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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박물관
불상 위로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는다.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두 개의 불상이 놓인 타원의 좌대를 따라 돈다. 작은 보폭으로 천천히 걷는 모습이 탑돌이를 연상케 한다. 관람객들은 움직이면서도 불상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다가가 자세히 살피는 듯하더니, 다시 뒤로 물러서 본다. 누군가 이때다 싶었던지 휴대폰을 꺼낸다. 어떤 이의 손에는 큰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가 들려 있다. 전시실 출입구 쪽에는 또 다른 모습도 보인다. 벽 중간에 선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고 20여m 전방을 응시한다. 그가 보는 게 부처인지, 관람객인지, 부처를 거울 삼아 자신을 보려는 건지 가늠하기 어렵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 또한 휴대폰을 꺼내든다. 피사체는 여백으로 가득한 전시실일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일까. ‘사유의 방’은 반가사유상 두 점을 나란히 배치한 국립중앙박물관 내의 새 전시공간이다. 반가사유상은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에 걸치고(반가·半跏),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사유·思... -
왜 김수영일까
지난주 김수영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행사였지만, 올해 100년이 되는 문학인이 어디 김수영 혼자일까. 시인 김종삼, 조병화, 박태진도 있고 소설가 이병주, 장용학, 유주현, 김광식도 있다. 각기 기리는 행사들이 열리겠지만 김수영의 기념은 남다르다. 김수영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문학상·청소년문학상이 제정됐고, 문학관도 설립됐으며, 연구모임도 하나둘이 아니다. 오는 27일 탄생 100돌을 전후해 강연, 전시회, 학술대회도 열린다. 김수영 기념은 이제껏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생전에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9) 한 권을 냈을 뿐이다. 사후에는 출간이 줄을 이었다. 작품은 시 180여편, 산문 100여편, 단편소설 1편이 전부인데, 몇 년을 간격으로 시선집, 산문선집, 전집 등이 나왔다. <김수영전집>만 해도 1981년 처음 선보인 뒤 개정판(2003), 육필시고 전집(2009), 정본 김수영 전집(2018... -
이건희 고문헌과 장자의 거북
코로나19로 문화계 전반이 위축되었지만 유독 활기가 넘치는 곳이 있다. 바로 미술·문화재 분야이다. 앞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7·21~9·26)은 예약 만원사례 속에 전시를 끝마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내년 3월13일까지)에도 관람객들이 연일 줄을 잇고 있다. 예약으로 무료관람할 수 있으나 예약권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암표로 거래되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이 모두 공개된 것도 또 공개 일정이 잡힌 것도 아니다. 이건희 기증 컬렉션의 절반에 달하는 전적·지도·문서 등 고문헌은 수증된 지 반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수장고에 있다. 보존처리 등이 필요한 문화재가 많은 것도 원인이지만,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해 고문헌을 확인·분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건희 회장의 유족으로부터 받은 고문헌은 4000여건, 1만여점이다. 국가가 기증받... -
유튜브의 길, 도서관의 길
“유튜브를 하려고 하는데, 타이틀을 뭘로 할까?” 지인이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틈틈이 논문을 발표하고 매체에 칼럼을 기고해온 그가 유튜브의 길을 가겠다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내 침묵에 아랑곳없이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젠 유튜브를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아. 잘하면 수익도 생기고….” 유튜브가 대세다. 남녀노소, 이념,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초등학생의 대다수는 스마트폰을 들면 유튜브부터 켠다고 한다. 어른이라고 다를까. 우려되는 점은 독서와 글쓰기의 위축이다. 지난해 출간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김성우·엄기호)는 유튜브 시대에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대산문화’ 최신호가 특집으로 ‘유튜브가 삼킨 미래’를 내건 것은 그 연장선이다. 유튜브가 정보와 지식, 오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책과 다르지 않다. 반면 정보 습득 방식은 차이가 크다. 유튜브 보기가 감성적이고 수동적이라면 책읽기는 비판적이고 반성적이며 관조적이다.... -
‘장군의 귀환’, 그 이후가 중요하다
올해 광복절은 ‘조용히’ 지나갔다. 70주년도, 75주년도 아닌 76주년이어서였을까. 아니면 팬데믹의 영향이었을까. ‘광복절 특사’도 없었고, 떠들썩한 기념행사도 열리지 않았다. 옛 서울역사에서 열린 정부의 광복절 기념식은 역대 가장 작은 규모로 치러졌다. 눈에 띈 것은 홍범도 장군의 귀환이었다. 광복절 저녁, 문재인 대통령은 몸소 서울공항에 나가 카자흐스탄에서 특별기로 수송된 장군의 유해를 맞이했다. 이튿날에는 홍 장군의 고국 귀환에 적극 협조한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방한했다. 양국 대통령의 행보에서 장군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예우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장군의 귀환’은 해방을 맞아 귀국한 백범 김구가 일본에서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골을 모셔온 일에 비견될 만하다. 홍범도는 ‘봉오동·청산리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투쟁에서 1920년대 독립전쟁에 이를 정도로 장구하다. 투쟁 기간이나 치열함에서 그를 따를 자는 없다. 청산리대첩 이후 소... -
생애전환 기술로서의 여행
도시산책자. 이한호씨는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문화기획사의 대표다. 그러나 사는 곳은 본사가 있는 서울도, 고향인 부산도 아닌 광주다. 광주 구도심인 양림동에서 9년째 산다. 광주비엔날레 연출, 대인시장 브랜드 개발 등 지역문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광주에 눈떴다. 광주를 자주 찾으면서 기획자가 아닌 여행자의 시선으로 지역을 보기 시작했다. 2012년 어느 날 양림동을 어슬렁거리다 서양 선교사들의 묘역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서 ‘5·18 이전’ 광주의 역사를 발견했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역사문화도시 재생에 뛰어들었다. 10년간 광주를 산책한 그는 문화공간 ‘10년 후 그라운드’를 차리고 또 다른 도시를 꿈꾼다. 올봄에는 제1회 양림골목비엔날레를 열었다. 청년의 벗. 홍동우씨는 사회에 진출하면서 20~30대 대상 전국일주 여행업체를 차렸다. 여행사 대표였지만, 그가 한 일은 여행자를 위해 운전하고 요리하고 모닥불을 피우는 게 전부였다. 2년간 여행에서... -
6·25와 ‘한국에서의 학살’
지난주 서울 예술의전당 미술관의 ‘피카소’전을 찾았을 때 수십명이 줄지어 입장하고 있었다. 하루 관람객이 3000명을 넘는다고 한다. 피카소의 인기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신화’라는 명성에 값한다. 전시 이름은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인데, 6·25를 앞둔 시점이어서인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 때문일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다룬 이 그림은 피카소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지만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도판 소개는 물론 언급조차 금기시되어왔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에야 ‘해금’되었지만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의 학살’에는 군인들의 총검 앞에서 나체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 미국의 한국전 개입을 반대하는 반미 그림인지, 반전 평화라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그림인지를 놓고 해석이 엇갈렸다. 전자... -
학계의 ‘기본소득 비판’을 비판한다
기본소득제 논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기본소득 찬반 논란이 확산되는 속에서 주류 학계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류 학계의 반응은 반대가 우세하고, 반대가 아니라면 신중론이다.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수준이지만, 곧 학술 공론장의 핵심 주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대선 예비 주자들이 기본소득 또는 그와 유사한 복지정책을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지난주 장덕진 서울대 교수의 칼럼 ‘기본소득은 의제인가, 복병인가’(경향신문 5월18일자)는 주류 학계의 기본소득 비판의 포문을 여는 서곡으로 읽힌다. 장 교수는 칼럼에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신복지’ 정책이나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돌봄사회’ 정책도 모두 이재명 경기지사가 선점한 기본소득 정책에 대한 맞대응 차원에 서 있다”며 기본소득이 정치권에 미치는 파장을 주목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본소득이 내년 대선의 핵심 의제가 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을 드... -
‘한국의 툰베리’가 보이지 않는 까닭
지난 22일 지구의날을 맞아 열린 기후정상회의에 10대 소녀 시예 바스티다가 참석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소개로 연사로 참여한 바스티다는 각국 정상들을 향해 “기후 정의가 곧 사회 정의”라며 “세계 각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화상회의였지만 울림은 컸다. 그의 연설은 2년 전 유엔기후회의 연단에 오른 그레타 툰베리의 데자뷔였다. 같은 날 툰베리는 미 하원 환경소위원회의 화상청문회에 참석했다. 환경운동가 바스티다는 기후난민이다. 멕시코 출신인 그는 고향이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파괴되자 13세 때인 201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바스티다는 동아리에 가입해 환경운동을 벌였다. 2019년에는 툰베리가 결성한 ‘미래를 위한 금요일’의 뉴욕지부를 만들어 등교를 거부하는 기후파업을 이끌어냈다. 이해 9월 기후정상회의 참석차 뉴욕에 간 툰베리를 만나 기후문제를 토론하기도 했다. 바스티... -
나무가 아낌없이 준다고 해도
바야흐로 꽃천지다. 매화·목련·산수유는 만개했고, 벚꽃도 예년보다 빨리 피었다. 뒤이어 진달래·개나리·복사꽃도 꽃망울을 터트렸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 꽃을 피우는 건 아니다. 죽어가는 나무도 있고, 가지가 잘린 채 꽃은커녕 싹도 못 틔우는 나무도 있다. 지난주 나무의사 우종영씨를 따라 서울 정릉의 성가소비녀회 수녀원을 찾았다. 1만평가량의 수녀원은 ‘도심 수목원’으로 불러도 좋을 정도로 100여종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나무들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메타세쿼이아는 우듬지 생장을 멈추고, 벚나무는 수피가 썩어들어가고, 매화나무는 결실을 못 맺고 있다. 때이른 고사목까지 나타났다. 애태우던 수녀님들이 급기야 수목보호 기술자를 초청한 것이다.정원의 수목을 둘러본 우종영씨는 메타세쿼이아가 자라지 못한 것은 수녀원을 에워싸고 있는 고층아파트의 영향이라고 진단했다. 수도원 언덕을 깎아내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면서 지하수 수위가 낮아져 수분 공급이 원활치 않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