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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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숨] 늦은 예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늦은 예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에게 잘 알려주는 그림책이 한 권 있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가 1973년에 발표한 그림책 <산타 할아버지>는 주인공인 산타 할아버지가 12월24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아니, 또 크리스마스잖아!”창밖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는 눈이 싫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하면서 “겨울은 너무 싫어!”라고 투덜거린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은 직장인의 월요일 아침 같다. 악천후 속에서 산더미 같은 선물의 배송을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한다. 할아버지는 12월 내내 과중한 노동으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허허 웃기만 하는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던 산타 할아버지에게도 과로로 인한 짜증이 있으며 어서 일을 마치고 싶다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은 이 그림책에서 배운다.크리스마스 새벽 무사히 할 일을 마친 산타 할아버지는 출근...

    2022.08.13 03:00

  • [숨] 청음 훈련
    청음 훈련

    피아노를 적당히 칠 줄 알았던 중학생 시절을 지나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전문적인 음악 수업을 들었던 때,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나의 귀였다. 그건 대체로 학교에서 매주 한 시간씩 했던 시창 청음 수업 때문이었다. 오선보에 적힌 선율을 보고 노래하거나, 들려오는 음을 파악한 후 오선보로 옮겨 적는 것이 수업의 주 목적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악보 위의 기호와 내 머릿속에 있는 그 소리를 하나하나 꿰맞춰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시창 청음 수업은 기다려지는 수업 중 하나였다. 의외의 선율을 듣고 노래하는 재미도 있었고, 훈련을 통해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걸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주로 피아노와 함께했지만, 간혹 우리는 악기로 연주하지 않은 다른 소리도 음의 개념으로 들어보려 했다. 칠판을 긁는 소리를 내거나, 목소리로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내며 음높이를 알아맞혀 보라고 하는 식이었다. 세상엔 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소리가 훨씬 더 많았지만, 이제 막 머릿속...

    2022.08.06 03:00

  • [숨]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주요한 방식은 범주화이다. ‘나와 그들’이라는 간단한 구분부터 ‘종속과목강문계’라는 체계적인 분류까지, 우리는 수많은 범주를 만들어 복잡한 세상을 협소한 인식 틀에 구겨 넣는다. 그리고 “세상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범주화는 많은 경우 자기중심적인 위계질서와 맞물려 작동한다. 예컨대 ‘나와 그들’이라는 범주화는 나와 다른 ‘그들’을 상정하고, 그들이 내 삶에 잠재적 위협인지를 가늠하려는 시도이다. 어떤 이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다른 이는 ‘그들’의 공격을 피해 숨어든다. 동성애자, 노인, 맘충, 사배자, 이대남, 자폐 등 수많은 범주화가 날마다 끝없이 생성되며 사회의 질서와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신체적, 정신적, 혹은 물신적) ‘장애’를 가진 집단을 찍어낸다.‘장애’는 흔히 신체적 개념으로 인식되지만, 본질적으로 사회적 개념이다. H G 웰스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거주민 모두가 맹인인 고립된 마을...

    2022.07.30 03:00

  • [숨] 작가가 되고픈 청소년들에게
    작가가 되고픈 청소년들에게

    요즘 중·고등학교에서는 ‘작가와의 만남’을 많이 한다. 불과 20여년 전,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작가라는 사람을 보는 건 대단히 희귀한 일이었다. 작가뿐 아니라 그 누구든 학교에 와서 교사 대신 교탁 앞에 서는 일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나는 한 번도 작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채로 글을 써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로 적성이라든가, 창의적 체험 활동 수업이라든가, 도서관 행사라든가 하는 이유로 거의 모든 학교가 한 학기에 한 번 이상은 작가를 초청한다.학생들을 만나면, 적게는 30여명, 많게는 100여명 모인 그들에게 종종 묻는다.“혹시 작가가 되고 싶은 학생이 있나요?”아무도 손을 들지 않거나, 한두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거나 한다. 하긴, 별로 매력 있는 직업은 아닐 것이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다. 누군가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그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어보기로 한다.“언젠가 자기 이...

    2022.07.23 03:00

  • [숨] 어린이의 밥그릇은 어른이 챙겨야 한다
    어린이의 밥그릇은 어른이 챙겨야 한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내 기억은 아이들이 꽉 찬 운동장으로 시작한다. 인파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키대로 설 자리를 정해주었다. 나는 81번이었고 1학년은 20반까지 있었다. 그때 만난 다양한 친구들이 가끔 생각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늘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들이 있었다. 줄넘기를 들고 엇걸었다 풀어 뛰기를 식은 죽 먹듯 하는 아이, 전날 본 외화의 대사를 외워 성우와 똑같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아이, 연필 하나로 바퀴벌레를 진짜 벌레보다 더 번들거리게 그리는 아이도 우리 반에 있었다. 싸우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반에 한두 명쯤은 그 마음을 알아주어서 크게 서럽지 않았다. 얼마 전 충남과 경북에 있는 한 도시에 갈 일이 있었다. 충남의 도서관에서는 이용자가 거의 60대 이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청도서 중심으로 책을 입고하면 어르신 취향으로 장서가 편중된다고 했다. 재미있는 아동청소년도서를 찾아 갖추려고 노력하는데...

    2022.07.16 03:00

  • [숨] 이론, 사유의 도구
    이론, 사유의 도구

    <케임브리지 서양음악이론의 역사>가 번역·출간됐다. 서양음악 연구자라면 한번은 들춰봤을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재까지의 서양음악이론사를 다루는 핵심 문헌으로, 음악이론가와 음악사가들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다.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만큼 국문 번역본의 무게도 상당하다. 물성만으로도 그 역사를 체감하게 하는 이 책은 1184쪽, 2250g에 육박한다. 국내 음악학자 아홉 명의 공동 번역으로도 총 5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아마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음악이론’의 첫 경험은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과 음계를 배우고, 그것들을 이용해 도-미-솔, 파-라-도 등의 화음을 쌓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논의 또한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다. 이 책의 중심부에는 음을 다루는 방식과 이를 체계화한 이론이 놓여 있고, 역사서인 만큼 각 시대의 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보다 흥미로운 논의들...

    2022.07.09 03:00

  • [숨] 나쁜 교육
    나쁜 교육

    ‘좋은 교육은 무엇인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자 초등학생 아이의 엄마인 내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다. 최근 서울에서 광주로 생활 기반을 옮기면서 더욱 고민이 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는 지역사립대이다. 이전에 근무했던 서울 소재 대학들이 학생들을 학술 논문 생산자로 성장하도록 도울 것을 강조했다면, 지역 소재 대학들은 학생들의 취업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서울과 지역 간의 교육 격차는 지난 수십년 동안 심화되어왔다. 근래는 학력인구 감소로 지역 대학의 생존 자체가 위기에 처한 상태라 한다. 대학들은 정부 재정지원의 근거가 되는 대학평가 점수를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도입하는 한편, 외국 유학생 유치를 통해 재정 확충을 꾀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표면적으로는 대학 교육의 질 강화를 내세운다. ‘학습자 중심 교육’으로 전환하여 ‘국제적인 대학’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는 이러한 시도들 속...

    2022.07.02 03:00

  • [숨] 당신의 도정을 응원하며
    당신의 도정을 응원하며

    가족과 함께 강원 평창에 가서 무언가 자라고 있는 밭을 지나는 길이었다. 저게 뭐지,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아홉 살 아이가 말했다. “아빠, 저거 감자야.” 같이 걷던 아내도 감자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아이에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니 얼마 전 학교에서 감자를 심었다고 했다. 그는 강릉의 작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그뿐 아니라 원주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아내도 감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강원도에서 산 지 20여년이 되어가면서도 감자싹과 고추싹을 구분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듯하다.강릉으로 이주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다. 바다와 가까운 조용한 동네에 산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일곱 살이 된 아이가 바다를 한 번도 못 보았다며 보고 싶다고 했고, 미안한 마음에 그날 강릉을 찾았고,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몇 번이나 바다를 찾다가 아이에게 문득 물었던 것이다. 혹시 바닷가에서 살고 싶으냐고. 그가 좋다고 했고, 아내도 좋다고 했고, ...

    2022.06.25 03:00

  • [숨] 비스킷을 든 아이들
    비스킷을 든 아이들

    ‘캐논, 스트랩, 피스, 버너, 히터, 초퍼, 해머, 연장, 비스킷.’이것은 모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속어다. 이 사물은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수 있다. 열다섯 살 윌이 형을 잃을 때도 그랬다. 윌의 형 숀은 습진으로 피가 날 만큼 몸을 긁는 엄마를 위해 아홉 블록 떨어진 가게까지 갔다 오는 길이었다. 그 가게에서만 습진전용 비누를 팔기 때문이다. 비누를 사오던 숀은 총에 맞아 동생 윌의 눈앞에서 숨을 거둔다. 제이슨 레이놀즈의 청소년소설 <롱 웨이 다운>이야기다. 이 책은 윌이 총기살인범에게 복수하려고 자신도 총을 들고 나와 엘리베이터에 탄 뒤 8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1분 동안에 벌어진 일을 다룬다. 윌은 동네 형 릭스가 동네 깡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숀을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그날따라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서고 탑승자들이 윌에게 말을 건다. 그들은 놀랍게도 죽은 사람들이었다. 무엇 때문에 죽었을까? 사람을 죽이러가는 ...

    2022.06.18 03:00

  • [숨] 끝없이 흘러나오는 음악
    끝없이 흘러나오는 음악

    오랜만에 비행기를 탔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착륙 후엔 기내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확인했다. 기다림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은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이었고, 연달아 비슷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다른 비행기에서 냇 킹 콜의 ‘Unforgettable’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문화 속에서 이들이 어떤 기호로 통용되는지 분명히 알고 선곡해 놓은 듯한 이 음악들은 도착지에 대한 설렘 혹은 떠나온 여행지에 대한 기호화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내 인식에 필터처럼 끼워 넣었다. 딱히 그 장소들을 그렇게 떠올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이런 제목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가 있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 곧 이륙하겠습니다’ ‘밤 비행기’ ‘우리 목적지는 뉴욕입니다’ 등. 여행, 카페에서의 시간, 산책길, 드라이빙 등 수많은 상황을 음악적으로 연출하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속에서 비행기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플레이리스트는 듣는 자의 환경을 ...

    2022.06.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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