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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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숨] 코로 책을 읽는 아이
    코로 책을 읽는 아이

    우리에게 두 눈이 있고 세상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이 더 우월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삶의 가치는 훨씬 더 넓은 영역 안에 있다. 그것을 말하는 작가가 진 리틀(Jean Little)이다. 그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문학상에 네 번이나 후보로 올랐고 50권이 넘는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얼른 가서 코를 씻으라는 잔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항상 코를 종이에 바짝 붙이고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코에 글자가 인쇄되겠다”는 핀잔을 들으면 “다행히 저는 코가 작아서 책을 눈에 가까이 가져갈 수 있네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는 날 때부터 각막에 흉터가 있어 매우 희미하게만 앞을 볼 수 있었고 평생 안내견과 함께 살았다.진 리틀은 적극적 성격의 여행을 즐기는 청소년으로 살았고 토론토대학에서 노스럽 프라이의 제자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장애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동화작가가 된 이유는...

    2023.01.07 03:00

  • [숨] 종소리
    종소리

    종소리에 관해 생각하게 된 건 이 문장을 읽은 뒤부터였다. 음악 연구자 이희경의 책 <작곡가 강석희와의 대화>에 기록된 강석희의 말이다. “종이 울리면 낮은 소리는 내려가고, 높은 소리는 위로 올라가서 만나거든요. 흔히 소리에는 ‘멸(滅)한다’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진행형이에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라진다’인데,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계속 사라져가는 거지, 없어지지를 않는다는 거죠. ‘멸’은 한번 울린 소리는 우주에 존재한다는 현대물리학 이론과도 맞는 거예요.”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과정 중에 있을 뿐,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더라도 소리는 끝끝내 존재할 것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았다.내가 종소리를 가장 주의 깊게 듣는 순간은 새해를 맞이할 때다. 12월31일 23시59분59초를 지나, 1월1일 0시0분0초가 되는 찰나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새해를 아...

    2022.12.31 03:00

  • [숨] 크리스마스는 ‘고블린 모드’로
    크리스마스는 ‘고블린 모드’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보낸 세 번째 해가 저물어간다. 한 해가 끝나는 시기에는 수많은 연말 의례가 진행된다. 보통 지난 한 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고, 오는 해는 어떻게 살아갈지를 예측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발간하는 옥스퍼드대학출판부(OUP·Oxford University Press)는 매해 말 ‘올해의 단어’를 발표한다. 이는 지난 12개월 동안 영어 사용자들을 사로잡은 풍조·분위기·생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향후 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사용될 가망성이 높은 용어나 표현이다. 단어 후보는 옥스퍼드 편집자가 옥스퍼드영어말뭉치(OEC·Oxford English Corpus)의 빈도 통계 및 기타 데이터를 추적 분석해 실제 언어 사용을 바탕으로 선정한다. OEC는 소설, 신문, 블로그, 소셜미디어 등 모든 유형의 영어 사용을 제시하도록 선택된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과 미국 외에도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카리브해 연안국, 캐나다, 인도, 싱가포르 ...

    2022.12.24 03:00

  • [숨] 자녀의 인생을 설계하는 방법
    자녀의 인생을 설계하는 방법

    고등학교에 강의하러 갔다가 학부모에게 들은 질문이다. 그는 아이에게 문과를 가라고 해야 할지 이과를 가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그의 삶을 설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과에 가야 입시에도 유리하고 취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민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그의 딸이 함께 와 있었다. 사실 나는 입시나 취업 설명회가 아니라 인문학 강의로 그들과 만났다. 내가 하는 말이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도 문·이과 선택으로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나의 아버지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회사에서 돌아오면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를 풀거나 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나의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했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PC통신(천리안)을 하는 데 보냈다. 나는 그때 게시판에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은 대개 판타지소설 게시판에 가 있었으나 나는 나의 고등학생 생활을 각...

    2022.12.17 03:00

  • [숨] 안 보여요?
    안 보여요?

    2022년과 2023년을 반으로 접어 책을 만들면 2022년 12월은 그 책의 중간 제본선쯤에 있을 것이다. 1922년에 어린이날 선언이 선포되었고 1923년에 전국적인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기에 올해와 내년에 걸쳐 어린이날 백주년을 기념한다.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축하 잔치가 넘쳐나야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슬픈 소식들을 마주한다. 무고하게 세상을 떠난 어린이들의 명복을 빌며 어린이와 관련된 올해의 글을 찾아 읽어본다.“뒤에서 자리만 채우던/ 0이 용기 내어 앞으로 나왔어// 잘 보이지 않던/ .이 0 옆으로 다가서자// 너도나도 힘내라고 달려 나왔어/ 0.518416029…”는 ‘어린이와 문학’ 181호에 실린 강기화의 동시 ‘소수의 힘’의 한 대목이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다. 2022년 3분기 출산율은 0.79명이며 서울은 0.59명으로 가장 낮다. 그리고 어린이의 몸은 작아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얼마 전에는 만취 운전자가 뺑소니 사고를 일으키는 바...

    2022.12.10 03:00

  • [숨] 굿의 현재와 미래
    굿의 현재와 미래

    지난 11월9일부터 10일, 서울 선정릉역 인근 민속극장풍류에서는 ‘김정희 오구굿’이 열렸다. 동해안 별신굿의 대가 김정희 명인이 세상을 떠난 2019년 이후, 3년이 지난 뒤에 열린 오구굿이었다. 굿의 현장에서는 그야말로 긴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배포된 안내 책자에 따르면 그 이틀간의 굿은 망자자리말기로 시작해 부정굿과 골매기굿, 청혼, 문굿, 문답설법, 오는뱃노래, 조상굿으로 쉼없이 이어졌고, 그 이후로도 열 개 이상의 다른 굿거리가 더해졌다. 이렇게 큰 형태를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누적되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긴 시간 속에서 굿의 형태가 단단히 굳어지기만 했다기보다는 꾸준히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복해왔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망자의 집이 아닌 극장에서도 굿이 열리고, 고 김정희 명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책자도 제작되었으니 말이다.그날의 굿판에서도 굿의 일부가 머지않아 조금 달라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2022.12.03 03:00

  • [숨] 기다리는 시간의 가치
    기다리는 시간의 가치

    지난 9월 중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했을 때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끈 장면 가운데 하나는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된 여왕의 관에 참배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대규모 군중이었다. 데이비드 베컴과 같은 대스타도 새벽 2시에 나와 12시간 넘게 줄을 서서 참배했다. 영국 언론만이 아니라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생방송으로 장시간 기다리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1953년 대관식을 기억하는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사람들이 형성한 대기줄은 한때 템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11㎞에 달했고, 대기 시간은 24시간이 넘었다.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사람들은 기다리는 시간에 대한 불평보다 오랜 기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왕에게 조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느끼는 공동체 감각을 진술하며, 줄서기를 ‘감동적인 경험’으로 묘사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이동 제한과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로 느끼지 못한 물리적 공간에서의 집단적 ...

    2022.11.26 03:00

  • [숨] 다정함, 무정도 유정도 아닌
    다정함, 무정도 유정도 아닌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을 쓴 이후 북토크에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고 항상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선함은 유약함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긴 어린 시절부터 힘이 약한 아이들은 무언가를 잘 빼앗긴다. 싫다고 할 때마다 듣게 되는 말이 “너는 착하니까 괜찮잖아”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것 좀 해줘요’ 하는 부당한 요구를 하고는 실망하는 누군가들이 있다. 그러나 선한 사람만큼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만큼 치열하게 분투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얼마 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 부부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한다. 남자는 내향적이고 유약한 성격으로 보인다. 항상 사과하고 중재하고 괜찮다고 말한다. 손님이 맡긴 세탁물에 눈알을 붙여두고는 귀엽다고 웃기도 한다. 여자는 그런 그를 ...

    2022.11.19 03:00

  • [숨] 두툼한 슬픔
    두툼한 슬픔

    텔레비전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스마트폰 시대에 텔레비전을 보는 일은 고전적으로 느껴진다. 웃음도 슬픔도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배웠기 때문일까. 나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었다. 재난이 발생하면 텔레비전을 먼저 켠다. 속보를 확인하고 여러 단계 책임자의 신중한 발표를 듣는다.내 마음속 텔레비전은 얇고 평평한 물건이 아니다. 둥근 유리가 상자 같은 몸체와 달라붙어 있는 두툼한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음극선관(Cathode-Ray Tube)을 의미하는 ‘CRT’ 텔레비전은 20세기의 거실에서 늘 육중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발명가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을 기리며 브라운관 텔레비전이라고도 부른다. 미국에서는 텔레비전을 CRT의 T를 따서 ‘튜브’라고도 하는데 ‘유튜브’도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어렸을 때 나는 텔레비전에서 어른들의 묵직한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기억 속 1순위는 1980년 11월30일 동양방송이 ...

    2022.11.12 03:00

  • [숨] 기술, 그리고 전자음악을 다루는 여성들
    기술, 그리고 전자음악을 다루는 여성들

    작년, 서울문화재단 사업 모니터링차 ‘저항하는 기술 The Resisters’라는 프로젝트 현장을 방문했다. 이 프로젝트는 젊은 여성 창작자를 대상으로 전기, 용접, 해킹 등의 기술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내가 갔을 때는 볼트와 너트의 종류와 그걸 어디에서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걸 몰랐던 나도 덩달아 그 작은 부품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게 됐다.당시 이 프로그램은 수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한쪽에서는 부품을 소개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극장에서의 조명 사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의 주제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리가 보편의 강의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참여자들은 각자가 극장에서의 경험을 나누었고, 그중 몇몇은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고, 또 몇몇은 극장 장비뿐 아니라 이를 담당하는 여러 감독과 어떤 식으로 소통해야 불편함이 없는지 등, 경험자만이 알려줄 수 있는 유용한 팁을 공유했다....

    2022.11.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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