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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 음악을 기록하는 일
    음악을 기록하는 일

    언젠가의 한겨울, 음악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도서 대출이나 장서 관리, 신간 악보 분류 같은 일을 하나 싶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분류번호 스티커도 없이 뭉텅이로 놓여 있던 몇만 장의 LP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음악도서관 2층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악보 서가가 있었는데, 그 서가 사이엔 뜬금없이 오래된 나무 문이 하나 있었다. 조금 으스스한 기운이 풍겨 평소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이었지만 바로 그곳이 내가 일할 곳이었다. 제대로 된 이름 없이 ‘도서관 뒷방’으로 불리던 그곳은 생각보다 꽤 넓었고, 매체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에 관한 온갖 자료가 널려 있었다. 옛날에 사용하던 도서카드, 알 수 없는 이의 자필 악보, 오래된 논문집, 누군가가 증정한 도서들, 이제는 음악도서관에서 열람대상으로 제공하지 않게 된 LP와 SP 등.도서관은 각자의 지향점에 맞게 수많은 자료를 수집·분류·제공하지만, 그 체계에 미묘하게 들어맞지 않는 자료들을 곧장 제공할 수는 없다는 사실...

    2021.12.25 03:00

  • [숨]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지금 서울역 맞은편 양동 쪽방촌에서 살고 있는 이석기(가명)의 생애 구술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일곱 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했어요. 키도 작은데 논 물구덩이에 푹푹 빠지고 지게로 나락 져내고, 돈은 없이 밥이나 얻어먹는 머슴살이를 한 거지요. 열네 살 때 친구가 남의 집 쌀가마 하나를 훔쳐 같이 짊어지고 나오다 잡혀서 소년원에서 몇 개월 살고 나왔어요. 구두닦이, 넝마주이, 짐꾼, 청소, 심부름, 그냥 닥치는 대로 하면서 겨우 먹고살았어요. 가게일 도와주다 도둑 누명을 쓰고 소년원에 또 갔다 나와서, 열차 타고 무조건 서울로 왔어요. 주로 서울역과 남대문시장에서 파지를 주어 팔거나 짐 나르는 일을 했어요. ‘니야까’나 창고에서 자고 남산에서 노숙도 많이 했어요. 어느 겨울 남산 벤치에서 자다 새벽에 깼는데 눈이 수북이 쌓였더라고요. 저 눈에 묻혀 얼어 죽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에 울음이 나오더라고요. 전남 목포 신안에 있는 염전에 갇혀서 10년 정...

    2021.12.18 03:00

  • [숨] 일과 삶이 조금 더 즐겁길 바라며
    일과 삶이 조금 더 즐겁길 바라며

    <대리사회>라는 책을 쓸 때만 해도 대리운전은 나에게 온전히 생계를 위한 노동이었다. 그 책이 나온 지도 5년이 지났지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요즘도 나에게 묻는다. 요즘도 대리운전을 하고 계신가요, 하고.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한다. 하기는 하는데, 이걸 노동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나는 작은 스타트업의 대표로 일하면서 평일에는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대리운전 콜을 켠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처음 밤 10시의 강남에서 콜을 켰을 때, 나는 알았다. 아아, 여기가 그래서 강남이구나. 반경 1㎞ 이내에 나를 기다리는 수십명의 사람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나는 집이 있는 지역으로 가는 콜을, 아니면 내일 강의가 있는 지역의 콜을 본다. 내가 가고 싶은 어디든 갈 수 있는 듯하다. 그렇게, 원래는 교통비를 지불하고 1시간은 걸려야 갈 거리를, 몇만원의 대리운전비를 받고, 더욱 빠르고 편하게 도...

    2021.12.11 03:00

  • [숨] 문어로부터 탈출하기
    문어로부터 탈출하기

    “하늘 끝까지 올라 실바람을 끌어안고 날개 달린 천사들과 속삭이고 싶어라”라는 구절이 나오는 노래가 있다. 30년 전에 발표된 ‘하늘나라 동화’다. 교육방송 라디오에서도 가끔 나오는데, 가락을 따라 부르다가 노래 속 어린이의 심정과 상황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연이 있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나 외로움이 담긴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이 어린이가 어떤 이유로 고립되어 있었다면, 예를 들어서 아동 학대나 폭력의 감춰진 피해자였다면, 그래서 동산 위에 올라가 천사 얼굴, 선녀 얼굴을 그리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동’이나 ‘어린이’라는 검색어를 넣고 뉴스를 검색해보면 어둡고 무거운 소식이 줄줄이 올라온다. 애통한 이야기들이어서 지면에 다시 옮기기가 어렵다. 어제도 태어난 지 29일 된 딸이 잠을 자지 않고 운다는 이유로 때려서 숨지게 한 친아버지에 대한 재판 결과가 보도되었다. 검찰이 구형한 형량은 징역 20년이었지만 재판부...

    2021.12.04 03:00

  • [숨] 보이지 않는 잉크
    보이지 않는 잉크

    첫 책의 원고를 마무리했을 무렵, 해방감과 동시에 막막함이 찾아왔다.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떤 힘으로 글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이걸 왜 썼는지를 생각해봤다. 자아실현? 생계유지? 자기 수련? 빤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모두 자기만족적인 것들이었다. 나 하나를 만족시키자고 이렇게 노력했다니. 이럴 바엔 차라리 다른 데서 만족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왜 예술에 대해 쓰나. 욕심이 아닌 자그마한 당위가 필요했다. 예술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확신을 찾고 싶었다.그즈음 나는 뉴욕에 머무르고 있었고, 탈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니 모리슨의 부고를 들었다. 그는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빌러비드’ ‘재즈’ 등을 쓴 작가이자 편집자였다. 뉴욕 곳곳에선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들이 생겨났고, 라디오에서도 그가 남긴 이야기를 다시 전했고, 책방들은 모리슨만을 위한 서가를 마련했다. 그중 한 서점에서는 모리슨이 남긴 말 중 일부를 발췌...

    2021.11.27 03:00

  • [숨] 민주당 버전 사기극 코미디
    민주당 버전 사기극 코미디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2007년 10월 말 노무현 정부의 법무부안이고,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정권 말기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2002년 대선 후보 당시 노무현의 공약이었다. 노무현은 약속을 지킨 것인가? 당시도 지금도 나는 그의 진의를 믿지 않는다. 그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의지가 없었고, 임기 말 정부안 발의로 면피성 약속이행만 하는 척했다. 노무현의 진의가 어떻든 정부법안에 대해 인권운동진영은 다양한 의견들을 모아나가는 활동을 했다. 일부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반대진영의 난리굿판이 벌어졌고, 결국 법무부안조차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등 7개의 차별사유를 삭제한 채 주저앉았다. 차별금지법이나 성소수자운동에 대한 집단적 난리굿판은 그때 시작되었고, 시민사회의 적극적 법 제정 활동의 시작도 그때부터다. 노무현은 소란만 터뜨려놓고 물러났고, 이명박이 들어섰다. 기대할 것 없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시민사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2021.11.20 03:00

  • [숨] 아파트란 무엇인가
    아파트란 무엇인가

    대리운전을 할 때, 신도시의 아파트가 목적지가 되면 걱정이 찾아왔다. ‘나가는 길을 잘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요즘의 대단지 아파트는 마치 미로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기 어렵다. 내가 심각한 길치인 것을 감안해야겠으나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아이의 한글 선생님도 30분 정도 수업에 늦고서 했던 말이 “새로 생긴 아파트에 갔다가 나오는 길을 못 찾아서 한참 헤맸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 복잡해진 길들은 외부와의 단절, 그리고 폐쇄를 선언한 요즘의 아파트를 그대로 보여준다. 기본 브랜드에 서브 브랜드를 덧붙이고, 거대한 정문을 세우고, 입주민이 아닌 사람이 오가는 것을 통제하고, 입주민만 이용 가능한 커뮤니티 시설을 확장해 나간다.며칠 전 모 아파트 입주민 대표는 아파트의 놀이터에 놀러온 입주민이 아닌 아이들에게 “남의 아파트 놀이터에 오면 그건 도둑이야”라는 말을 하고 그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이 2021년에 들은 가장 놀랍고 아픈 기...

    2021.11.13 03:00

  • [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

    세차장, 편의점, 미용실. 우리 주위 많은 곳에 일하는 청소년이 있다. 우리들은 택배 배달 알림음을 깜박 놓치고 1초 만에 배달 완료 문자를 삭제하듯이 일하는 청소년들의 존재를 잊는다. 그들은 급여를 착취당하기도 하고 가족 내의 환자를 돌보면서 급여와 무관한 곳에서 일하기도 한다. 저숙련 노동자로서 재해의 위험에 방치되지만 실습이 끝나면 위험은 없는 일처럼 지워진다. 보호자와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을 간파한 이들에게 폭력이나 성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한 청소년이 또 노동 중에 목숨을 잃었다. 지난 10월 전교조 광주지부는 요트관광 업체에서 잠수 작업 도중 숨진 고교생 홍정운군을 추모하며 특성화고 현장실습 폐지를 촉구했다. 청소년은 돌봄을 받는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누군가에게는 환상이다. 어떤 청소년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중이다. 그가 받은 임금이 정당한지, 부당노동행위는 없는지 살피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다.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하...

    2021.11.06 03:00

  • [숨] 악보를 읽으며 생각한 것들
    악보를 읽으며 생각한 것들

    다섯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오선보 위에 놓인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음표와 쉼표, 그리고 온갖 표현을 지시하는 기호들이 가득한 문서. 오랜 시간 나는 서양음악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을 때마다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음악을 여러 번 곱씹듯 들었다. 악보는 내게 그 음악의 내부 질서와 핵심 정보를 담고 있는 건축도면 같았다. 그 안에서 선율과 화성, 리듬을 분석하고, 그에 내재한 이론적 질서와 구조, 숨은 힌트 같은 부분을 찾아가는 일은 분명 즐거웠다. 서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오선보 안에 숨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악보를 통해 음악이론을 배워가는 과정을 멈추지 않았다.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근현대 서양음악의 악보를 살펴본 후부터였다. 20세기에 등장한 낯선 악보들은 내 머릿속에 형성된 단정한 이론체계를 흐트러트렸다. 예컨대 음표 위에 ×표시가 자리하거나, 박자표와 마디선이 사라지거나, 혹은 오선보나 음자리표 없이 직선과 곡선, 동그라미, 세모,...

    2021.10.30 03:00

  • [숨] 생존을 밑천으로 몸소 쓴 글
    생존을 밑천으로 몸소 쓴 글

    작가나 전문가들의 글보다 기억과 생각의 흐름을 좇느라 오락가락 헤매다가 결국 글쓴이의 몸과 마음을 닮아버린 글들을 갈수록 좋아하게 된다. 오직 몸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이 생존을 밑천으로 몸소 쓴 글을 자주 읽거나, 이제라도 써보겠다며 모인 자리에 끼어들 기회가 많은 것이, 내겐 행운이다. 읽는 이의 마음을 붙드는 조용한 악다구니도 많고, 자신의 생애와 머릿속과 말이 그렇듯 문법과 맞춤법과 시제 따위에서 자유로운 글도 많다. 포장이 없고, 다른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는 세상에 유일한 글이다. 느닷없이 솔직해 당황스럽기도 하고, 때론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워 글의 사이에 대한 글쓴이의 설명과 참여자들의 경청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글과 말토막을 실마리로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이 이어지면서 서로와 세상을 더 알게 되고, 글로도 말로도 차마 꺼내지 않은 속과 뒤를 가늠하면서 더 많은 질문과 감수성을 얻게 된다. 외람되지만 우선 내가 배우고 질문을 얻어가자는 욕심에, 불러만 주면 달라들어 꼽사리를...

    2021.10.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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