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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 기억, 무대에 서다
    기억, 무대에 서다

    얼마 전 점심시간, 동료들과 차를 타고 안산시청 근처에 짜장면을 먹으러 가는데 문득 거기서 A를 만나 4월16일의 상황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한동안 드나들던 온마음센터도 근처다. 그걸 생각하다가 엉뚱한 곳에서 우회전을 해버렸다. 동료들은 와동 방향이니 메뉴를 바꿔 닭갈비집에 가자고 했다. 도착해보니 2015년에 연화의 어머니를 만나러 왔던 병원 앞 식당이었다. 그날 연화 엄마는 연화가 만들어준 팔찌를 차고 있었다. 연화는 가족들에게 생일케이크를 구워주는 솜씨 대장이었다. 네일 아티스트가 꿈이었는데 가장 좋아했던 네일 에나멜은 96번, ‘슈가젤리’ 색깔이다. 병원 근방 편의점에서는 연화의 절친 J를 만난 적이 있다. J는 내게 연화와 친구들이 시화공단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밀착’이라는, 뜨거운 기계를 다루는 업무에 손이 야무진 연화가 뽑혔는데 다들 부러워했다고 한다. ‘밀착’을 할 때는 특수 모자를 쓰기 때문에 바깥의 욕설이 들리지 않는다. 힘들었던 ...

    2023.04.01 03:00

  • [숨] 정년이,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
    정년이,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매란국극단’ 단원들의 실루엣이 보이고, 그들이 노래를 시작하자나는 속절없이 감동을 받아버렸다. 상상 속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고 웃고 우는 그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본 것만으로도 어쩐지 울컥하게 되는 것이었다. <정년이>는 네이버에서 연재된 웹툰으로 1950년대, 소리 하나 믿고 상경한 목포 소녀 정년이가 ‘매란국극단’이라는 여성국극단에 들어가며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는 꿰고 있었지만, 막상 이를 국립극장에서 공연으로 보는 일은 조금 생경했다. 저 시대의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무대에 올라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극장에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과거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일은 반갑고도 낯설었다.창극 <정년이>는 웹툰에서 펼쳐졌던 긴 서사를 압축해 놓은 형태였지만,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

    2023.03.25 03:00

  • [숨] ‘방목형 부모노릇하기’의 부상
    ‘방목형 부모노릇하기’의 부상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올바른” 방식인지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과거 애정표현은 아이를 망치는 것으로 말해졌지만, 지금은 아이의 성공을 위한 핵심 요소로 강조된다. 대중매체는 올바른 부모노릇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는 주요한 부분으로, 지난 몇 년만 돌이켜보더라도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이 올바른 부모노릇을 제안해왔다. 오은영 박사가 출연하는 상담 리얼리티 쇼부터 <스카이캐슬>(2018)이나 <일타스캔들>(2023) 같은 드라마까지,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대중들이 마주하는 부모노릇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연료로 성공한 미디어 상품이다.부모노릇하기에 대한 강조와 불안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외국에서도 주요한 대중적·학술적 주제로 활발히 논의돼왔다. 올해 초 BBC 라디오 팟캐스트 <Thinking Allowed>도 ‘부모노릇하기’(parenting)를 주제로 다뤘다. 이 팟캐스트는 최신 사회학 연구의 저자를 초대...

    2023.03.18 03:00

  • [숨] 저의 서점에 와 본 분들이 계실까요
    저의 서점에 와 본 분들이 계실까요

    작년에 존경하는 C선생님에게 함께 글쓰기 강연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모 대기업 사원들을 대상으로 3회차. 그가 사회를 보고 내가 강의 후 함께 대담하는 방식으로 하자고 했다. 너무나 감사해서 아, 네, 선생님 물론입니다, 하고 두 손으로 전화를 받을 지경이었다. 강연비만 해도 내가 그동안 받아온 액수의 배는 되는 것이었으나 우선 그와 함께 무엇을 한다는 자체로 기뻤다. 분명 무언가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그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 사원들 앞에 섰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아니었다. 다만 C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김래원이 나온 어느 영화에서 엑스트라가 뱉은 명대사처럼 ‘그래 C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거야. 할 수 있어’ 하는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C는 먼저 사회를 보는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그러면서 “저의 서점에 와 본 분들이 여기 계실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서점을 운영한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람들은 눈치...

    2023.03.11 03:00

  • [숨] 어린이의 집필실
    어린이의 집필실

    어린이의 시간은 현재형이다. “어렸을 때는 나도 그랬지”라거나 “어린이는 장차 크게 될 거야”라는 말은 소용없다. 지금 안 놀면 놀 수 없다. 현재의 어린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사회의 속도가 너무 빠르면 어린이는 위험해진다. 지난달 23일 헌법재판소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에 대해 합헌으로 결정했다. 이 법은 2019년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민식 어린이의 죽음 이후 마련된 법이다. 이제 어린이는 학교와 어린이집 앞에서만이라도 자신의 속도를 존중받게 되었다. 헌재는 8 대 1 의견으로 겁에 질린 작은 얼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하나를 지켜준 셈이다.팬데믹 전후에 태어난 어린이들은 밖에서 노는 법 자체를 잘 모른다. 두 다리는 언제 빠르게 뛰는지, 빗물은 어떻게 손바닥을 간지럽히는지, 나무를 꼭 안았을 때 얼마만큼 따듯한지 알 기회가 없었다. 아이들이 차가 다니는 길을 사랑해서 거기서 노는...

    2023.03.04 03:00

  • [숨] 스스로를 시험하는 음악
    스스로를 시험하는 음악

    한동안 즉흥음악을 자주 들으러 다녔다. 그건 연주목록이 있는 공연을 보러 갈 때와는 다른 긴장감을 주는 일이었다. 빼곡한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화된 기억과 감각을 섬세히 살피며 음악을 만드는 일. 연습한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만 벌어질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처음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정말로 모르는 음악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었지만, 듣다 보니 즉흥연주에서도 나름의 패턴과 관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번 대단히 다른 것을 듣게 되지는 않았고, 긴장감도 조금은 덜해졌다. 하지만 즉흥음악 공연에서 결코 패턴화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음악가들이 음악을, 그리고 동료 음악가를 대하는 태도였다. 언젠가 봤던 즉흥 듀오는 그저 각자 하고 싶은 것을 동시에 연주했다. 둘은 가까이 있었지만 각자의 음역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어떤 즉흥 트리오는 각자 솔로 부분에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도록 시간을 공평히 나눈 듯했지만 한 사람은 마이크...

    2023.02.25 03:00

  • [숨] 해외입양인들의 이야기
    해외입양인들의 이야기

    한국은 해외입양 산업 모델을 만든 나라이다. 전쟁고아와 미군 사생아에 대한 해결책으로 시작한 해외입양은 이후 수십년에 걸쳐 거대한 초국가 산업이 됐다. 일레이나 킴의 <Adopted Territory>(2010)에 따르면, 해외입양아의 수는 대략 1950년대 3000명이 채 안 되었지만, 1960년대에는 6000명, 1970년대는 4만6000명, 1980년대는 6만6000명에 달했다. 이후 서울 올림픽을 치르며 “세계 최대 아동수출국”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을 줄이기 위한 정책 변화로, 1990년대는 2만2000명으로 줄었다. 2008년까지 해외입양된 아이는 16만명에 달했다.해외입양아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문화와 인종이 다른 공동체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70년의 해외입양 역사 속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이 점에서 해외입양인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에서 여전히 버려지고 잊혀진 존재이다. 1990년대 이후 정보통신기술의 확산 속에서 ...

    2023.02.18 03:00

  • [숨] 사람과 세상을 사유하다
    사람과 세상을 사유하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좋아하는 배우와 만났다. <재벌집 막내아들>에 출연한 김신록씨였다. 진행자가 그의 수상 소감인 “저는 연극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사유한다”를 언급했을 땐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출연자가 말했다. “이런 말은 대부분이 알아듣는 단어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사유라는 단어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김신록씨는 다음부터는 ‘생각한다’로 바꾸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사유하다’라는 단어를 많이 써왔다. 최근의 책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처지에서 깊이 사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 일은 없는 것 같아서, 생각과 사유는 어떻게 다른가, 하고 생각, 아니 사유하기 시작했다. 사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생각’이라는 단어를 최대한 쓰지 않을 것을 말해왔다. 무언가 무책임하게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다 보면...

    2023.02.11 03:00

  • [숨] 돌봄의 자전거 바퀴
    돌봄의 자전거 바퀴

    가족 안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말은 생활에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아이의 감정과 몸의 상태는 수시로 달라지기 때문에 어른들끼리 어떤 일을 도모할 때처럼 예측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아이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종종 담벼락처럼 버티거나 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버리는 공을 잡을 때처럼 달리고 멈추고 앉고 일어서는 순간의 반복이다.미카엘라 치리프와 호아킨 캄프의 그림책 <아이 달래기 대작전>은 한밤중 공동주택에서 그치지 않고 우는 아기 엘리사와 이웃들의 이야기다. 처음에 고양이처럼 칭얼대던 아기는 결국 소방차처럼 울고 가족들은 어떻게든 달래려고 안간힘을 쓴다. 가만히 참기 힘들었던 이웃들이 이 집으로 모여든다. 8층 아저씨는 이야기책, 2층 아주머니는 꽃다발을 들고 왔지만 아기는 점점 더 운다. 다들 출근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날이 밝아버렸다. 엘리사를 잠재운 것은 동네에서 귀가 가장 어두우며, 아침...

    2023.02.04 03:00

  • [숨] 이야기 만들기
    이야기 만들기

    지난 연말, 음악가 동료들과 작은 타악기를 연주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려 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그 그림책 안에 연주를 위한 기호를 그려 넣어,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잘 어울리는 소리를 연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이야기에 짧은 연주를 곁들여보는 접근이 가능한지 실험해 보는 정도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주를 틈틈이 집어넣을 수 있을 만한 느슨한 이야기가 필요했다.소리 구성이야 늘 해왔지만 이야기 구성이라고는 경험이 없던 우리는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뼈대를 만들어 어떻게든 살을 붙여봤다. 이야기라면 주인공이 있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는 음악을 넣을 자리가 필요하니까 소리를 좋아하는 캐릭터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소리내는 것을 좋아하지만 너무 조용한 호숫가에 살던 개구리 ‘차차’가 심심한 마음을 달래고자 밖으로 나서고, 위험에 처한 동물들을 만나며 크고 작은 소리를 내게 된다는 내용을 만...

    2023.01.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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