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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애도, 죽은 자의 생일 축하하기
몇달 전 같은 학과에 계시는 선생님이 전시를 보러 가신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내가 일하는 학교 근처에 있는 문화의 전당에서 열린 전시였다. 전시는 좀비를 주제로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것’에 관한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양한 양식의 작품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전시장 한편에 일본 작가 후지이 히카루의 작품 두 편이 상영되고 있었다. 하나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문을 닫은 도쿄현대미술관의 모습을,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 원전 참사로 방사능에 오염된 후타바시역사민속박물관 소장품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었다. 잠시 쉴 겸 앉아서 영상물 앞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았다. 함께 간 선생님은 첫 번째 영상물에 연결된 헤드폰을, 나는 두 번째 영상물에 연결된 헤드폰을 썼다.내가 본 영상물에는 <핵과 사물들>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는데, 열 명이 넘는 학자들과 관련자들이 방사능 오염으로 폐기될 박물관 소장품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 주요... -
국어교사모임 추천 도서지만 수업시간엔 읽을 수 없어요
어느 고등학교의 국어 교사가 학생들과 시 수업을 할 시인을 한 명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내가 아는 젊은 시인 K를 추천했다. 그는 학교폭력의 아픔을 가진 사람이고, 그러한 폭력에 대한 천착을 계속 시도한다. 학교폭력 근절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아니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어서, 그와 관련한 시를 쓰고 학생들과 함께 낭송한다. 언젠가는 집 인근의 학교 정문에서 학교폭력과 관련한 자신의 시를 학생과 교사들의 등교시간에 맞추어 낭송하고 있는 그를 보고, 그의 진정성이란 의심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국어 교사는 나에게 취지도 참 좋고 기존 학교에서 좋은 반응도 있는 시인이시니 문제없을 것이라고, 특강을 부탁드리겠다고 말했다. K에게 그 소식을 전하자 그는 기뻐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서 교사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다른 시인을 모셔야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그는 교감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K의 시 일부 작품에 욕설이 들어 있... -
기억, 무대에 서다
얼마 전 점심시간, 동료들과 차를 타고 안산시청 근처에 짜장면을 먹으러 가는데 문득 거기서 A를 만나 4월16일의 상황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한동안 드나들던 온마음센터도 근처다. 그걸 생각하다가 엉뚱한 곳에서 우회전을 해버렸다. 동료들은 와동 방향이니 메뉴를 바꿔 닭갈비집에 가자고 했다. 도착해보니 2015년에 연화의 어머니를 만나러 왔던 병원 앞 식당이었다. 그날 연화 엄마는 연화가 만들어준 팔찌를 차고 있었다. 연화는 가족들에게 생일케이크를 구워주는 솜씨 대장이었다. 네일 아티스트가 꿈이었는데 가장 좋아했던 네일 에나멜은 96번, ‘슈가젤리’ 색깔이다. 병원 근방 편의점에서는 연화의 절친 J를 만난 적이 있다. J는 내게 연화와 친구들이 시화공단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밀착’이라는, 뜨거운 기계를 다루는 업무에 손이 야무진 연화가 뽑혔는데 다들 부러워했다고 한다. ‘밀착’을 할 때는 특수 모자를 쓰기 때문에 바깥의 욕설이 들리지 않는다. 힘들었던 ... -
정년이,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매란국극단’ 단원들의 실루엣이 보이고, 그들이 노래를 시작하자나는 속절없이 감동을 받아버렸다. 상상 속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고 웃고 우는 그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본 것만으로도 어쩐지 울컥하게 되는 것이었다. <정년이>는 네이버에서 연재된 웹툰으로 1950년대, 소리 하나 믿고 상경한 목포 소녀 정년이가 ‘매란국극단’이라는 여성국극단에 들어가며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는 꿰고 있었지만, 막상 이를 국립극장에서 공연으로 보는 일은 조금 생경했다. 저 시대의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무대에 올라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극장에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과거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일은 반갑고도 낯설었다.창극 <정년이>는 웹툰에서 펼쳐졌던 긴 서사를 압축해 놓은 형태였지만,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 -
‘방목형 부모노릇하기’의 부상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올바른” 방식인지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과거 애정표현은 아이를 망치는 것으로 말해졌지만, 지금은 아이의 성공을 위한 핵심 요소로 강조된다. 대중매체는 올바른 부모노릇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는 주요한 부분으로, 지난 몇 년만 돌이켜보더라도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이 올바른 부모노릇을 제안해왔다. 오은영 박사가 출연하는 상담 리얼리티 쇼부터 <스카이캐슬>(2018)이나 <일타스캔들>(2023) 같은 드라마까지,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대중들이 마주하는 부모노릇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연료로 성공한 미디어 상품이다.부모노릇하기에 대한 강조와 불안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외국에서도 주요한 대중적·학술적 주제로 활발히 논의돼왔다. 올해 초 BBC 라디오 팟캐스트 <Thinking Allowed>도 ‘부모노릇하기’(parenting)를 주제로 다뤘다. 이 팟캐스트는 최신 사회학 연구의 저자를 초대... -
저의 서점에 와 본 분들이 계실까요
작년에 존경하는 C선생님에게 함께 글쓰기 강연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모 대기업 사원들을 대상으로 3회차. 그가 사회를 보고 내가 강의 후 함께 대담하는 방식으로 하자고 했다. 너무나 감사해서 아, 네, 선생님 물론입니다, 하고 두 손으로 전화를 받을 지경이었다. 강연비만 해도 내가 그동안 받아온 액수의 배는 되는 것이었으나 우선 그와 함께 무엇을 한다는 자체로 기뻤다. 분명 무언가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그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 사원들 앞에 섰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아니었다. 다만 C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김래원이 나온 어느 영화에서 엑스트라가 뱉은 명대사처럼 ‘그래 C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거야. 할 수 있어’ 하는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C는 먼저 사회를 보는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그러면서 “저의 서점에 와 본 분들이 여기 계실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서점을 운영한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람들은 눈치... -
어린이의 집필실
어린이의 시간은 현재형이다. “어렸을 때는 나도 그랬지”라거나 “어린이는 장차 크게 될 거야”라는 말은 소용없다. 지금 안 놀면 놀 수 없다. 현재의 어린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사회의 속도가 너무 빠르면 어린이는 위험해진다. 지난달 23일 헌법재판소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에 대해 합헌으로 결정했다. 이 법은 2019년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민식 어린이의 죽음 이후 마련된 법이다. 이제 어린이는 학교와 어린이집 앞에서만이라도 자신의 속도를 존중받게 되었다. 헌재는 8 대 1 의견으로 겁에 질린 작은 얼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하나를 지켜준 셈이다.팬데믹 전후에 태어난 어린이들은 밖에서 노는 법 자체를 잘 모른다. 두 다리는 언제 빠르게 뛰는지, 빗물은 어떻게 손바닥을 간지럽히는지, 나무를 꼭 안았을 때 얼마만큼 따듯한지 알 기회가 없었다. 아이들이 차가 다니는 길을 사랑해서 거기서 노는... -
스스로를 시험하는 음악
한동안 즉흥음악을 자주 들으러 다녔다. 그건 연주목록이 있는 공연을 보러 갈 때와는 다른 긴장감을 주는 일이었다. 빼곡한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화된 기억과 감각을 섬세히 살피며 음악을 만드는 일. 연습한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만 벌어질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처음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정말로 모르는 음악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었지만, 듣다 보니 즉흥연주에서도 나름의 패턴과 관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번 대단히 다른 것을 듣게 되지는 않았고, 긴장감도 조금은 덜해졌다. 하지만 즉흥음악 공연에서 결코 패턴화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음악가들이 음악을, 그리고 동료 음악가를 대하는 태도였다. 언젠가 봤던 즉흥 듀오는 그저 각자 하고 싶은 것을 동시에 연주했다. 둘은 가까이 있었지만 각자의 음역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어떤 즉흥 트리오는 각자 솔로 부분에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도록 시간을 공평히 나눈 듯했지만 한 사람은 마이크... -
해외입양인들의 이야기
한국은 해외입양 산업 모델을 만든 나라이다. 전쟁고아와 미군 사생아에 대한 해결책으로 시작한 해외입양은 이후 수십년에 걸쳐 거대한 초국가 산업이 됐다. 일레이나 킴의 <Adopted Territory>(2010)에 따르면, 해외입양아의 수는 대략 1950년대 3000명이 채 안 되었지만, 1960년대에는 6000명, 1970년대는 4만6000명, 1980년대는 6만6000명에 달했다. 이후 서울 올림픽을 치르며 “세계 최대 아동수출국”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을 줄이기 위한 정책 변화로, 1990년대는 2만2000명으로 줄었다. 2008년까지 해외입양된 아이는 16만명에 달했다.해외입양아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문화와 인종이 다른 공동체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70년의 해외입양 역사 속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이 점에서 해외입양인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에서 여전히 버려지고 잊혀진 존재이다. 1990년대 이후 정보통신기술의 확산 속에서 ... -
사람과 세상을 사유하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좋아하는 배우와 만났다. <재벌집 막내아들>에 출연한 김신록씨였다. 진행자가 그의 수상 소감인 “저는 연극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사유한다”를 언급했을 땐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출연자가 말했다. “이런 말은 대부분이 알아듣는 단어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사유라는 단어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김신록씨는 다음부터는 ‘생각한다’로 바꾸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사유하다’라는 단어를 많이 써왔다. 최근의 책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처지에서 깊이 사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 일은 없는 것 같아서, 생각과 사유는 어떻게 다른가, 하고 생각, 아니 사유하기 시작했다. 사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생각’이라는 단어를 최대한 쓰지 않을 것을 말해왔다. 무언가 무책임하게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