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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상실
모든 인류 문화에서 집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집은 비바람, 더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공간이자, 외부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상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전통적인 의미에서 집은 삶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최근의 미디어 전경에서 접하는 집은 삶의 장소라기보다 죽음의 장소인 듯하다. 일례로 최근 방영한 드라마 <마스크걸> <힙하게>에서 집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고립되어 살아가는 곳이거나,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주요한 공간으로 설정된다. 이제 집은 더 이상 외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안전한 성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공간으로 상상되는 듯하다.집의 의미는 대중적인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논의에서도 주요한 주제이다. 관련 문헌들은 집이 가지고 있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주택, 거주, 가정... -
제주도 숙소 숙박권을 드립니다
제주도 모 기관에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과거형으로 서술한 것은, 하루 전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태풍 카눈이 한국에 상륙하는 날 저녁에 강연이 있었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도서 지역의 특성상 가는 사람도, 부른 사람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루 전날 담당자께 전화가 왔다. “작가님이 오시기도 힘들고 가시기도 힘들고, 도민들도 태풍이 오는데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것도 그렇고, 취소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강연 당일에 메시지가 왔다. 예약한 숙소에 입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 그래, 1박2일 일정이니까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 7만원까지 숙소비 지원이 된다고 해서 강의할 기관 근처에 바다도 보이는 가성비 좋은 비즈니스호텔을 잡았다. 숙소에 전화해서 환불이 되는지 묻자, 당일 환불은 안 된다고, 그러나 태풍으로 인한 것이면 숙박 앱 고객 센터에 전화해 보라는 답을 들었다.숙박 앱 업체에 전화해 환불이 되는지 물었다. 태풍 때문에 오지 못하게 된 것이면 ... -
상상력은 선택할 수 없다
한때 이런 직업을 가져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기억 발견사’라고 부를 수 있는 업무로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의 제목을 찾아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가끔 내게 “이 이야기가 어떤 동화인지 알아요?”라고 잊어버린 추억의 책 제목을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 “어떤 아이가 천둥치는 날 가게에서 케이크를 훔치는데” 하며 기억 속 한 장면을 풀어놓는 식이다. “그 케이크 초록색이죠?”라고 대꾸하면 “맞아요! 제가 그 책 정말 좋아했어요”라며 얼굴이 환해진다. 내가 제목까지 맞히면 상대방은 그리움 가득한 눈빛이 된다.어린 시절의 ‘책’이란 어떤 의미일까. 성장은 기억을 덮어쓰는 과정이라서 아무리 즐거웠더라도 자라고 나면 희미한 잔상만 남는다. 그림책 작가 기타무라 사토시는 영국 유학 중 아이 돌보는 일을 하면서 습작들을 돌보는 어린이에게 읽어주었다. 아이는 날마다 수십 번 읽어달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의 부모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학 졸업식에 그를 초대하고... -
마지막 ‘크루너’를 떠나보내며
지난 7월, 미국의 가수 토니 베넷이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거의 70년간 현역으로 활동했던 베넷은 94세 때도 음반을 발매할 정도로 꾸준히 노래해 온 가수였다. 음악에 평생 매진한 삶이었고,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지나온 시간에는 수많은 음악과 소리가 놓여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그의 어떤 한 노래가 아니라 그의 목소리, 그가 노래할 때 부드럽게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였다.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쓰인 여러 기사들은 다양한 타이틀을 내걸며 그의 인생을 되짚었다. 재즈의 거장, 아메리칸 송북의 챔피언, 역사가 가장 사랑한 목소리 중 하나, 그리고 전설적인 ‘크루너’. 크루너란 크룬(croon)이라는 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수를 말한다. 크룬은 조용히 부드럽게 노래한다는 뜻의 단어로, 흥얼거리거나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표현에 쓰이기도 한다. 내가 이해하기로 크루너라는 이들은 20세기에야 등장할 수 있었던 유형의 가수다... -
‘교권’과 녹음기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의 자살은 공교육 현장에서의 ‘교권’ 침해라는 사회적 논쟁을 촉발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표적을 찾아 단죄하려는 마녀사냥으로 미디어 공간이 소란스럽다. 지난 정권의 청소년 인권조례를 탓하다, ‘문제아’에 대한 학교 체벌을 반대했던 유명 방송인인 소아정신과 의사를 공격하다, 지금은 장애를 가진 아이를 학대한 혐의로 특수 교사를 고발한 웹툰 작가가 주요 표적이다. 여기에 공공시설(소아과 병원, 식당 등)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엄마들에 관한 기사들이 반복적으로 달라붙는다. 이로써 한국 교육 현장의 문제는 ‘갑질 학부모’의 탓으로 귀결하는 듯하다.웹툰 작가를 둘러싼 공방에 등장하는 주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는 녹음기이다. 작가는 아이가 이상 행동을 보이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자 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켜둔 채 등교를 시켰다. 작가는 녹음된 교사와 아이의 대화 내용이 아동 학대에 해당하는 수위라고 판단해 고소한 것이다. 교사의 승인 없이... -
책 읽는 노르망디 해변
지난 5월 홍세화 선생이 강릉에 왔다. 내가 문을 연 서점 ‘당신의 강릉’의 첫 행사는 그를 모시는 것이었다. ‘교사는 어떠한 어른이 되어야 하나요?’라는 제목으로 교사인 이원재 작가도 함께 강원도 지역의 학생, 학부모, 교사 등과 만났다. 그는 바다를 보고 하루 숙박하고 다음날 돌아갔다. 얼마 전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엊그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에 부분 개각이 있었는데 새 교육부 장관에 34살의 청년 가브리엘 아탈이 기용됐습니다. 그는 동성결혼자이기도 합니다. (…)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구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네요.”강릉에서 진행했던 북토크에서 청중이 이원재 작가에게 물었다. 당신이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40살 이원재 작가는 답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대학 서열화를 멈추고 학제에 따른 n분의 1로 재편하고 싶다고 했다. 대학의 재편보다도 40살 평교사 이원재씨의 교육부 장관... -
5300년 만의 조문객
이탈리아 볼차노에는 사우스티롤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이 도시에 들렀다가 박물관을 찾았더니 어린 학생을 비롯한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외치(Otzi)라는 이름이 붙은 단 한 사람을 보기 위해 여기 왔다. 박물관 전체가 외치씨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1991년 독일인 헬무트 지몬과 에리카 지몬 부부는 이 부근의 해발 3200m 지점을 등반하다가 외치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외치씨가 산악인 희생자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는 피라미드보다도 나이가 많은 5300년 전의 청동기인임이 밝혀졌다. 얼음 덕분에 피부의 탄력은 물론 피부에 새겨진 문신, 옷과 도끼, 장신구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현대의 법의학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외치씨가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연도 규명했다. 그 긴 세월 얼마나 외로웠을까. 2016년에는 외치씨의 음성까지 복원되었다.박물관 안은 조용했다. 외치씨는 나를 비롯해 관람객들이 조문한 가장 나이... -
다른 소리를 위한 장소들
다른 나라의 대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 반은 호기심, 반은 의무감에 어떤 장소들을 찾아보곤 한다. 음악을 듣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까 공연장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위한 장소들을 찾는 것이다. 잘 모르는 곳에 간다면 검색어는 큼지막한 것부터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밀라노 공연장’ ‘일본 오사카 콘서트홀’ 같은 말들. 이렇게 검색했을 때 상단에 나오는 결과는 대체로 나라의 지원으로 건설된 공연장으로, 보통은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데다 교통의 요지에 있고, 건물 전체를 사용한다. 이런 곳에서 내가 들을 수 있던 음악은 큰 후원단체를 확보하고 수많은 인프라가 관여해 만들어지는, ‘고전’이라 불리는 서양음악이었다.서양 고전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도시마다 다르므로 이런 공연을 보는 일도 무척 즐거웠지만, 어느 순간 덜 안정화된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공통관습으로 묶이지 않는 데다 아티스트의 손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날것의 음악들. ... -
멀티 유니버스 스파이더맨과 시대 감각
최근 극장에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를 봤다. 흑인 스파이더맨을 탄생시킨 <스파이더맨: 인투 더 스파이더버스>(2018)의 후속편이다. 새로운 서사, 그래픽, 음악, 편집으로 현대적 시대 감각을 담은 작품으로 세계적인 호평을 받고 있다. 미국 마블 시리즈는 오랫동안 백인 남성 중심의 영웅 서사로 비판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멀티 유니버스 소재를 도입해 성, 인종, 나이, 국가, 결혼 상태 등에서 상이한 배경을 가진 스파이더맨들을 총출동시킨다. 스파이더맨의 파워도 개개인이 가진 초능력보다, 다양한 장비를 가진 스파이더맨들과의 결합에 따라 달라진다. 스파이더맨의 상징인 거미줄조차 손목에 착용하는 기술 장치에서 나온다. 악당 또한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 영화는 악당으로부터 도시를 구하려고 분투하는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스파이더맨 세계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내부 권력자에 대항해 자신을 지키려는 아웃사이더 스파이더맨들의 ... -
대리운전 타고 강연 다니는 작가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대리사회>라는 책을 쓴 것이 벌써 7년 전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대리운전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나아졌느냐고 하면,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 강릉으로 이주한 이후 KTX를 타고 오가는 비용이 적지 않다. 왕복 5만원 이상이 나오니까 한 달에 4번이면 20만원이 이동비용으로 나온다.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비용이 별도로 붙는다. 그래서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대리운전 콜이 나오면 탄다. 대리운전 비용이야 그때그때 다르지만 그래도 15만원 안팎은 되니까, 한 달에 한 번만 타도 그 비용이 상쇄된다. 월요일 저녁마다 서울 강남 ‘최인아 책방’에서 글쓰기 클래스를 한다. 저녁 9시반에 강남에서 대리운전 앱을 켜면 수도권 어디든 갈 수 있다. 이래저래 일과 삶을 연동해 나가며 계속해서 일한다.지난해 tvN의 <유퀴즈 온더 블럭>에 출연한 뒤로 강연 요청이 늘었다. 내가 뭐라고 나를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