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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련씨 점잖기도 하지
“상보 깔린 식탁에는 차림표 펼쳐 있고(鋪巾長卓食單開)/ 우유와 빵은 눈앞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牛奶麵包當面堆)/ 수프, 고기, 생선, 채소가 차례대로 나오고(羹肉魚蔬供次第)/ 나이프, 포크, 기타 식기는 번갈아 바뀐다(刀叉匙楪換輪回)/ 제철 아닌 진기한 과일은 유리 트레이(tray) 층층이 담겼고(不時珍果登玻架)/ 별별 빛깔의 향기로운 술이 유리잔마다 한가득(各樣香醪滿瑪杯)/ 식사 끝에 커피 한 잔 마시고(終到珈琲茶進後)/ 긴 회랑 거닐며 담배 한 대 피운다(長廊散步吸烟來).”1896년 4월1일 서울을 떠난 김득련(金得鍊, 1852~1930)은 제물포항에서 뱃길에 오른다. 5월26일 거행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사절단의 단장은 특명전권공사 민영환. 영어 잘하는 윤치호도 함께였다. 김득련은 사행의 일지 작성 및 한어(漢語) 통역을... -
과자 한 조각 속에도 세계가 있다
“세계에 그 짝이 없을 만큼 특색 있는 과자.”<조선상식문답>(1946)최남선(1890~1957)이 약과에 붙인 이 한마디를 기어코 다시 본다. 그때 최남선의 세계는 지금보다 넓지도 크지도 않았다. 일본제국에 갇힌 조선 사람이 온 지구를 염두에 둘 여유는 없었다. 지난 시대를 나무라는 듯한 말은 그만두고 과자로 돌아가자. 반죽의 모양을 잡아, 튀겨, 달콤한 즙액을 씌워 완성하다, 이 계통 제과기술은 인류 공통의 기본 기술이다. 반죽과 튀김과 달콤한 즙액의 어울림 끝에 오는 과자라면 또 무엇이 있을까. 내 좁은 세계에서는 중국의 마화(麻花), 일본의 가린토(花林糖, かりんとう)가 먼저 떠오른다. 마화는 밀가루 반죽 꽈배기 튀김이고, 가린토는 한국의 한 제과회사가 ‘땅콩으로 버무렸음’을 내세워 만드는 과자의 원형이다. 가락 내지 않은 마화 반죽을 밀어 짧게 끊고, 칼집을 내 접으면 한국 매작과(梅雀菓) 모양이 된다. 한반도에 들어온 화교의 마화는 한국인에 의해 ... -
소담스러운 ‘약과’
“[문] 약과란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답] 밀가루 반죽을 넙적 혹 둥그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을 내어서 꿀과 기름에 흠씬 지져 내는 것을 유밀과라 하고 보통으론 약과라고 부르니 조선에서 만드는 과자 가운데 가장 상품(上品)이요 또 전무력(全懋力, 온 힘)을 들여 투박스럽게 만드는 점으로 세계에 그 짝이 없을 만큼 특색 있는 과자입니다.(이하 생략)”1937년 신문에 연재했고, 1946년 책으로 나온 최남선(1890~1957)의 <조선상식문답>, ‘풍속(風俗)’에 수록된 ‘약과’의 한 대목이다. 이어 1948년에 나온 <조선상식>에서도 약과는 빠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약과를 “진역(震域, 우리나라)에 있는 최고급의 과자”로 일컬었다. 그래서였을까? 약과는 일찍이 구체적인 조리법이 남은 과자다. 장계향(1598~1680)은 <음식디미방>에 약과와 함께 연약과의 조리법을 써 남겼다. 이 책에서 약과보다 먼저 등장한 연약과는 ‘누런빛이 나도록 ... -
너를 부른다
“떡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밥 생각이 납니다.”조선 초량왜관의 근무자, 1719년 조선통신사의 수행자, 그 여정을 함께한 조선 사람 신유한(申維翰·1681~1752)으로부터 ‘일본에서 제일가는 학자’ 소리를 들은 일본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가 엮은 <교린수지(交隣須知)> 속 한 구절이다. 그의 왜관 생활이 상당히 반영된 이 책의 표제어 ‘떡 병(餠)’에 잇따른 문장이 보신 대로다. 아무렴, 밥 배 따로 별미 배 따로지. 아, 배불러! 해도 ‘디저트’를 감지한 배 속은 알아서 과자 집어넣을 자리를 내어준다. 그러고 보니 유만공(柳晩恭·1793~1869)은 설날 손님맞이상을 받은 세배꾼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떡국, 꿩고기, 달콤한 강정과 약과(湯餠雉膏甘果)는/ 삽시간에 나와도 또다시 꿀꺽(時供具亦堪嘗).” 예전 세배꾼들은 아침부터 가는 곳마다 과자와 음료를 갖춘 손님맞이상인 세찬(歲饌)을 받았다. 조금씩 차려도 소반을 채운 차림이다.... -
목은 이색이 사시사철 즐긴 ‘팥죽’
어느 새 2023년 동지도 지나갔다. 올해 동지는 마침 애동지(음력 동짓달 초순에 드는 동지)였는지라 팥죽을 쑤네 마네 하는 말도 돌았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안 먹는다? 괘념치 마시라. 애동지에 팥죽 안 먹는 사람도 있나 보다 하면 그만이다. 애동지는 팥죽 대신 팥떡 먹는 날이 아니라, ‘팥떡까지’ 먹는 날이다. 팥죽은 워낙에 사계절 별식이다. 동지뿐 아니라 대보름에도 팥죽은 소담한 계절 음식이었다. 서울·경기 지역 세시풍속을 기록한 홍석모(1781~1857)는 <도하세속기속시>에서 “쌀과 팥즙을 솥에 쑤어(米香豆汁煮鍋鐺)/ 복날이면 붉은 팥죽 맛을 보네(庚日輒看赤粥嘗)”라고 읊었거니와 문헌 곳곳에 땀 뻘뻘 흘리며 한여름에 기어코 뜨거운 팥죽을 먹어치우는 모습이 남아 있다. 팥죽은 해장에도 좋았다. 문체 좋기로 유명한 조선 문인 장유(1587~1638)는 고기에 해산물에 기름진 음식을 곁들여 과음하곤 새벽부터 팥죽을 찾았다. 그가 속을 풀자고 들이켠 팥... -
냉면의 색감이 쨍하더라
“붉은빛 감도는 육수에 노을빛 비치고, 얼음가루는 눈꽃 되어 엉기고. 젓가락으로 집어 입속에 넣자 잇새부터 향기로운데, 옷을 껴입어도 몸에는 냉기가 스미는걸(紫漿霞色映/玉紛雪花勻/入箸香生齒/添衣冷徹身).”장유(1587~1638)가 남긴 시 <자장냉면(紫漿冷麪)> 속 냉면 한 그릇이 이렇다. 어느 겨울 노을 질 때, 글쟁이는 냉면 한 그릇을 달게 비웠던 모양이다. 그 육수가 이미 고운 붉은 빛깔이었는데 노을빛까지 받고, 햇메밀 사리였는지 메밀향까지 잇새에서 터졌으니 그야말로 시 읊어 남길 만한 한순간 아닌가. 붉고도 고운 육수라니, 떠오른다. 필시 잘 익은 산갓물김치를 섞어 눈으로 먼저 먹을 만한 빛깔을 낸 육수였을 테지. 찬바람이 분다. 냉면 먹기 참 좋은 계절이다. 부르르 떨면서도, 찬 육수 꿀꺽꿀꺽 넘기며 사리를 씹고, 사리를 씹으며 살얼음도 함께 씹을 만한 계절이다.냉면. 차게 말아 먹는 한국 특유의 국수이다. 음식에서 냉온(冷溫)이... -
시인 윤기에게
도성의 온 집이 모두 자고 있는데(萬戶千門盡寂然)/ 이따금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時聞人語在深邊)/ 부엌문 틈으로 등잔의 불빛이 비끼고(燈光斜透 廚扉隙)/ 술집에서는 새 술 거르고 죽집에서는 죽을 끓인다(酒肆新篘粥肆煎) - 윤기, <성중효경(城中曉景)>, 셋째 수에서 전기 조명 아래 누구나 한밤을 대낮처럼 지내게 된 지 이제 겨우 100년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해 떠 있는 동안을 알뜰살뜰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과 아침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 사람 윤기(1741~1826)가 그린 ‘성안의 새벽 풍경(城中曉景)’은 오전 4시 서울 도성의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서른세 번의 파루 종소리로 시작한다. 파루에 맞춰 술집과 죽집을 여는 사람들이야말로 도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었다.술집과 죽집이 등불 아래서 분주한 가운데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몇 마리 닭이 울면(大星落落小 鷄鳴)/ 푸성귀장수 할멈이며 젓갈장수 늙은이가 다투어 ... -
송편이 얼어 죽었다
“송편이 냉동 칸에서 얼어 죽다. 송편이 냉장 칸에서 저체온증을 견디다 못해 사망하다.”냉장고 문을 열어 주시라. 냉동 또는 냉장 칸을 살펴보시라. 여러분은 이미 사망한 송편 또는 사망 직전의 공포에 떨고 있는 송편과 마주하리라. 한 주 전만 해도 곳곳에서 송편은 무더기를 이뤘다. 데려와 처음부터 얼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남들 따라한 다음이 문제였다. 의례를 빛내기에 애매하고, 진짜 내 고향을 환기하기에 애매하고, 입속의 황홀에 복무하기에 애매했다. 그러다 얼어 죽었다. 오해부터 풀자. 송편은 ‘추석 전용’이 아니다. 허균의 <도문대작>(1611)은 송편을 느티떡(槐葉餠)·진달래화전·배꽃화전과 나란한 봄날의 별미로 여겼다. 비슷한 시기의 여러 문헌은, 송편을 초파일 또는 유두일(음력 6월15일)의 별미로 손꼽는다.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물용이었다. 물론 추석에도 즐겼다. 송편은 ‘멥쌀가루를 익반죽해 소를 넣어, 빚어, 시루에 솔잎을 켜켜로 놓고 ... -
남작의 여로
“정말 남작이 심어서 남작이에요?” 지난 연재에 수미(秀美)를 다루었다. 그 여파인가 보다. 또 다른 감자, 남작은 어떻게 된 놈이냐는 질문이 단박에 돌아왔다. 포슬포슬하니 감자 단내가 확 끼치는 남작의 관능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 꽤 된다는 뜻이겠지. “맞습니다, 남작(男爵)이 심어서 ‘남작’ 됐어요.”남작의 본향(本鄕) 또한 수미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다. 1876년 상품화될 때의 이름은 아이리시 코블러이다. 1900년경에 잉글랜드로 들어가 온 영국에 퍼졌다. 영국 별명은 유레카 또는 아메리카이다. 이를 가와다 료키치(1856~1951) 남작이 일본에 들여와 토착화했단다. 덕분에 남작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참고로 남작(男爵)의 일본어음은 ‘단샤쿠’이다. 그 품종명을 제대로 쓰면 ‘남작서(男爵薯)’, 그 일본어음은 ‘단샤쿠이모’이다.가와다 료키치는 모든 면에서 서구화를 바란 전형적인 19세기 출생 일본인이다. 교토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1877년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 7... -
감자가 태평양을 건너면
“감자는 남작과 수미 외에도 여러 품종이 있다. 이 품종은 크게 분질과 점질로 나뉜다. 분질 감자는 그냥 쪄서 먹거나 으깨어 샐러드에 넣고, 점질 감자는 길쭉하게 썰어 볶음으로 먹거나 감자칩을 만드는 데 적합하다.”(주간동아, 제752호, 2010년 8월30일)불볕더위 속에서도 감자는 시장 곳곳 여기저기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감자 반찬이며 감자전이 있는 밥상의 소담함, 갓 쪄 낸 감자의 넉넉한 느낌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머릿속으로는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말글이 떠오른다. 보신 바와 같다. 감자의 속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가장 요긴한 개념은 다른 무엇보다도 ‘분질(粉質)’과 ‘점질(粘質)’, 이 둘이다. 온 지구에 무수한 품종의 감자가 있지만 조리와 음식에 잇닿은 핵심은 분질이냐, 점질이냐이다.예컨대 북미에서는 껍질이 잘 일어나는 러셋 버뱅크(Russet Burbank), 레인저 러셋(Ranger Russet) 등 러셋 돌림자 품종이 널리 재배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