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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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숨] 다정한 경쟁은 가능하다
    다정한 경쟁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경쟁하며 살아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생존을 위해서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시부터 취업, 그리고 이후 부의 축적과 그에 따른 지식 계급과 노동 계급으로서의 신분 상승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 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부의 세습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어린아이에게 미리 상속해야 할 만큼 부유한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중·고등학교의 일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드러난다. 매일 아침 다려진 교복을 정갈하게 입고 학교에 갈 수 있는 것 역시 그렇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부장으로 일하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교복은 보살핌의 상징이다. 교복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데도 누군가의 대리노동이 필요하고 거기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겨진 교복을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와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들은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공부만 할 수 있는 학생과 공부도 해야 하는 학생이 내는 결과야 애초에 다를 수밖...

    2022.10.22 03:00

  • [숨] 역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역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지난주 토요일에 옛 서울역 역사인 ‘문화역 서울284’ RTO공연장에서 어린이와 책읽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22 공공디자인 페스티벌과 연결된 프로그램이었다. 큼지막한 유리문으로 노란 햇살이 들어오는 가운데 아침부터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 어린이와 어떤 그림책을 읽을 것인가 이야기하는 사이 유리문 밖으로 간간이 기차가 지나갔다. 승객을 태우러 가는 열차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덜컹덜컹 다정한 소리를 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자리는 기차역의 대합실이었겠고 누구는 여기서 큰 포부를 안고 책가방을 든 채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더 올라가면 어떤 사람들이 서 있었을까. 총칼과 무기가 있는 난폭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시절을 상상하자 기차 바퀴의 평화로운 움직임이 문득 거칠게 느껴졌다.지금은 기차역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곳은 1922년 착공되고 1925년 준공된 오래된 건...

    2022.10.15 03:00

  • [숨] 사라진 동물들의 목소리
    사라진 동물들의 목소리

    나긋한 말씨의 내레이션이 이어지던 중, “시간은 마음이 쓰이는 쪽으로 흐르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들려왔다. 공연이 시작한 지 약 5분쯤 지났을 때였다. 그 앞에도 적지 않은 말들이 있었지만 내게 공연의 진짜 시작점처럼 느껴진 것은 이 문장이었다. ‘멸종동물생활협동조합×날씨’라는 타이틀만 보고 찾아간 신촌극장은 그날 따라 유독 어두웠다. 깜깜한 극장에 들어서자 중앙에 매달린 작은 오브제가 보였다.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던 그 오브제 안에는 계곡처럼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극장 벽에는 스피커 열 대, 무대에는 모니터 두 대가 보였다. 극장에 들어설 때 극장장이 건넨 손전등을 켜 뭔가 적혀있었던 극장 티켓을 다시 비춰보았다. “거의 소리만 있는 공연입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들입니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재생 장치들을 바라보며 오브제 아래에 반원 모양으로 둘러앉았다. 우리는 잠시 1941년 웨이크섬 전투를 재현한 게임으로 추정되...

    2022.10.08 03:00

  • [숨] 집에 갇힌 아이들
    집에 갇힌 아이들

    “엄마, 봐! 여기는 사람이 신호등이야!” 몇 해 전 외국 시골 도시에 살 때 다섯 살 아이가 했던 말이다. 거주민들이 대부분 백인인 그곳에서 아이와 산책을 나가면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곤 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내 우려와 달리, 아이와의 동행은 곳곳에서 우선적 배려를 받았다. 무엇보다 길을 건널 때 아이가 있으면 모든 차들이 어김없이 멈춰 아이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려줬다. 모든 보행자들에 대한 일반적 행동이었다. 아이는 이게 신기했나보다. 어느 날 아이는 차도 가장자리에 발을 대더니 오던 차가 멈추자, 나를 보며 “여기는 사람이 신호등”이라고 자신이 발견한 낯선 땅에 작동하는 규칙을 표현했다. 또 다른 날엔 아이를 데리고 차로 이동하다가 길을 잃었다. 제대로 차선을 옮기지 못해 허둥대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멈췄다. 곧이어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제대로 차선을 잡고 이동할 때까지 뒤차들을 잡아주었다....

    2022.10.01 03:00

  • [숨] 정보라 작가를 응원하며
    정보라 작가를 응원하며

    정보라 작가가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퇴직금 및 수당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2010년부터 2021년까지 11년 동안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다고 한다. 매 학기 9학점의 강의를 했고 6년 동안 우수 강사로 선정되어 총장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성실하게 근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했다.나도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시간강사로 일했다. 매 학기 6~8학점의 강의를 했고 3년 동안 강의평점 상위 10%에게 주는 우수 강사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나도 정보라 작가처럼 무엇도 보장받지 못했다. 그후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쓰고 대학에서 나왔다.사실 퇴직금만 못 받았던 것은 아니다. 건강보험이 보장되지 않았고 대출을 받기 위해 찾아갔던 은행에서는 재직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학교 인근의 맥도날드에서 물류상하차 일을 했다. 생계를 위해...

    2022.09.24 03:00

  • [숨] 내 아이와 남의 아이
    내 아이와 남의 아이

    이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나누어 생각한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가 나란히 어려움을 겪게 되면 내 아이 걱정이 우선이다. 내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며 아무리 엇나가더라도 무한한 사랑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내 아이 중심의 가족제도는 어딘가에 고립된 남의 아이가 있을 가능성을 끈질기게 외면한다. 이뿐만 아니다. ‘아이’를 특정한 가족관계에 종속된 소유물로 보는 한 그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기 어렵다.오랜 옛날 서양 사람들은 요정들이 종종 요람에 잠들어 있는 예쁜 갓난아기를 훔쳐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흉한 모습을 지닌 요정의 아기를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뒤바뀐 아기를 일컬어 남자 아기는 샹즐랭, 여자 아기는 샹즐린이라고 불렀다. 프랑스 작가 마리 오드 뮈라이유의 동화 <요정의 아이 샹즐랭>은 태어나자마자 샹즐랭으로 지목된 한 어린이의 이야기다. 아기의 붉은 머리와 초록빛 눈동자를 불길하게 여겼던 ...

    2022.09.17 03:00

  • [숨] 태양과 바다
    태양과 바다

    ‘태양과 바다’라는 제목의 작업을 알게 된 것은 3년 전이었다. 노래하는 이들이 인공해변에 누워 가만히 있거나 가끔씩 노래하는 장면을 보여준 이 ‘오페라-퍼포먼스’는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리투아니아관에서 공개됐다. 무대와 성악가, 서사가 있는 오페라이긴 했지만, 보통 오페라에서 기대될 법한 대대적인 클라이맥스는 없었다. 긴박하게 몰아치는 갈등도 없었다. 아무도 열창하지 않았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루함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해변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종종 노래하는 피서객이 누워 있었을 뿐이다. 이 묘한 광경에 대해 작가들은 이렇게 썼다.“해변을 상상해보세요. 타오르는 태양, 자외선 차단제, 밝은 수영복, (…) 가끔 들려오는 아이들의 비명소리와 웃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스크림 트럭 소리, 파도 위의 음악적인 리듬.” 작업의 소개글 또한 느긋한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는 듯했지만, 글은 이렇게 끝났다. “…그 아래엔 진이 다 빠져버린 지구의 느린 삐걱거림...

    2022.09.03 03:00

  • [숨] ‘인성 재판’에 반하여
    ‘인성 재판’에 반하여

    인성(人性): 1. 사람의 성품. 2. 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적혀있는 인성의 두 가지 뜻이다. 첫 번째 정의는 사람의 됨됨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성 교육’ ‘인성이 좋다’ 등의 표현이 있다. 두 번째 정의는 개성을 뜻하는 것으로 ‘인성 검사’ ‘인성 개발’ 등의 표현에 사용한다. 전자가 좋고 나쁨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포함하는 규범적인 용어라면, 후자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용어이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서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직장에 들어갈 때 실시하는 인성 검사는 ‘조직에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걸러내려는 목적이 강하다. 이는 해당 조직의 질서와 문화에 적응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품성을 가진 사람인지를 보려는 것이다.돌이켜보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것은 ‘인성’ 문제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

    2022.08.27 03:00

  • [숨] “그게 어때서요”라고 말하는 마음
    “그게 어때서요”라고 말하는 마음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던 때, 건강보험을 보장받기 위해 1년 남짓한 시간 맥도날드에서 물류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냉동감자 박스를 나르던 것도, 그리즈트랩의 음식물 쓰레기를 걷어내던 것도, 한겨울에 냉동창고에 들어가야 했던 것도 아니다. 나를 아는 누군가와 매장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이 올 수도 있고 시간강사 동료들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자신이 없었다.대학원 후배가 햄버거를 먹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그가 갈 때까지 건자재실에 숨어 있었다. 한번은 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햄버거를 먹고 있기도 했다. 나는 다음 수업을 위해 퇴근해야 했고 그러려면 그들을 지나쳐야만 했다. 고민하던 나는 다른 크루에게 부탁해 물류를 실어나르는 작은 승강기에 웅크리고 앉았다. 몇 초 후면 나는 1층에 도착하고 그가 열림 버튼을 눌러줄 것이다. 그러나 어둠은 깊고 그 시간은 길었다. 승강기는 곧...

    2022.08.20 03:00

  • [숨] 늦은 예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늦은 예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에게 잘 알려주는 그림책이 한 권 있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가 1973년에 발표한 그림책 <산타 할아버지>는 주인공인 산타 할아버지가 12월24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아니, 또 크리스마스잖아!”창밖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는 눈이 싫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하면서 “겨울은 너무 싫어!”라고 투덜거린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은 직장인의 월요일 아침 같다. 악천후 속에서 산더미 같은 선물의 배송을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한다. 할아버지는 12월 내내 과중한 노동으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허허 웃기만 하는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던 산타 할아버지에게도 과로로 인한 짜증이 있으며 어서 일을 마치고 싶다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은 이 그림책에서 배운다.크리스마스 새벽 무사히 할 일을 마친 산타 할아버지는 출근...

    2022.08.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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