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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 [신형철의 뉘앙스]연민의 인간, 공포의 인간
    연민의 인간, 공포의 인간

    비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진단이다(<시학> 6장).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는데 그걸 뒤늦게 알고 울부짖다가 제 눈을 찔러버리는 남자의 이야기, 그런 것을 그리스인들은 야외극장에서 보았고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둘 중 하나를 특별히 강하게 느끼는 인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고대의 연극론은 인간 유형론으로 전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연민의 인간’과 ‘공포의 인간’이 있다고 말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타인’에게 닥친 비극을 동정하느라 진이 빠지는 연민의 인간과 ‘자기’에게 닥칠 비극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전율하는 공포의 인간은 서로 다른 결심을 하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겪는 사람”에 의해, 공포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불행”을 통해 느끼게 된다고 한다(<시학> 13장). 연민이 ‘부당함’의 느낌에 관계한...

    2020.04.29 20:44

  • [신형철의 뉘앙스]고통의 사회적 위계
    고통의 사회적 위계

    고통의 차별이 있다. 차별의 고통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다. 차별이 고통을 낳는데, 그 고통조차도 차별적으로 다뤄진다는 뜻이다. 고통의 차별이 차별의 고통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고통에 차별 없이 감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개별 고통의 양을 최대한 정확히 측정할 수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의 높낮이를 정확히 잡아내는 절대음감처럼,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는 절대통감이라는 것을 갖추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상상을 조롱한다. 실제의 고통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되는 고통들이 있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국민청원 게시글 하나가 새삼 이런 생각에 빠지게 했다. 이미 보도된 대로 조주빈에게 살인을 청부한 공익근무요원이 죽이려고 한 대상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교사의 딸이다. 피해자인 여성 교사가 직접 글을 올렸다. 제자에게 9년 동안 스토킹을 당했다. 교무실에 칼을 들고 나타났고...

    2020.04.01 20:41

  • [신형철의 뉘앙스]신천지로 떠난 청년들
    신천지로 떠난 청년들

    ‘신천지’의 자체 추산 30만 교인 중에는 특히 청년세대의 비율이 높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에 비해 유난한 숫자라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학생들 중에도 그 근처까지 갔다가 빠져나온 사례들이 있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솔선할 일꾼이 필요하므로 애초부터 젊은층을 타깃으로 포교한다는 것이었다. 취미 활동 혹은 상담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마음의 빗장을 먼저 열고 교리는 그다음에 주입한다고도 했다. 이런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 있다고는 해도 그다음 단계에 이윽고 접하게 될 그들의 교리는 정상적인 사유 능력의 소유자가 빠져들 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를 근심하는 한편, 나는 그 청년들에 대해서도 며칠을 생각했다. 신앙 없는 문외한이지만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고 알고 있다. 우선, 사상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그것이 말 그대로 종교(宗敎), 즉 큰 가르침인 이유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삶의...

    2020.03.0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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