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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 전체 기사 304
  • [詩想과 세상]전설 바다의 밤물결
    전설 바다의 밤물결

    골목이 어제보다 어둡다 그것은 골목 초입의 빨래방이 어제보다 어두운 탓이다 빨래방이 어제보다 어두운 것은 한 사람이 빨래방에 있어서다 그 사람의 앉은키만큼 노란빛이 사라져서다 통유리창 너머로 그 사람의 등을 오래 쳐다본다 그 사람의 등으로 가서 등의 중심으로 가서 나는 백열등을 하나 켤 수도 있으리라 백열등 아래 어항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거기서 인두겁을 벗고 부드러운 비늘을 드러낼 수도 있으리라 나는 밤물결을 누비는 인어가 된다 목소리를 잃는 대신 한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다 빨래방에 앉아 있다 그러한 과거를 떠올리면서 장이지(1976~)시인은 지금 골목 초입 빨래방에 서 있다. 빨래방은 오늘 어둡다. “빨래방이 어두운 것은” 한 사람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빨래방에 앉아서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 사람의 등”을 오래 쳐다본다. 그에게 다가가 백열등을 켠다.불을 켜는 순간, 백열등 아래로 어항이 생겨난다. 어항 속에서 밤바다가 펼쳐진다. 어디...

    2025.05.25 20:45

  • [詩想과 세상]화인 火印
    화인 火印

    우리는 더이상 자고 있지 않았다, 우울의 시계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그리고 시곗바늘은 채찍처럼 휘었다,그리고 시곗바늘은 재빠르게 뒤로 되튀어 피가 맺힐 때까지 시간을 채찍질했다,그리고 당신은 차오르는 어스름에 대해 말했다,그리고 당신 말들의 밤에 열두 번 나는 당신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밤이 열렸고 열린 채 머물렀다,그리고 나는 눈 하나를 밤의 품에 안겨주고 다른 하나는 당신 머리칼 속에 땋아주었다그리고 그 두 눈 사이에 도화선을 얽히게 했다, 열린 정맥을 ―그리고 어린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다. 파울 첼란(1920~1970)오월이 오면, 파울 첼란의 시가 떠오른다. 아우슈비츠, 검은 우유, 암호, 가스실, 유골단지 이런 단어들을 지나갈 때마다 광주의 골목 어딘가에서 소년, 소녀들이 달려와 살려달라고 등 뒤에서 소리치는 것 같다.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시인의 영혼은 언제나 “우울의 시계장치” 속에 누워 있었다. “시곗바늘은 채찍처럼 휘었...

    2025.05.18 19:53

  • [詩想과 세상]80㎝
    80㎝

    너의 반쯤 감은 눈동자아니 반쯤 뜬 눈동자너를 잊을 수 없게 하네나를 견딜 수도 없게 하네어린이집에 간 지 겨우 닷새째이불을 씌우고 베개를 올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너의 발버둥과 파닥거림이 이어지던 14분네 어미 보티늉은 네가 누운 작은 관에털신과 장갑을 함께 넣었단다영상통화로 입관식을 지켜보던 네 외할머니는베트남 하띤에서 오열하는구나나는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얼음장 같아 얼른 손을 뗐지만손바닥엔 화인이 찍히고 말았구나김선향(1966~)어린이집에 맡겨진 베트남 아이가 있었다. 낮잠을 자지 않아 영원히 숨을 쉬지 못하게 된 아이. “80㎝”의 작은 아이가 발버둥 치다 멈춘 그 시간, 엄마는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아직 살아 있었던 14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조여오던 질식의 14분 동안, 아버지는 공장 일을 하다가 허리 수술을 받고 누워 있었다. 한국 사람처럼 돌잔치 때는 백설기를 돌리고 싶었다던, ...

    2025.05.11 20:12

  • [詩想과 세상]벽

    벽에는 푸른 하늘과 연못과 물고기도 있고 눈이 내릴 것이다벽에는 아이가 살고 아이는 혼자 못가에 앉아서 물고기를 보고 눈이 쌓인 밤엔 빨간 물고기 금 간 벽으로 흘러나가고벽 속의 남자는 침묵을 하고 간장독처럼 늙은 여자 짜디짠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남은 벽이니까 그림을 그리는 건 어때? 아이가 말한다물고기와 눈과 사람이 그려진 벽이 헐리기 직전 벽 속의 남자는 침묵을 밖으로 던진다깨진 벽돌처럼 비스듬히 날아오는 그걸 보며 누군가 소리친다놀라운 일이야, 저 속에서도 행복이란 걸 생각하다니이기성(1966~)거대한 벽을 하나 넘고 난 뒤, 우리의 일상은 조금은 안온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겨울 눈보라의 광장에서 간신히 되찾은 봄날의 따스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지금 우리는 위험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시인이 그린 벽에는 “푸른 하늘과 연못과 물고기”가 있다. 아이와 함께 남...

    2025.05.04 20:26

  • [詩想과 세상]무한 타월
    무한 타월

    옥상에 올라가 수건을 걷었다. 수건은 참 많은 날을 기억하는군. 이건 돌잔치, 저건 9지역 축구 대회, 어느 날은 서울남부교도소 방문 기념일. 돌상 앞에 앉은 내가 지폐 대신 국수를 쥐고, 오빠가 기세 좋게 찬 공이 골대 밖으로 튕겨 나가고, 푸른 수의를 입은 아빠가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날. 수건을 나눠 주며 몰래 한숨을 쉰 엄마가 있다. 수건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오빠가 있다. 비린내가 물씬 나는 수건에 얼굴을 묻고 비는 엄마가 있다. 어쩌다 이 많은 수건이 내게 왔을까. 나는 마른 수건을 개며 칸을 채웠다. 수건을 작게 접는 동안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무언가 쥐여 주었다. 하얀 소창 수건에 ‘축 고희’라고 적혀 있다. 내 것이라고 했다.이젠 다 접은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것도 안 보이게 눈부신데 거기부터는 내가 모르는 곳. 그리고 이 만화는 여기서 끝난다. 김보나(1991)수건은 매일 젖거나 마르면서 우리의 ...

    2025.04.27 20:30

  • [詩想과 세상]이것이 날개다
    이것이 날개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명뿐이다.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점심식사 중이다.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일그러뜨리며 발버둥...

    2025.04.20 20:18

  • [詩想과 세상]무

    시골집 텃밭에 쭈그려 앉아 무를 뽑았다희고 투실투실한 무였다너희들 나눠 주고도 이걸 다 어떻게 하냐시장에 나가서라도 팔아 볼거나어머니는 뜻하지 않은 욕심이 생겼다머릿속을 텅 비게 해 주는 무였다손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마음은 쉬었다뽑아낸 자리마다 근심을 묻었다이 무를 숭숭 썰어 넣고 국을 끓이면 얼마나 시원하려나내 근심 묻은 자리마다 무가 다시 자라날 것을어머니도 알고 나도 알았다애초에 어머니도 무였고 나도 무였으니그러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하상욱(1967~2023)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을 읽는다. 시인은 ‘달나라 청소’라는 상호가 적힌 명함을 들고 다니면서 계단 닦는 일을 했다. 그는 청소용품을 차에 싣고 어디든 달려갔을 것이다.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계단을 닦다가 자신을 비춰보기도 했을 것이다. 시인은 어느 날인가 시골집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텃밭에 쭈그려 앉아 무를 뽑았다”. “희고 투실투실한 무” ...

    2025.04.13 21:24

  • [詩想과 세상]봄의 정치
    봄의 정치

    봄이 오는 걸 보면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생각이 든다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얼음이 풀린다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떨지도 않고 걷는다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따뜻한 눈송이들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하늘을 올려다본다단단히 감고 있던 꽃눈을조금씩 떠보는 나무들의 눈시울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나의 딸들은새 학기를 맞았다 고영민(1968~)그 긴 겨울도 이제 끝이 났다. 기다리던 봄은 쉽사리 겨울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길에서 자주 미끄러졌다. 우리는 봄을 재촉하려고, 차가운 얼음 바닥에 앉아 종종 밤의 눈사람이 되었다. 눈사람이 된 우리는 빛들을 한 송이씩 들고 봄의 길목을 다듬었다. 봄이 결국 ...

    2025.04.06 20:34

  • [詩想과 세상]곡비
    곡비

    새벽부터 지붕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가 열려가슴을 쓸어내렸다큰 불길 잡히면 또 하나 잡히겠지앞이 보인다 싶으면실핏줄 돌게 마련이지 하다가왜 이 비는 타버린 폐허 위에 내리는가왜 산불은 해마다 돌아오는가처마 끝에 앉아서꽃망울 터지고 연둣빛 틔워 올리는앞산을 바라보는 눈길이 젖는다은 비가 내리고타버린 것들 위에 비는 내리는데집안으로 들인 걸음마다 생기가 돌고들판으로 나갈 모종판 챙기는 손길이 젖는데산기슭 아래속 시커멓게 내려앉아젖지 못하는 사람들함순례(1966~)산불이 몇날 며칠 동안 지나간 곳의 마을과 숲은 온통 잿더미로 변했다.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산속의 나무와 동물들도 함께 울부짖으며 비를 기다렸을 것이다. 비가 곡비(哭婢)처럼 대신 울어주면 좋으련만.곡비는 대신 울어주는 자. 시인은 곡비가 되어 타인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큰 불길 잡히면 또 하나 잡히겠지” 기대했지만...

    2025.03.30 20:53

  • [詩想과 세상]밥이 끓는 동안
    밥이 끓는 동안

    밥이 끓는다 현재는 끓는 밥이다배부르지 않다 맛볼 수도 없다뚜껑을 열어볼 수도 없다현자들은 현재만을 살라고 충고하지만현재를 살아볼 도리가 없다지금은 끓고 있을 뿐이다끓고 있는 지금 내가 먹는 것은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허공이다허공만이 실재라는 듯이현재는 허기다 주린 배로 사냥에 나선피에 젖은 발톱이다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부러진 날개다지금을 먹을 수 없다 죽을 지경이다현재는 끓고 있는 창세기다 백무산(1955~)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밥이 끓고 있다. 한 톨의 볍씨가 밥상에 오르는 것은 온 세계가 함께 참여하는 일이자, 거대한 순환의 과정일 것이다. “현재는 끓는 밥”이라서, “배부르지 않다 맛볼 수도 없”고 “뚜껑을 열어볼 수도 없”다. 시인은 ‘현재성’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밥’을 통해 되짚어보게 한다. 현자들은 “현재만을 살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의 삶 자체가 지옥이다. 당장 먹...

    2025.03.23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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