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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詩想과 세상
  • [詩想과 세상]응강
    응강

    그늘이나 응달이 고향에서는 응강인데 꼭 응강이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곳만은 아니었다 시래기는 뒤란 처마 밑 응강에서 꼬들꼬들 말라갔으며 장두감을 설강 위 응강에 오래 두어야 다디단 홍시가 되어갔는데, 무엇보다도 어릴적 마루청 밑 짚가리 응강 속에서 달걀을 훔친 내가 흠씬 종아릴 맞고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잠들어버린, 고향에서는 정지라고 부르는 부엌 구석 어둑한 응강의 찬 기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하였으니 거기가 서늘하고 깊고 시퍼런 물줄기를 가진 강 중의 강이기는 하였던 모양이봉환(1961~)“응강” 하고 발음하면 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강가에 서 있는 것 같다. 시인의 고향에서 응강은 “그늘이나 응달”이었다. 그늘은 춥기도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곳. 시인을 늘 따라다니는 눈물 자국 같은 것.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기억의 문을 열면, “마루청 밑 짚가리 응강 속에서 달걀을 훔친” 시인이 “흠씬 종아릴 맞고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잠들어” 있다. ...

    2024.11.17 21:31

  • [詩想과 세상]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모르겠어 이 밤은 모르겠다있어야 했을 그 밤을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그러자 드러나고 있다아제아제 바라아제그러자 나는 서두르고 있다그 밤에 사로잡혀이 밤을 어지럽히고 있다그러자 나는 빗자루를 들고 있다바닥을 쓸고 있다쓸어버리고 다시 하기쓸고 있다 쓸어버리고다시 하기신해욱(1974~)우리는 무언가를 뒤집어쓴 채로, 잘못 들어선 길을 가고 있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 “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자주 뒤집힌다. 정면이 보이질 않는다. 창문들도 모두 흐릿하다. 다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그 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은 “이 밤”. 초과한 것들, 부유하는 것들, 대치하는 것들로 늘 흔들린다. 시인은 혼돈의 순간, 주문처럼 외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매일매일 짓고 부수는 병든...

    2024.11.10 20:42

  • [詩想과 세상]미아리
    미아리

    언제부터 한쪽이 결린다던 누나는얼마 안 가 해만 지면 몸져누웠다이웃들도 의사들도 점집에나 보내보라 했지만싫다고 싫다고 악을 썼는데이번에는 내가 앓아눕자누나는 조용히 내림굿을 받았다누나가 늘 바라던 방이 그때 생겼다차림이고 낯이고 전부 다 어두운인간처의 낮에는 방울 소리 지나서마음이 열리거나 닫히는 소리닳도록 손 비비는 소리는 저녁상 치우면 들렸다문득 잠에서 깨 오줌 누러 가는 한밤초에 켠 불이 많아 아늑하게 깊숙하게 밝은 그 방으로 모르는 할머니가 들어갔고일요일엔 모처럼 터셔츠를 입고 나와누나는 시고 단 귤 먹고 싶다 했다요 앞 청과에 좀 다녀오라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시면나는 싫다고 싫다고 버팅기다 내쫓기듯집을 나와 내리막길 걸으면 푸른청과 보이고오르막길 걸으면 끝에 영광교회 나와서낑낑 오르는 신자들 매번 저기 마귀 동생 간다 그랬다 전욱진(1993~)서울의 미아리에는 미래의 시인이 살...

    2024.11.03 21:37

  • [詩想과 세상]있는 힘
    있는 힘

    대형 쇼핑센터에 어둠이 밀려오고한 사람이 무언가를 밀고 있었다있는 힘을 다하여한 줄에 스무 개, 열다섯 줄을어둠을 등에 지고 밀고 있었다가득한 물건 가득한 사람가득한 지구를 위하여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아침을 향하여경건하고 진지하게 밀고 있었다발등을 세우고 두 손을 움켜쥐고몸통으로 비스듬히 일직선으로밑을 바라보며 밀고 있었다대지란 이런 것이다발걸음이란 이런 것이다민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어떤 주장도 외침도 없이그냥 그래야 하는 것으로기어이 그래야 하는 것으로어둠 속에서모두가 돌아간 곳에서있는 힘을 다하여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 박철(1960~)모두 집으로 돌아간 “대형 쇼핑센터”에서 “빈 수레를 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쇼핑센터는 거대한 물류창고처럼 온갖 물건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수레에 가득 물건을 담는다. 더 많이 담기 위해 수레는 작은 물류창고가 된다. 어둠만이 남았을 때, 묵묵히 빈 수...

    2024.10.27 21:21

  • [詩想과 세상]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초식동물에게도산다는 것은 본능,적응하는 건 삶의 수단이다.아가야,옛날 코끼리들에겐 길고 아름다운어금니가 있었단다.소름 끼치는 죽음의 놀이터그 불쏘시개로 필요한 상아.상아가 아름다워서 죽어야 하는코끼리가 얼마나 많았는지.그래서란다.어금니 없이 태어나는 모잠비크의 코끼리아가야,상아가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그 슬픈 행복을 너는 아는 거니?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강인한(1944~)아프리카 모잠비크 코끼리에게 상아가 있었다는 것은 옛날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내전과 밀렵, 그 “소름 끼치는 죽음의 놀이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상아를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게 했다. 맹그로브 숲속 바오바브나무들이 울창하던 곳에서 평화롭던 코끼리들은 “상아가 아름다워서 죽어야” 했다.밀렵꾼들은 아기 코끼리가 보는 앞에서 코끼리의 얼굴을 전기톱으로 자르고, 총으로 쏘았다. 그걸 본 코끼리들은 상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

    2024.10.20 20:35

  • [詩想과 세상]저녁 잎사귀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한 백 년쯤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내 몸이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나는 후회했다알 것 같다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볕 속을 걸어야 한다거기 저녁 잎사귀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잠긴다 한강(1970~)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그녀가 ‘심장을 문지르’며 쓴 언어의 창고로 들어간다. 그 창고에서 오래된 가구의 서랍을 하나둘씩 열어본다. 시인이 넣어둔 ‘저녁’을 맨 아래 서랍에서 꺼낸다. 그 어느 날 저녁의 “잎사귀”를 펼쳐본다. 잎사귀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으로 작은 벌레의 시간, 별들의 시간이 흐른다. 잎사귀는 땅속으로 떨어져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흘렀을까. 시인은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지다가, 이내 어두워진다.깊어진다는 것은 더 어두워진다는 ...

    2024.10.13 20:42

  • [詩想과 세상]오소
    오소

    나가 구십 하고도 거시기 두살인가 세살인가 헌디도 까막눈 아녀, 젓가락을 요로코롬 놔도 뭔 자인지 모른당께. 그냥 작대기여 헌디, 할멈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수술받는다고 병달이 놈 손 잡고 올라갔잖여, 병달이가 무신 일 있으믄 편지 쓰라고 봉투에다가 주소는 적어두고 갔는디, 나가 글씨가 뭔지 오치게 알어, 기냥 알았어,라고만 했지. 그때는 산 넘어가야 전화가 있을랑 말랑 혔어 암만,어찌어찌 보름이 지났는디 이 할멈이 오지를 않는겨, 저짝에서 소쩍새가 소쩌럭 소쩌 여러날 우는디 환장허겄데, 혼자 사는 노인네들은 어찌 사나 몰러, 그나저나 수술받다 죽었으믄 연락이라도 올 텐디 꿩 궈 먹은 소식이더라고,병달이가 써준 봉투 생각이 나서 종이 꺼내놓고 뭐라 쓰야겄는디, 뭐라 쓰야 헐지 몰라서 고민허다가 에라 모르겄다, 허고는 소 다섯마리 그려 보냈당께, 근디 할멈이 용케 알아보고 열흘 만에 왔더만, 나가 글씨보단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걸 그때 알았당께 박경희(1974~)...

    2024.10.06 21:28

  • [詩想과 세상]가난한 오늘
    가난한 오늘

    검지 손가락 첫마디가 잘려 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꽃이 떨어진다. 이병국(1980~)오래전 젊은 시인의 등단작을 다시 꺼내 본다. 여전히 “가난한 오늘”이다. 청년들은 전세사기로, 직장을 잃은 중년들은 자영업을 하다가 폐업으로, 노인들은 줄어든 복지 예산으로 더 차가워진 장판 바닥 위에서 하루를 연명한다. 빌라들은 깡통이 되었고, 거리마다 텅 빈 상점에는 ‘임대’ 현수막이 더 이상 뜯기지 않으려...

    2024.09.29 20:40

  • [詩想과 세상]히말라야 해국(海菊)
    히말라야 해국(海菊)

    모든 꽃이 질 즈음 해국이 핀다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위태로운 꽃 위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채샌들을 신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르는어린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깜박일 때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는눈 덮인 마당을 절룩절룩 걸어 다니며아내가 숨긴 술병을 찾고 있지몹쓸 산기슭이나 대물림한 병든아비가 술잔에 눈물을 부딪칠 때가파른 계곡을 겨우 올라가는 어린 눈망울과몇 번이나 기워 신은 해진 샌들 사이갈라진 뒤꿈치가 딛고 가는 발자국처럼그늘진 비탈에서 비탈로 해국이 번지는 동안벗어날 수도 없는 생을 껴안은 세상 속으로속수무책 비가 내리네 눈이 내리네김명기 (1969~)가을인데 여름이 쉽게 가지 않았다. 한차례 비가 내리자 기다리던 가을이 되었다. “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 아직...

    2024.09.22 20:38

  • [詩想과 세상]병원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1917~1945)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에 윤동주의 이름은 단연 빛나고 오롯하다. 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시인은 ‘세상은 온통 환...

    2024.09.0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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