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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능력자들
수수께끼를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등하굣길이 길었던 초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태양이 낮아지는 골목을 걷다가 말도 안 되는 문제를 내곤 즐거워했다. 출제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오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수께끼가 지루해지면 우리는 함께 무슨 복잡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대개 현실에서 실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목의 회합에는 검토할 줄 모르는 제안자들만 있었기 때문에 사업의 추진을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회는 어른이 된 뒤에나 하는 것이었고 우리들은 순간의 발견에 몰두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심코 한 뼘씩 커지는 자기 자신을 겁내지 않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자라나는 사람들에게 후회를 먼저 가르치는 세계는 그다지 바람직한 세계가 아니다.얼마 전 수수께끼 같은 책을 읽었다. 여러 시인들의 동시가 실린 <동시 유령의 비밀 수업>이다. 동시의 제목 또는 시의 구절 몇 칸을 비우고 답을 맞혀보는 양식으로 되어 있다. 잊고 있던 수수... -
페스티벌의 계절
이번 가을, 몇몇 페스티벌 현장에 방문했다. 시작은 10월7일 토요일에 오랜만에 찾아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이었다. 이전에는 보고 싶었던 아티스트의 공연 시간에 맞춰 오갔지만 올해는 낮부터 쭉 축제 현장에 머물렀고, 공연 안팎에 소소하고 재미난 즐길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하나는 ‘자라 체조’였다. 무대 전환이 이루어질 때마다 관객들의 스트레칭을 독려하는 이 체조는 매년 다른 음악, 다른 동작으로 꾸려져 이제는 자라섬의 중요한 전통처럼 자리잡았다고 했다. 무대 뒤편에 넓게 포진한 부스들도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부스에는 재즈 중심의 음반 가게부터 지역의 유명 맛집들의 출장부스, 가벼운 마실거리 등이 가득했다. 물론 기억에 가장 또렷이 남은 것은 조지, 티그랑 하마시안을 비롯한 무대 위 음악가들이었지만, 이렇게 느긋하고 풍요로운 분위기라면 그저 축제를 즐기러 언제고 찾아올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은 축제의 한 모델이 되... -
세탁기의 가정화
새로운 기술이 확산할 때, 우리는 흔히 그 기술의 내재적 속성을 확산의 동력으로 말한다. 예를 들면, 챗GPT나 아이폰의 세계적인 확산은 기술적 성취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하다. 가정은 오랫동안 새로운 기술이 친숙한 것으로 자리 잡기 위한 주요한 거점이었다. 기술 연구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가정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기술의 가정화’(domestication of technology)라고 표현한다. 이는 야생 동물이 가축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 비유한 것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호황 속에서 구축된 새로운 근대적 가정은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가정용 신기술의 도입과 긴밀하게 맞물려 구성됐다. 이러한 기술은 핵가족 중심의 가족 실천과 가족 관계를 조립하는 주요한 요소였다. 미디어 학자 임종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텔레비전은 ‘안방 문화’와 결합하여 수용됐다. ... -
다정한 기술사회의 도래는 가능할 것이다
얼마 전 나의 서점을 찾은 사람이 말했다. 챗GPT를 잘 활용하면 삶이 편해질 테니 당신도 써 보라고. 요즘 그걸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웬만해선 유행을 역행하려 하는 내 주변의 작가들도 한 번쯤 써 본 듯하다. 누군가는 내게 챗GPT에게 단편소설을 쓰게 해 봤더니 꽤 그럴듯하게 써서, 사실은 자신보다 잘 쓴 것도 같아서, 그걸 그냥 제출할까 고민했다고도 했다.내가 아아 그렇군요, 하고 그다지 열없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제가 쓰는 걸 한 번 보여드리지요, 하고는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그 이후엔 뭔가 신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그때 글쓰기 8주차 수업의 커리큘럼을 작성해야 했는데 그가 프롬프트에 “성인을 대상으로 한 8주차의 글쓰기 강의 계획서를 작성해 줘”라고 입력하자 10초 만에 내가 상상했던 모범적인 커리큘럼이 작성되었다. 그가 여러 조건을 넣을 때마다 그것은 정교해져 갔다. 장르는 에세이이고, 피드백을 몇회차 할 것이고, 계획서 내용을 조금 더 흥미롭게... -
혀 위에서 만나요
책을 읽다보면 이 작고 가벼운 물체가 뭐길래 사람 마음을 이렇게 뒤흔드는지 경이로울 때가 있다. 책은 고정된 사물이어서 분초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책은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다. 떠다니는 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속도로 헤엄쳐 책의 섬으로 다가오고 이 섬에 모여 작가라는 사공이 젓는 배에 오른다. 그 뒤로 얼마나 유장한 풍경이 펼쳐지는지는 실제 책을 읽은, 독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안다.얼마 전 19회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책이 이끄는 절경을 보았다. 100여명의 동승자들만 누리기엔 아까운 순간이었기에 고정된 활자로 남겨보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2020년 가을쯤 나는 정용준의 신간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흥미롭게 읽으면서 캐나다의 시인 조던 스콧이 쓴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그림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었다. 한 권은 소설, 한 권은 그림책이지만 독자인 내 마음에서는 하나의 결로 합류하며 읽혔다... -
앙코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얼마 전 오랜만에 서울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바흐 음악의 권위자, 피아니스트들의 교과서, 뵈젠도르퍼라는 브랜드의 피아노를 고수하는 연주자 등 그에 관한 여러 수식어가 있지만 최근 여기에 추가된 것은 ‘즉흥적으로 연주할 곡을 결정하는 피아니스트’라는 말이다. 국제적인 음악가가 내한하면 기획사들은 보통 이들의 지난 역사와 오늘 공연을 소개하는 글을 차곡차곡 모아 책자를 만들곤 한다. 공연을 더 자세히, 더 제대로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는 이 책자에는 보통 연주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작품 이면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힌다.쉬프의 공연에서도 이런 작은 책자가 만들어졌지만 이날의 책자는 평소보다 얇았다. 쉬프가 프로그램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렇게 썼다. “현시대의 공연들은 매우 예측 가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요? (…) 이번 공연에서 저는 그날 저의 기분과 공연장, 음향, ... -
어떻게 송이버섯을 사랑할 것인가
송이는 영어권에서는 matsutake mushroom 혹은 pine mushroom이라 부른다. 마쓰타케는 일본어로 마쓰는 소나무를, 타케는 버섯을 뜻한다. 송이는 오래전부터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아왔는데 인공적으로 경작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송이가 사라지는 것은 소나무 숲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 칭은 <사랑받지 못한 타자들: 멸종 시대의 무시된 존재들의 죽음>(2011)에 실은 “포용의 기술, 버섯을 사랑하는 방법”에서 일본과 미국 태평양 북서부 지역에서 송이가 단지 맛있는 음식만이 아니라, 환경적 웰빙의 상징이 된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 소나무 숲은 점점 줄었다. 1980년대 일본이 세계 각지에서 송이를 수입하며 가격이 상승했다. 많은 기업이 일본에 송이를 보내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에서도 일본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송이 채집에 나섰다. 앤디 무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무어는 베트남전쟁 ... -
원주 아카데미 극장의 보존을 바라며
나는 서울 마포구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이르러 지하철이 연장되고 내가 사는 망원동 인근에도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메트로폴리탄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무 살이 되고부터는 강원도 원주에 있었다. 잠시 머물 것으로 알았으나 학교와 직장 때문에 거기에서 20여년을 살았다.내가 다닌 대학은 시내와는 30분 정도 떨어진 데 있었다. 30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터미널이라든가 중앙시장이라든가 하는 중심가가 나왔다. 내가 영화관에 간 건 2003년 겨울, 대학에 와서 첫 연애를 시작했던 때였다. A는 외지 사람들이 원주민이라고도 불렀던 원주 사람이었다. 시내의 영화관 앞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기 위해 그와 만났다. 추운 날이었다. 나는 영화관이 어디인지도 몰랐기에 그가 내리라고 하는 정류장 앞에 내렸다. 영화관의 이름은 ‘아카데미 극장’, 표를 예매할 방법이 있었는... -
낙관주의의 천재들
요즘 내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것은 낙관주의자의 명단을 수집하는 취미이다. 개인적으로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당신에게는 이미 너무 많은 취미가 있다고, 이제 더 이상 뭘 좀 늘리지 말라고 붙들어 말릴 것이다.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호기심과 일을 잘 구분하지 못해 뒤죽박죽별장처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새로 뭘 하는 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사치다. 하지만 이번 취미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포기할 수가 없다. 회원권을 끊지 않아도 되며 지하철로 이동하는 틈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 몇 분간 누워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너무너무 뿌듯하다. 이제부터 최근 내 취미 활동의 결과를 자랑하고자 한다. 루트힐트 슈팡겐베르크는 베를린 ‘뷔허보겐 서점’(Bucherbogen am Savignyplatz)의 창업자이다. 서점 직원이었던 그는 1980년에 사비니 광장 고가철로 밑의 유휴 공간을 임대한 뒤 지금의 뷔허보겐 서점을 열었다. ‘뷔허’는 책, ‘보겐’은 반원형 둥근... -
한 음악
글을 마무리하기 전, 늘 맞춤법 검사기를 돌려보곤 한다. 내가 자주 틀리는 띄어쓰기나 습관처럼 쓰는 어색한 표현을 검토하기 위해서다. 검사 결과를 자주 보다보니 애초에 고쳐 쓰게 된 것이 상당수지만 개중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 매번 ‘빨간 펜’으로 수정 제안을 받는 단어가 있는데, 그건 ‘소리들’이라는 말이다. 이 단어에는 굳이 복수를 뜻하는 ‘~들’을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 맞춤법 검사기의 설명이다. 음악들, 곡들이라는 표현은 받아들여지지만 소리들이라는 표현이 교정되는 이유는, 아마도 소리에는 단수나 복수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지만, 음악에는 단수나 복수의 개념이 통용되기 때문일 것이다.‘한 음악’이란 단위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하나가 아닌 것 같은데 하나라고 말하는 음악을 만났을 때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면 안 된다고 하는 서양 전통, 또는 클래식이라는 장르의 다악장 음악이 대표적이다. 음악이 시작해서 제대로 끝맺었는데 ‘한 곡’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