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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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숨] 해방, 추앙, 환대
    해방, 추앙, 환대

    한동안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지난주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지리멸렬한 삶을 어떻게 버티고 살 것인가에 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독특한 점은 이 과정이 해방, 추앙, 환대라는 대중문화 상품에는 다소 낯설고 무거운 단어를 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해방’이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표라면, ‘추앙’과 ‘환대’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다. 먼저 드라마는 “추앙하다보면 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추앙은 주요 인물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회적 관계와 대조된다.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에서 주요 인물들의 선함과 예의바름은 오히려 이들의 삶을 갉아먹는다. 이들이 베푸는 친절함(타인을 위한 행동)은 ‘등신’이 되는 지름길로 작동하여 “사람이 너무 싫은” 감각으로 돌아온다. 추앙은 무례한 사람들에게 맞설 수 있는 정서적 연대를 형성하는 방법으로, “조언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하며 응원하는”...

    2022.06.04 03:00

  • [숨] 네가 꿈을 꾼다면 그 시간을 내가 살게
    네가 꿈을 꾼다면 그 시간을 내가 살게

    내가 초등학생이던 1990년대에도 “너는 꿈이 뭐니” 하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어쩌면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모범답안은 대통령, 의사, 변호사, 교사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답하고 나면 그들은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거나 용돈을 주거나 하고 곁에 선 부모님은 흐뭇하게 웃는다. 그 시절의 참 흔한 풍경이었을 것이다.나의 꿈은 꽤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되고 싶은 것을 3개(씩이나) 말해보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1) 농부, 2) 어부, 3) 사냥꾼, 이라고 답한 이후로 꾸준히 그랬다. 모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고 어느 교사에게는 호된 꾸중을 들은 일도 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꽤나 진지했다. 지금에 와서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우선 농부가 되어 내가 기른 농작물을 수확하고 싶었고, 어부가 되어 바다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엄청난 것을 잡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사냥꾼에 이르면 그저 설레는 것이었다. 저 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022.05.28 03:00

  • [숨] 나를 볼 수 없는 거울
    나를 볼 수 없는 거울

    나타샤 패런트의 동화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에 나오는 공주 시얼샤는 모든 것으로부터 숨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요상한 작은 것”이라고 불렀다. 세상은 보란 듯이, 또는 교묘한 방식으로 공격적이었다. 조금 달랐을 뿐인데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너를 이해해주는 곳에 가서 살라는 말을 시얼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얼샤가 살고 싶은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토끼가 빠르게 달리고 매가 바쁘게 날아가듯이 자기 자신에게 가는 길을 찾기로 한다. 그리고 더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몰랐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새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그날부터 시얼샤는 세상을 바꾸는 길에 선다.이번에는 실존 인물 한 사람의 얘기를 해보겠다. 크리스티안 로빈슨은 1986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생후 5개월이었던 어느 비오는 날 새벽, 그는 형과 함께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아이를 두고 어딘가로 떠나버렸고...

    2022.05.21 03:00

  • [숨] 퍼포먼스 펼쳐보기
    퍼포먼스 펼쳐보기

    음악가 진유영은 공연 도중 제사장으로 분해 축문을 낭송하고, 항아리를 망치로 깨부수려 했다. 또 다른 공연에선 팽팽한 붉은 풍선의 표면에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밀었다. 벨라는 작은 노트를 손에 쥐고 적힌 말들을 노려보며 그로울링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발산하던 그의 몸은 형형하게 빛났다. 위지영은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편지봉투에 행운의 편지를 담아 관객 모두에게 건넸다. 봉투엔 이곳으로부터 먼, 지금으로부터 오래전의, 지금은 그의 생사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수신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이들은 모두 음악가였지만 그들의 현장에선 음악 바깥으로 뻗쳐나가는 힘이 느껴지곤 했다. 그건 일종의 제의였고, 명료한 언어 체계 밖에서 발성하는 시간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오래된 이야기에 연루시키는 과정이었다. 음악이 어땠냐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았다. 많은 음악 공연에서 시도했듯 소리의 구조를 따져보자고 덤벼드는 일도 무의미했다. 이들이 어떤 필요에 의해 그런 행...

    2022.05.14 03:00

  • [숨] 냉전과 전쟁 고아
    냉전과 전쟁 고아

    전쟁은 무차별적인 파괴와 더불어 대량살상을 동반하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 고아를 만든다. 미디어가 전쟁의 참혹성을 드러내는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가 고통받는 아이들을 조명하는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보도에서도 민간 시설과 민간인에 대한 폭격, 그리고 피해 아이들의 모습은 러시아의 반인륜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러시아의 비인도적 행태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무고함을 부각하고, 나아가 권위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간 도덕적 우월성 논쟁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가 먼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상에 대해 이야기하듯, 70여년 전 한국전쟁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지역에서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 도덕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역사학자 김태우는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에서 한국전쟁이 냉전 체제의 도덕성 논쟁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이 책은 소련, 중국, 영국,...

    2022.05.07 03:00

  • [숨] MZ세대라는 용어는 ‘폭력의 합집합’
    MZ세대라는 용어는 ‘폭력의 합집합’

    고등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 나는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1980년대생들을 N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기의 몇 가지 CF 문구가 떠오른다. “N세대는 물을 먹지 않는다”라는 음료 광고, “N세대의 소통법”이라는 통신사의 문자 요금제 광고 등이. 그 이전까지 ‘베이비붐세대’라든가 ‘386세대’ ‘X세대’라고 한 세대가 규정되는 것을 보며 나의 세대 앞에는 어떤 알파벳이 붙을까 괜히 궁금하고 기대되었다. N은 ‘네트워크’, 그러니까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W세대(2002년 월드컵을 경험한 젊은 세대), M세대(2000년 이후 청년이 된 밀레니얼, 모바일에 익숙한 세대) 등으로 규정되다가, 이제는 MZ세대로 불리기에 이르렀다.얼마 전 <다정한 개인주의자>라는 세대론이 출간되었다. 1970년대생 X세대인 저자는 자신의 세대가 가진 성향을 ‘다정한 개인주의’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이 K컬처의 주역이...

    2022.04.30 03:00

  • [숨] 안녕, 친구, 고마워!
    안녕, 친구, 고마워!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인솔하는 수녀님의 뒤를 따라 “안녕!”과 “올라!”를 외치며 그림책 전시장에 들어온 것은 아침 10시쯤이었다. 순간 말하는 레몬들이 굴러오는 줄 알았다. 잠을 잘 자고 난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상쾌하고 단단하다. 이틀 넘게 비행기를 타서 몽롱한 상태였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나는 지금 콜롬비아 보고타국제도서전에서 우리 그림책을 알리는 일을 돕는 중이다. 100권이 넘는 우리 그림책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함께 왔다. 해발 2450m인 유서 깊은 이 도시에서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백두산 천지에 앉아 읽는 것과 비슷하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에 오른 김효은, 라가치상을 받았던 박연철, 정진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가 안데스산맥의 구름 모자 아래에서 독자들을 만나러 왔다. 한국관 테마는 공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준비한 그림책관은 ‘목소리의 어울림’이 주제다. 그림책은 세상의 여러 목소리를 그림으로 보여준다. 작가를 성장시키는 것은 ...

    2022.04.23 03:00

  • [숨] 지금, 우리의 피아노
    지금, 우리의 피아노

    이제는 온라인 중고 마켓에서 피아노 매물을 보는 일이 낯설지 않다. 상태 좋은 악기도 있지만,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올라와 있거나 운송비만 내고 가져갈 수 있는 낡은 피아노도 눈에 띈다. 그 피아노들은 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던 차, 얼마 전 그들의 행방을 알게 됐다. 몇몇 조율사들이 그런 피아노를 찾아가 여전히 쓸 만한 것들을 고르고, 누군가 폐기물로 처리한 피아노를 수거해와 이리저리 고쳐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모인 피아노들은 이름 없는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드물게나마 중고 피아노를 구하는 구매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된다고 했다.우리 집에 처음 피아노가 들어오던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나는 이 악기와 더불어 그럴싸한 미래를 함께 선물받은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연습하던 엄마의 꿈이 나에게로 전해지는 날이기도 했다. 동네마다 한두 개씩 꼭 있던 피아노 학원에서 꽤 즐겁게 음악을 배우던 나를 위해, 할...

    2022.04.16 03:00

  • [숨] ‘노동 예능’을 보는 즐거움
    ‘노동 예능’을 보는 즐거움

    몇 해 전부터 유명 연예인들이 일하는 것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주요한 예능 장르로 자리 잡았다. tvN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 <윤스테이> <어쩌다 사장> 등이 연예인의 노동을 볼거리로 상품화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 또한 이러한 ‘노동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우리가 거기서 느끼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노동 예능’의 포맷은 유명 배우들이 외진 공간(국내의 농촌이나 어촌, 산촌 또는 외국)에 모여서 함께 일하는 과정과 그 안에서 형성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사회적 관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배우들 간의 관계로, 출연자들은 보통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해 온 사람들로 이들이 공유하는 추억과 친밀감은 ‘노동 예능’이 판매하는 가장 주요한 상품이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망은 출연자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매개체로도 전시된다. 즉,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들이 출연해 고생하는 친구나 동료를 ...

    2022.04.09 03:00

  • [숨] 최상급 추천의 언어
    최상급 추천의 언어

    책의 뒤표지에는 대개 300자 내외의 추천사가 한두 개씩 수록되어 있다. 유명한 사람이거나 그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할 것이다. 추천사의 분량이나 비용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한 줄에 100만원을 받는 사람도 있고 수백 자를 쓰고서도 10만원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한 글자에 매겨지는 가격을 감안하면 추천사는 가장 비싼 집필 활동임에 분명하다.그다지 유명한 작가가 아닌 나에게도 종종 추천사를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한 달에 두세 건은 꼭 오는 듯하다. 우선은 내가 이 추천사를 쓰기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고민이 되지만, 그렇게 판단했으니 연락이 왔겠지 싶다. 원고를 살펴보고 쓰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그 분량과는 별개로 부담이 찾아온다. 이만큼 쓰기 어려운 글도 없는 듯하다. 그 어떤 글보다 잘 써야 하는 글인 것이다. 이 책이 잘되기를 바라는 편집자의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나. 내가 받는 추천사만큼 출판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책을 적어도 수십 권은 더 팔아야 할 텐데 ...

    2022.04.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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