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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詩想과 세상
  • [詩想과 세상]한 손
    한 손

    시루에서 콩나물을 뽑아내고 번쩍번쩍 빛나는 갈치의 목을 딴다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두꺼비 손 뚝딱뚝딱 밥이 나오고 공책이 나오고 표준전과가 나오고마음먹고 산 옷의 지퍼가 올라가지 않을 때 사람의 입술이 성벽처럼 완고할 때 돌을 던지고 모래를 흩뿌려댔다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 내 손을 더럽히는 것이었다니손을 잡고 싶었지만 망설였고 손을 내어줄 수 있었지만 주머니에 넣어 두는 편이 안전하다 믿었던 날손쓸 수 없는 일도 세계엔 넘쳐났지보증금 천에 월 삼십, 손 없는 날을 골라 이사했지만 부자가 되거나 갑자기 월급이 오르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은 되었다 더 불행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침대맡에 호랑이 그림을 올려 두고는 손이 하나뿐인 어떤 여인을 손가락이 열한 개인 또 한 여인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겨울이 무던히도 지나갔다, 지나가지 않았다불도 켜지 않은 저녁에 뭉툭한 엄마 손이 겨울 외투를 깁고 있다 오래된 것들이 빚어내...

    2025.01.26 20:36

  • [詩想과 세상]희망의 수고
    희망의 수고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가게를 정리하시며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검은 봉지 속에는칫솔 네 개행주 네 장때수건 한 장구운 김 한 봉지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검은 봉지를 들고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그늘이건 볕이건 허름하게나마 구멍 속에서 비벼진 시절이 가고내 구멍가게의 주인공들에게서마지막인 듯터질 것처럼구멍의 파편들이 가득 든 검은 봉지를 받았다이병률(1967~)“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를 하셨던 시인의 부모가 가게를 정리하면서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넨다. 검은 봉지 안에는 칫솔, 행주, 때수건, 구운 김이 담겨 있다. 문 닫은 구멍가게는 “이 빠진 자리처럼 검”다. 시인은 검은 봉지를 들고 어두워진 거리를 걷는다. “봉...

    2025.01.19 20:45

  • [詩想과 세상]모자이크
    모자이크

    거의 다 왔어거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채울 것이 남아 있었는데조각을 얻지 못한 틈에서성토하듯 빛살이 쏟아졌는데거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이다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한 조각만 더 모으면 되는데그 조각만 뿌예서 잘 보이지 않는데의도적으로 나를 어지럽히는 것 같은데모아도 모아도결코 채워지지 않는 모자이크처럼거의는 가까워지기만 한다도달하지 못한다내일은 오늘의 미완성에 대하여변명을 짜 맞춰야 한다 최대한화려하게, 자연스럽게거의 몰라볼 정도로 오은(1982~)“거의”는 무언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말. “거의 다 왔다”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인은 모자이크를 보면서 “거의”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거대한 세계를 상상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점, 희미하게 흩어진 무수한 조각들일 것이다...

    2025.01.12 21:18

  • [詩想과 세상]눈물을 빛으로
    눈물을 빛으로

    정면은너무 어둡거나 너무 환해요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어요이젠 그 너머를 봐야겠어요뿌리들은 무슨 열매를 준비하고알들은 어떤 죽음의 깃털을 다듬고 있는지세상이 온통 수렁 같을 때도숨을 좀 가다듬고더 깊이, 찬찬히 살펴보면숨어 있는 다른 게 보일지 몰라요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아침 풀밭의 이슬들,유리창에 부딪혀 한쪽 날개가 고장난천사의 쑥스런 표정,냉장고 문을 열면 방긋 웃는 새끼 곰들그래요 나는 지금눈물을 빛으로 바꾸고 있는 중이랍니다내 발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바퀴벌레에게별일 없나? 밥은 잘 먹나?안부를 물으며 전동균(1962~) 우리가 바라보는 정면, 그것은 정말 정면일까? “너무 어둡거나 너무 환해”서 잘 모르겠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우리에게는 늘 혼돈의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너무 거센 바람이라 눈을 질끈 감다가 천천히 뜨면 다른 ...

    2025.01.05 21:01

  • [詩想과 세상]꽃잎2
    꽃잎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보기 싫은 노란 꽃을 김수영(1921~1968)시인에게 꽃은 움직이는 영원성이자, “다른 시간”인 듯하다. “꽃을 주세요”로 시작하는 이 시는 꽃을 달라고, 꽃...

    2024.12.29 21:14

  • [詩想과 세상]뜨거운 말
    뜨거운 말

    뜨거운 것을 쓰다 쏟았습니다 미안해요 부치진 못할 것 같군요 미지근한 건 문학이 아니야, 말하는 어른 여자를 만난 저녁 주꾸미를 먹었습니다 뛰지 않는 심장과 뛰려는 심장 사이에 사랑을 접어놓고마음이란 뭘까요 호호 불어 먹고 싶은 마음이란 어디에 간직해야 하는 걸까요당신은 오늘 내 손을 꼭 잡고 귓속에 뜨거운 말을 부어주었습니다그것을 안고 멀리 갈 거예요당신이 나를 처음 본 날,쉬운 퀴즈를 풀듯 나를 맞혀버렸다는 걸 기억할 거예요당신이 좋아서다가가고 싶지가 않아요겨울 숲에봄 아닌, 다른 계절이 오면그때 갈게요박연준(1980~)차가운 말보다는 뜨거운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혀는 어느새 차가운 말을 쏟아낸다. 당신에게 “뜨거운 것을 쓰다가 쏟”아버렸기에 부치지 못했다. 시인은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다시 쓰면서 “미지근한 건 문학이 아니야”라고 말했던 “어른 여자”를 생각한다. 문학은 뜨거운 건가. 식지 않는 건가....

    2024.12.22 20:52

  • [詩想과 세상]새벽 한 시의 전복
    새벽 한 시의 전복

    이 나의 관심사다. 이런 순간 말이다.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도시를 느끼는 것.표준시간대 사이, 바다 사이, 심야의 뉴스 사이에서모든 것의 만남, 전쟁, 꿈, 겨울밤이쏟아져 들어오는 것을.어린 소녀들이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홀로사랑에 빠지게 하는, 혹은 세계의 절반에서화염을 비처럼 맞는 어린아이들이 ― 우리 말이야 ―누군가를 부르며 ― 우리 말이야 ― 와서 좀 도와달라고 외치게만드는 눈더미 속 불빛.이제 어둠의 경계에서야나는 달빛의 극단을 본다.홀로, 내 모든 희망은너무 멀어 들리지도 않는, 한 현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세계의 절반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흩뿌려져 있다.내게 말해본다.경험을 믿으라고. 그 리듬을 믿으라고.네 경험의 그 깊은 리듬을.뮤리얼 루카이저(1913~1980)이 시를 읽는 순간, 그 밤이 생각났다. 우리에게 “새벽 한 시의 전복”은 너무나도 절실한 순간이었다. 만약 계엄이 ...

    2024.12.15 20:41

  • [詩想과 세상]늑대들
    늑대들

    늑대들이 왔다피냄새를 맡고눈 위에 꽂힌 얼음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얼음을 핥을수록 진동하는 피비린내눈 위에 흩어지는 핏방울들늑대의 혀는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제 피인 줄도 모르고감각을 잃은 혀는 더 맹목적으로 칼날을 핥는다치명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먹는 것은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저녁이 왔고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늑대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나희덕(1966~)늑대들이 오고 있다. 한겨울 혹한에 굶주린 늑대들이 “피냄새를 맡”으며 오고 있다. 눈 위에 꽂힌 “얼음칼” 쪽으로 모여들고 있다. “얼음칼”은 에스키모들이 늑대를 사냥할 때 쓰는 도구, 동물의 피를 칼에 묻혀 얼린 후에 눈 속에 파묻는다. 칼날에 얼어붙은 피를 다 핥고 나면 감각이 마비된 늑대는 자신의 피라는 것도 모르고, 더욱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 너덜너덜해진 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로 눈벌판을 물들이며...

    2024.12.08 20:29

  • [詩想과 세상]합정
    합정

    인간의 몸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며나는 한낮에 걷고 있었죠처형터라 물이 필요해 우물을 팠는데민물조개가 많이 나왔다는 곳이후 그곳에 지어진 건물을 직장 삼으면서오랜 시간이 지나 여기 있구나, 감각하면서는인간의 몸이 너무 크다고나는 움직임이 느려지기도 했죠걷다가 사로잡히기도 했으니까흰 개가 지나다니는 합정다리가 세 개뿐인 흰 개와 함께 걷는 산책자 인간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둘 사이 어디 즈음 마중나갈 수도 있을까복을 빌어주었는데오래 남을 장면들은 무엇인가혼자 떠올려보았어요언제였나, 우리합정에서인간의 미련이 중요하다고 중얼거렸던 때는함께해본다는 것이끝까지 인사하려 한다는 것이 안태운(1986~)개미만큼 인간의 몸이 작아진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들도 한없이 작고 낮아지겠지. 욕망도 한없이 작아지겠지. 시인은 “인간의 몸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서, 조개우물이라 불렸던 합정의 거리를 걸었다....

    2024.12.01 20:39

  • [詩想과 세상]우리라는 슬픔
    우리라는 슬픔

    거짓말의 길이에 대해서 생각한다차 벽을 향해 걸어가면서거짓말의 밑바닥은 몇 마리인지 세어본다차 벽을 두고 돌아오면서잊어버리면 픽 웃으며한 발자국에 한 마리씩다시 한 마리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우리라는 말이광장에 뿌려졌을 때이걸 선물이라 좋아해야 할지이걸 폭탄이라 두려워해야 할지 몰랐지만우리는 꿈에도 사라진 희미하고뚜렷한 우리가 되어서차 벽을 향해 걸어가고차 벽을 두고 돌아온다우리라는 슬픔을 완성하기 위해서너무 오랫동안 쌓여서끝도 보이지 않는 슬픔을 완성하기 위해서안주철(1975~)어느 겨울 우리는 광장에 나갔고, 차 벽을 향해 걸어갔다. 자꾸만 늘어나는 “거짓말의 길이”에 대해 생각하면서. 차 벽을 부수기 위해 장미꽃을 던졌다. 가로막힌 것들이 조금씩 무너졌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가 되어갔다. 마침내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을 피워냈다.그 높은 차 벽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

    2024.11.2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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