걷다가 주워 온 작은 돌멩이 하나가 가방에서 조용히 구르다가 나를 부른다. 가방 속에서 “그날의 마지막 석양빛”이 언뜻 비친다. “백합과 접힌 나비”의 날개도 보인다. 차가운 등을 보이며 돌아선 “이별의 낙수 소리”도 들린다. 겨울에는 눈보라 속을 헤매다가 눈송이들을 넣고 다녔다. 폭우 속에서 더 이상 슬플 것도 없이 펑펑 울기도 했던 날들을 가방은 기억한다.가방은 입 다문...

    2025.07.06 20:54

  • [詩想과 세상]무근성 우영팟
    무근성 우영팟

    어처구니없이 넘어간 무근성 옛집 우영팟예전처럼 고추며 상추들 착하게 자라고 있다빈집 되면 텃밭도 빈털터리가 되어검질만 왕상할 줄 알았는데, 웬말인가어머니 손 있을 때 자라던 그대로어머니 없어도 기죽지 않고 으쌰으쌰여리고 푸른 것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어머니가 왜 집을 떠났는지 물을까 하다가혹시나 눈물 그렁그렁 속이 상할까 꾹 참고곧 오겠지 틀림없이 오실 거야 생각하면서다시 돌아올 어머니에게 예쁘게 보이려고하얗고 노란 꽃망울 반짝반짝 피워 올리면서바람 불면 고개 삐쭉 내밀어이제나 오카 저네나 오카 주왁주왁 흔들리면서김수열(1959~)어쩌다가 시인의 “무근성 옛집 우영팟”이 넘어갔을까. 억울한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겠다. 한때는 복작거리며 살았을 그 집으로부터 가족이 떠나왔지만, 마음은 떠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시인은 그 우영팟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주말인 우영팟은 텃밭을 뜻한다. 우영...

    2025.06.29 20:55

  • [詩想과 세상]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

    나는 최선을 다해 최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차갑게 튀기는 빛을 헤치며 걷는 숲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환하고 포근한 풍경에 나는 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같아 꼭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입 다물고 걸으면 금세 최악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많았다 너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신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엾게 봐주셔서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주신 거야 우리는 몹시도 기쁜 마음으로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로 잠깐 바짝 우려낸 차 하지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최악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말했을 때 누군가,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이야기했고, 아니야, 우리는 이미 최악으로 와 있잖아, 그런데 여기보다 더 먼 곳이 있으면 어쩌지 그리고 저 멀리에서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최악으로 걸어오는 아는 얼굴들이 어른어른 보였다. 권누리(1995~)만약 당신이 최선을 다해 걸어온 길이 최악이었다면, 너무 끔찍한 일이겠다. 언제나 ...

    2025.06.22 21:08

  • [詩想과 세상]물고기
    물고기

    내가 처음 잡은물고기양동이에 얌전히누워 있지 않고퍼덕거리며얼얼한놀라운 공기 빨아들이고무지개 빛깔서서히 쏟아내며죽어갔지. 나중에나는 물고기 몸을 갈라살에서 가시를 발라내고먹었지. 그래서 바다가내 안에 들어 있지. 나는 물고기,물고기는 내 안에서 빛나네, 우린서로 뒤엉켜 다시 바다로돌아가겠지. 고통,그리고 고통, 또 고통으로우리 이 열정의 대장정 이어가고,신비에서 자양분 얻지.메리 올리버(1935~2019)이 여름에 ‘물고기’ 하고 부르면,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물고기 한 마리가 내 혓바닥 위에서 펄떡거릴 것만 같다. 멀리서 파도가 밀려오고, 내 몸은 바닷속에서 물고기들과 천천히 유영한다. 넘실대는 너른 바다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간다.메리 올리버는 처음 잡은 물고기를 양동이에 넣었다. 그 물고기는 “무지개 빛깔”을 “서서히 쏟아내며 죽어갔”다. 죽은 물고기의 “몸을 갈라” “가시를 발라내고 ...

    2025.06.15 20:57

  • [詩想과 세상]나는 버드나무가 좋아서
    나는 버드나무가 좋아서

    버드나무에물고기 한 마리물고기 두 마리잎잎마다 살게 하였습니다가지마다 수십 마리의 물고기들차마 다 하지 못한 말처럼바람 불면차곡차곡흔들립니다바람은 자꾸 아픈 마음을 데려와함께 살라고 합니다나는 낮잠처럼물고기 한 마리 허공에 놓아주고물속으로 놓여난 물고기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그래도 찬란합니다무엇으로든 빛납니다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봅니다내가 사랑한 귀신들에게 방 하나씩 다 내어주고서야우리가 살 집을 지어봅니다이제 막 물속으로 잠기려는 잎사귀입니다이승희(1965~)버드나무가 너무 좋아서, “잎잎마다” 물고기를 기르는 시인이 있다. 버드나무 한 잎 한 잎의 초록 물고기들,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바람은 자꾸 아픈 마음을 데려와” 함께 살라고 하는데, 낮잠이었을까. 시인은 “물고기 한 마리 허공에 놓아주고” 물속에 비친 물고기를 바라본...

    2025.06.08 21:05

  • [詩想과 세상]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

    그런 언덕이라면좋겠습니다구부러진 길끝에서도 내다보이는발보다눈이 먼저 닿는중간중간 능소화 얽힌 담벼락 이어져지나는 사람마다 여름을 약속하는젖어도 울지 않는바람도 길을 내어사람의 뒷말 같은 것이 남지 않는막 걸음을 배운 어린아이도허공만을 쥐고 혼자서 오를 수 있는누군가는 밤으로 기억하고누군가는 아침으로 기억해서새벽부터 소란해지는박준(1983~)우리에게 등을 대고 누울 따뜻한 언덕이 있다면 좋겠다. 불안한 안개가 우리 일상을 흐릿하게 만들어도 기댈 수 있는 “그런 언덕이라면” 더욱더 좋겠다. 마음의 미등을 켜고 뒤쪽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내려놓고 “발보다 눈이 먼저 닿는” 곳마다 꽃나무를 심으리라. “지나는 사람마다 여름을 약속하는” 오늘은 희망을 품어도 좋은 날이라고 말하리라. 이제는 등을 돌리던 사람에게도 언덕이 되어야지. 눈보라에 “젖어도 울지 않는” 힘을 기르리라. 바람이 낸 길들...

    2025.06.0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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