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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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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 당신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
    당신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환대해 주었다. 그는 이름뿐 아니라 그 목소리만으로도 누구나 알 만한 아나운서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와 주어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해 주었다. 그러한 행동의 선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나는 그가 진행하는 방송에 초청받은 것이었다. 최근 나온 책을 잘 읽었다고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늦은 시간의 촬영이라 초청하기도 미안하다는 그에게 더 늦은 시간이어도 괜찮다며 감사히 응했다. 그는 주로 질문을 하는 쪽이었고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평범한 질문들이었다. 방송에서든 인터뷰에서든 아주 여러 번 답해 온 뻔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정말로 맑고 깊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가 ‘진심 버튼’이라는 것을 누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까, 그 버튼을 누르면 누구든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꼭 알맞은 질문을 건네고, 경청하고, 그 과정에서 없...

    2021.10.16 03:00

  • [숨] 동심은 파괴와 친구가 아니다
    동심은 파괴와 친구가 아니다

    지난 주말에 <오늘의 어린이책 1> 전시를 보려고 책방에 갔다가 산책 나온 개 잔디를 만났다. 잔디는 열세 살이고 사람이었다면 이미 할아버지다. 잔디는 책을 한 바퀴 쓰윽 둘러보더니 이 정도는 다 안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앉아서 햇볕을 즐기기 시작했다. 잔디의 가족 중에는 동화작가가 있기 때문에 책 냄새는 익숙할 테고 어느 개보다도 다독가로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은밀한 지면에 인간의 책에 기록된 개의 삶에 대한 서평을 기고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책방에 온 어린이 손님이 잔디 앞에 섰다. 요즘 말을 배우는 참이라서 “이쪽!” “포도!” “두 살!” 정도의 간단한 표현만 쓸 줄 알지만 “멍머!”라고 또렷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자 잔디는 곧바로 어린이를 바라보았다. 어린이가 활짝 웃었고 서로 다정함을 나누었다. 잔디 할아버지가 그 책방 안의 어느 어른보다 이 어린이를 더 특별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이는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은 어린이에게 너...

    2021.10.09 03:00

  • [숨] 카메라, 녹음기, 전자 코
    카메라, 녹음기, 전자 코

    얼마 전 양조사 친구와 신체감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양조에서는 맛과 향을 잘 분석하는 능력이 무척이나 중요하고, 이를 위해 후각과 미각을 계속 섬세히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술을 시음하고 평가하는 소믈리에와 마찬가지로 감각을 정교화하는 일은 양조사에게도 중요한 일이라 했다. 그런데 맛과 향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너무 다른 데다 한 번에 많이 시음하거나 시향하면 감각이 무뎌지지 않으냐 물었다. 그랬더니 물론 그렇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사람을 대신해 향과 맛을 분석해주는 ‘전자 코’나 ‘전자 혀’도 사용한다는 흥미진진한 대답이 돌아왔다. 전자 코와 혀라니. 처음 들어보는 기계들이었다.전자 코의 존재가 궁금해져 그 용례를 조금 더 찾아보니, 전자 코는 생각보다 넓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식재료 근처에 기계를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부패 정도를 분석해 알려주는 기계도 있었고, 뛰어난 후각을 지닌 탐지견들이 더 정확히 냄새를 인식할 수 있게 훈련하는 데 사...

    2021.10.02 03:00

  • [숨] 가족 바깥에서 추석 놀기
    가족 바깥에서 추석 놀기

    2005년 동성애 정체성을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면서 겪었던 관계 단절로 인한 명절 우울감이 이번 추석 훨씬 전부터 떠오른 것은, 올해 초 다른 계기로 내 쪽에서 원가족과의 관계 단절을 결정하여 알린 때문인가 보다. 가족중심주의를 많은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여기며 가족과의 거리 두기를 생의 과제로 삼고 살지만, 그럼에도 가족 단절은 특히 명절이면 한바탕의 우울감에 붙들리게 한다. 징그럽게 공고한 가족이데올로기가 남긴 내 속 흉터라 여겨 수긍하면서, 우울감에 푹 빠져버리지 않을 징검다리 두 개를 미리 잡아놓았다. 가족 바깥에서 추석을 지내게 되는 사람들과 즐거운 자리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추석연휴 남성 성소수자 두 명과 함께 소위 ‘노땅 성소수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했다. 가서 보니 한 명은 초면이었고, 다른 한 명은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자리를 주선한 두 여성과도 나로서는 첫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남다른 정체성이라는 공통점과 다양한 차이들...

    2021.09.25 03:00

  • [숨] 메타버스 in 추석
    메타버스 in 추석

    2019년은 내가 글을 쓰는 삶을 시작한 지 4년차가 되던 해였다. 아니, 글을 쓰는 삶이라고만 하면 안 되겠다. 말을 하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더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의 책을 읽고 나를 작가로서 초청해 주는 분들이 많았다. 주로 독서모임, 학교, 도서관, 기관 등이었고, 나는 그것이 고마워서 대개 거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시간을 맞추었다. 그해에 내가 독자들에게 받은 초청은 230건 정도였다.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만큼 돈을 벌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제대로 집에서 자 본 일이 별로 없을 만큼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다. 몇 년 전만 해도 집과 대학의 연구실을 오가는 게 전부였고 대학교 MT가 아니면 1박 이상의 여행을 가 본 일도 없었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 서른일곱 살, 선배들이 왜 KTX만 타고 특실을 고집하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몸이 힘든 데 더해 기차에서도 일을 해야 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를 직접 운전했다. 예를 ...

    2021.09.18 03:00

  • [숨] 토끼풀꽃 시계는 언제나 5시10분
    토끼풀꽃 시계는 언제나 5시10분

    토끼풀은 장미목 콩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예부터 반지와 시계는 어른임을 나타내는 귀한 물건이었고, 여름이면 지천에 피는 토끼풀꽃은 어린이가 잠깐이라도 어른이 되고 싶을 때 쓸모가 있었다. 통통한 토끼풀꽃을 엮어서 시계를 만들고 손목에 차면 제법 근사해보였던 것이다. 1979년에 발표된 오정희의 소설 ‘비어 있는 들’에는 토끼풀꽃 시계를 차고 노는 아이에게 엄마가 시간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몇 시예요?”아이는 손목을 들여다보면서 자신 있게 “다섯 시 십 분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몇 번을 물어봐도 똑같이 말한다. 다섯 시 십 분은 아이에게 어떤 시간일까. “만사 제쳐 두고 텔레비전 앞에 매달리는 초능력의 로봇 만화영화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아이의 토끼풀꽃 시계 속 시간은 언제나 다섯 시 십 분이다.어른에게는 24시간이 자신의 것이지만 어린이는 그렇지 않다. 늦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밥을 먹지 않으면 늑장을 부린다고 혼난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

    2021.09.11 03:00

  • [숨]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

    “이 이야기는 머릿속으로 음악을 듣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성들이 머릿속으로 음악을 들어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머릿속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그 음악을 표현할 도구를 손에 쥐지 못해서. 혹은 그 음악을 사회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서. 아니면 그 머릿속에 있는 음악을 꺼내 들으면 훨씬 더 근사하다는 사실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일렉트로니카 퀸즈-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Sisters with Transistors)은 최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돼 음악인과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다큐멘터리다. 많은 이들이 잊곤 하지만, 전자음악 초창기에는 영미권과 유럽 대륙에서 활약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이름과 활동을 하나하나 조명한다. 클라라 락모어, 다프네 오람, 베베 바론, 폴린 올리베로스, 델리아 더비셔, 매리앤 아마처, 엘리안 라디그, 수잔 치아니, 로리 스피겔까지. 주로 2차대전 무렵부터 1980년대까지 이야기다....

    2021.09.04 03:00

  • [숨] 그해 여름은 온통 우상혁
    그해 여름은 온통 우상혁

    2021년의 여름은 올림픽으로 남을 듯하다. 코로나19 시국에 더해 일본에서 개최된다는 묘한 불편함까지 겹치기는 했으나, 그리고 순위가 이전보다 높은 것도 아니었으나, 이전의 어느 올림픽보다도 더욱 특별했다. 진심이 되었던 저마다의 여러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배구의 4강 진출이라든가, 양궁을 하는 내내 들려온 파이팅 소리라든가. 나에게는 높이뛰기 우상혁 선수의 웃는 모습이 그랬다.1983년생인 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가 기억에 남는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안방에서 한국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했다. 레슬링이었든가 유도였든가, 한국 선수가 결승에서 지고 은메달을 획득해서 나는 “와아” 하고 박수를 쳤는데, 외할아버지는 “에이, 금메달을 따야지 은메달이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했다. 그는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분위기가 대개 그랬다. 선수들은 곧 국가였고 그들의 패배는 국가의 패배를 의미했고 그래서 그들은 죄인이 되었다. 금메달이 유력했던 종목...

    2021.08.21 03:00

  • [숨] 관상용 어린이가 자꾸 움직이면
    관상용 어린이가 자꾸 움직이면

    “24시간 내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 아무리 밤이 깊어도 부르면 즉시 달려오는 것, 아침에는 침대, 저녁에는 비행기가 되는 걱정의 신”, 이것은 무엇일까? 권정민의 그림책 <엄마도감>을 보면 해답은 엄마다. 흔히 육아일기를 읽어온 양육자들에게는 아기가 아기의 관점에서 양육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해 도감을 만든다는 발상이란 반전이다.권정민 작가는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 비유적으로 떠오르는 독특한 작업을 펼쳐왔다. 상대성이론은 물체의 운동에서 서로 다른 관측자들과 관측의 양상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설명한다. 관측자의 운동에 따라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측정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은 ‘지침서’ ‘사전’ ‘도감’처럼 객관적 서술을 특징으로 하는데 책 속의 관측자로는 동물, 식물, 어린이가 등장한다. 덕분에 우리는 멧돼지의 운동속도를 기준으로 청계천의 유속을 바라보거나 인간이 목줄을 한 상태에서 강아지 주인의 속도에 이끌려가는 상대적 장면...

    2021.08.14 03:00

  • [숨] ‘공간 음향’이라는 신기술을 마주하며
    ‘공간 음향’이라는 신기술을 마주하며

    처음 음반을 손에 쥐어본 건 유년기의 어느 날이었다.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 엄마 덕에 집에는 축음기 한 대가 있었고, 엄마는 종종 LP로 음악을 틀어주곤 했다. 그러다 문득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져, 엄마의 지도편달 아래 축음기 커버를 열고, 납작한 LP판을 장착한 후, 조심히 바늘을 얹어보았다. 그러자 이문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건 새까맣고 반질거리는 원형 판일 뿐인데 여기서 소리가 들려오다니. 이문세 아저씨는 우리집에 없는데 그 사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니. 지금이야 이미 세상을 떠난 가수의 ‘신곡’도 들을 수 있는 시대지만, 처음으로 직접 음반을 재생해본 당시엔 많은 것이 놀라웠다.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LP만 들었다면 그 이상의 놀라움은 없었겠지만, 다행히도 세상은 익숙해질 때쯤 어김없이 새 형태의 음반을 내놓았다. 테이프, CD와 MP3 플레이어,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형태와 청취 방법은 모두 달랐지만, 목표는 대체로 유사했다. 현실에서 들...

    2021.08.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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