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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
  • [詩想과 세상]하여간, 어디에선가
    하여간, 어디에선가

    안녕,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박승민(1964~)“안녕,”이라고 시작하는 이 시는 “지구인”으로는 마지막 인사지만 전혀 슬프지 않다. 죽음의 문턱에 선 자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안부 같기도 하다. 시인에게 “죽는다”라는 단어는 “...

    2024.09.01 20:20

  • [詩想과 세상]빌라에 산다
    빌라에 산다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기차표 옆에서 운동화처럼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햇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데 주제넘게도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그런데, 어머니는 왜서 자꾸 어디니이껴 하고 물을까 안현미(1972~)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시멘트로 사방에 벽을 친 회색 빌라에 모여 혼자인 듯 함께 산다. 옆집, 앞집, 윗집, 아랫집이 내는 왁자한 기척이나 비명들을 함께 들으며 “숨죽이며” 산다. 커다란 울음통...

    2024.08.25 20:38

  • [詩想과 세상]돌이 천둥이다
    돌이 천둥이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사람을 뒤덮고소원을 뒤덮고울분을 뒤덮고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병을 고치는 사람들.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엄마, 하고 부르면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아주 오래전돌로 하늘을 내리치면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울 곳이 없어돌 속으로 들어왔다.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이재훈(1972~)돌이 있었다. 돌돌돌 구르는 돌은 우리 이전에도 있었고, 우리 이후에도 비바람과 파도 속에서 계속 태어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슬픈 짐승’이 되어 주머니 속에 돌멩이 하나씩 숨기고 산다. 세상을 향해 던져질 돌멩이는 조금씩 자라고 있다. 시인은 돌에서 천둥소리를 듣는다. “아득히 높은 곳”...

    2024.08.18 20:40

  • [詩想과 세상]마을
    마을

    자연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라는 당신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정적에 묻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얼마나 무거운 게 자연인지 안다.나일강 반사된 햇빛에 마르면서도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스핑크스처럼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깊은 우수로 덮쳐온다.들러붙은 정적에는 자연 또한 포로이다.자연은 아름답다,라는지나가는 여행자 감상은 젖혀두어야 한다.거기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던 사람과거기 아니면 이어갈 수 없는 목숨 사이에서자연은 항상 다채롭고 말이 없다. 떠들썩한 날들을 살아본 사람이라면안다 정적의 끝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왜 도마뱀은 일직선으로 벽을 오르고왜 매미는 천년의 이명(耳鳴)을 울리는지도,모두들 떠난 마을이제 정적이 어둠보다 깊다.김시종(1929~)유령처럼 멀고 험한 땅을 배회하는 영혼들이 있다. 디아스포라를 사는 경계에 선 사람들, 조국을 등지고 떠돌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우리의 오래된 얼굴들이다...

    2024.08.11 21:11

  • [詩想과 세상]위험구간
    위험구간

    사랑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못한 마음엔불현듯,이라는 구간이 있다장마 한복판 사거리 이정표 아래서나산마루 노을 질 때 걸리는 붉은 신호등횡단보도를 지운 폭설 앞에서 함부로 펼쳐지는 사랑의 구간어쩌면,이라는 비보호 좌회전성급히 지나온 과속방지턱멈칫거린 황색 경고등이나그럼에도,라는 가로수불안을 단속하는 구간 속도 측정 카메라와부디,라는 유턴 표지판어쩌자고 우리가 만났나 싶다가어쩌자고 우리가 헤어졌나 싶다가다시 페달을 밟는 초록 신호등사랑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못한 마음엔작살나고도 정신 못 차린박살 내고도 지우지 못한위험 구간이 있다권선희(1965~)당신은 늘 달린다. 앉아서도 달리고, 자면서도 달린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달린다. 멈출 수 없어서 매일 달린다. 위험한 구간에 이르면 이탈하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 달린다. 오로지 달리기 위해서 달리는 사람처럼.당신은 ...

    2024.08.04 20:37

  • [詩想과 세상]탑동
    탑동

    누군 깨진 불빛을 가방에 넣고누군 젖은 노래를 호주머니에 넣어여기 방파제에 앉아 있으면 안 돼십 년도 훌쩍 지나버리거든그것을 누군 음악이라 부르고그것을 누군 수평선이라 불러탑동에선 늘 여름밤 같아통통거리는 농구공 소리자전거 바퀴에 묻어방파제 끝까지 달리면한 세기가 물빛에 번지는 계절이지우리가 사는 동안은 여름이잖아이 열기가 다 식기 전에 말이야밤마다 한 걸음씩 바다와 가까워진다니까와, 벌써 노래가 끝났어신한은행은 언제 옮긴 거야현택훈(1974~)시인은 제주에 살면서 제주어로 시를 쓴다. 시인이 쓴 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탑동 방파제 앞에 다다르게 된다. 오래전 탑동은 너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지던 곳.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아이들은 보말과 깅이를 잡던 곳. 먹돌들이 구르다가 물처럼 울던 곳이었다. 어느새 먹돌들은 바다와 함께 사라져 광장이 되었고, 위험한 파도가 넘실대던 곳에는 건물들이 고속 엘...

    2024.07.28 20:36

  • [詩想과 세상]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다 무덤으로 향한다. 뚜렷한 희망과 두려움 없이마지막 남은 힘을 다 쓰고 나면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만나겠지.그리고 자신에게 묻겠지.하필이면 멀고 험한 길을 택해서왜 모르는 곳을 향해 외롭게 걸었을까?그리고 왜 온 힘을 들여그렇게도 급하게 걸어 왔을까?조용히 기어가는 지렁이도 무덤 바로 앞에서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막심 박다노비치(1891~1917) 우리 앞에는 언제나 여러 갈래 길이 있었고, 수많은 별이 안개에 젖은 길들을 밝혀 주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거나 갈라지면서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처럼 살기 위해 언제나 열심히 살았다. 언제부턴가 ‘열심’이라는 말이 우리 대신 살기 시작했다. ‘진심’이라는 말이 우리 대신 바빴다. 벨라루스의 시인 막심 박다노비치의 이 시는, 얼핏 노년에 깨달은 인생의 허무나 달관으로 읽히지만, 시인의 생애를 알고 ...

    2024.07.21 20:39

  • [詩想과 세상]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아버지는 죽은 할머니의 옷가지를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마당 귀퉁이에서. 장롱에서 꺼내 온 스웨터. 할머니의 새 옷. 가장 아끼던 피부. 오그라든다. 솟구친다. 연기가 넘친다. 독하다. 마스크도 없이 아버지는 할머니를 한번 더 태운다. 나는 그 옆에서 한번씩 지붕 위로 솟구치는 불씨를 바라본다. 포항은 바람이 많은 도시. 철이 많은 도시. 굴뚝이 많은 도시. 비가 없는 도시. 죽음 앞에서 불 앞에서 나는 심부름을 잘하는 아이. 한나절 동안 아무 말 않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죽음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잖아. 해 지는 쪽에서 한번 더 불탄다. 생긴 대로 살라는 말, 생긴 대로 먹으라는 말,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말. 나는 운동화를 꺾어 신고 풀뱀처럼 울었다. 나에게서 아버지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그을음 같기도 하고 할머니 방 안에 날리던 용각산 가루 같기도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나를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죽지 못해 살았던 작은 방에서. 이...

    2024.07.14 20:35

  • [詩想과 세상]내겐 닻나무가 있다
    내겐 닻나무가 있다

    두 평짜리 방 안이 일망무제다화분 하나가 들어오면서난바다 한가운데 구부러져원을 이룬 수평선처럼 방이 출렁거린다야생의 말잔등이라도 올라탄 듯 파도가 치면잴 수 없는 수심을 향해닻 내리는 나무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지만떨어진 닻은 끝없는 심해로 내려간다과외받는 아이들이 다 잘려 나갔지만병든 어머니는 밥보다 더 많이 먹는 약을 끊을 수 없고차라리 닻줄을 끊어 버릴까 망설이다무저갱 속에서 허방 디디며 길을 찾는다닻을 내릴 때마다 닻나무에서 이파리가 떨어진다물벼락과 파도를 얻어맞고 나자빠졌다가힘겹게 나를 부축하는 일도 신물 난다내 닻나무는 꽃을 피우기나 할까떨어진 나뭇잎을 언제나 끌어올려 돛을 올릴까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바닷속다시 닻을 내 안으로 빠뜨린다김시언(1963~)시인에겐 동아줄이던 “과외”도 다 끊긴 어느 날. 수심이 가득한 방 안으로 “화분 하나가 들어”와 함께 살기 ...

    2024.07.07 20:36

  • [詩想과 세상]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겠습니다.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시야가 흐려지겠습니다.도로는 미끄럽겠습니다.한낮에는북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점차 날씨가 개는 곳도 있겠습니다.한밤중에는전국에 걸쳐 화창한 날씨를 보이겠습니다만, 남동부 지방에서는 곳에 따라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겠습니다.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 계신 분들에겐우산이 유용하겠으니외출 시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열한 번째 시집 <콜론>(2005)에 수록된 이 시는 기상 캐스터의 날씨 예보를 패러디하고 있다. 내일의 날씨를 아침, 한낮, 한밤중으로 나누어서 쓰고 있다.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여 당신의 눈빛이 흐려질 수도 있다. “한낮에는” 날씨가 점차 맑아질 수도 있고, ...

    2024.06.3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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