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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남겨진 연금개혁 ‘팩트 확인’
나는 연금개혁 공론화에서 전문가 패널로 숙의토론에 참가했다. 오랫동안 평행선만 달려온 연금개혁이야말로 공론화 방식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기에 나름 소명감을 가지고 토론에 임하였다. 앞으로도 공론화 방식이 여러 의제에 적용될 것이고, 당장 연금개혁 입법과정이 진행될 예정이므로 이번 연금개혁 공론화에서 주목할 점과 남은 과제를 제안한다.우선, 시민대표단 다수가 ‘더 내고 그대로 받기’보다는 ‘더 내고 더 받기’에 손을 들었다. 미래세대 부담이 늘어나는 점을 생각했겠지만 자신의 노후가 불안하다는 우려가 더 컸던 셈이다. 특히 20대 청년들이 ‘더 내고 더 받기’를 지지한 건 꼼꼼히 되돌아볼 주제이다. 연령만 보면 상대적으로 미래세대 부담에 공감이 크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는 계속 높아질 보험료를 오랜 기간 적용받아야 하고 노후마저 막막한 처지여서 소득보장 쪽을 선호했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지속 가능성 논의도 이어가야겠지만, 청년세대를 위한 노후소득보장 방안을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
‘새것 콤플렉스’
문학평론가/불문학자 고(故) 김현(1942~1990)은 ‘새것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다. 새것이라면 무조건 바로 수용해버리는 한국 사회의 풍토에 대한 지적이었다. 테크놀로지건 학문적 경향이건 문화이론이건 새로운 것이라면 별다른 고민이나 성찰 없이 즉각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그것은 자생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외부의 힘으로 식민화된 처지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서구의 기술산업 문명, 좁게는 일본을 통해서 이식된 외국의 문물에 대한 ‘자발적인’ 감탄과 자조적인 자기비하가 원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 선구적인 ‘조선’ 지식인들은 서구/일본 제국주의의 자장 안에 흡수되면서 오래된 것, 낡은 것, 전통적인 것은 모두 버려야만 우리가 근대국가 및 근대인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새것 콤플렉스’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압도적인 경향이 아니다. 낡은 것, 오래된 것을 중시하는 흐름도 있고 서구 중심적... -
기억은 공간을 통해 이어진다
미국 워싱턴에는 동쪽 끝에 의회 의사당이, 서쪽 끝에 링컨 대통령 기념관이 마주보고 있는 “내셔널 몰”이라 불리는 긴 공간이 있다.동쪽으로는 각종 역사박물관들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홀로코스트와 2차 대전·한국전쟁·베트남전쟁 참전용사 추모공원, 마틴 루서 킹 목사 추모공원 등이 자리해 있다. 미국 정치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워싱턴은 백악관과 의사당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사실상 거대한 추모의 공간이다.비행기를 타고 뉴욕 맨해튼으로 날아가면 9·11 테러로 파괴된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그라운드 제로”라 불리는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평지에 서서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상징하는 네모난 분수가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있고, 당시의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이러한 공간들의 기능은 여러가지이겠으나 그 모든 것을 압축하여 한마디로 하자면 ‘기억’일 것이다. 즉 기억은 정보와 상징으로 직조된 공간을 통해 이어진다. 이 공간의 방문... -
헌법대로 합시다
총선이 여당의 역대급 참패로 끝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당대표 교체를 주도하면서 당정일치를 관철하여왔기에 이번 총선은 집권여당과 정치적 운명공동체인 대통령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기도 하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제왕적 행태로 초래된 민주주의의 퇴행을 정부형태 탓으로 돌리는 주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시대의 유산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는 헌법 무시의 관성에 터잡은 것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6월항쟁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현행 헌법은 유신·5공헌법이 채택한 제왕적 대통령제를 버리고 민주공화적 대통령제를 새로이 수립한 것임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헌법상의 정부형태는 그냥 대통령제가 아니다. 국회와의 협치를 전제로 한 대통령제다. 의회와의 엄격한 권력분립을 전제하는 미국식 대통령제와도 다르고 더더구나 제왕적 대통령제와는 거리가 멀다. 유신·5공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요소는 헌법상 근본적으로 제거되었다.미국식 대통령제와는 달리 행정권은 ... -
‘오만·독선 경쟁’의 중간성적표
역시 예상대로 윤석열 대통령의 압승이다. 누가 더 오만하고 독선적인가를 겨룬 ‘오만·독선경쟁’ 이야기이다. 물론 박용진 의원에 대한 공천 거부 등 더불어민주당 공천에서 보여준 이재명 대표와 친명계의 오만과 독선은 정치적 상식을 넘어선 한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수 국민들에게는 이것조차 윤 대통령이 보여준 오만과 독선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특히 야권에 대해서는 매서운 법의 칼을 겨누면서도 김건희 여사와 해병 사망사건 외압의혹 핵심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장관 등 자기편에는 너무 관대해 윤 대통령 쪽에서 하면 로맨스이고 민주당이 하면 불륜이라는 ‘윤로민불’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 윤로민불이 친이재명계에서 하면 로맨스이고 친문재인계 등이 하면 불륜이라는 ‘명로문불’에 대한 분노를 압도했다. 주목할 것은 항소심에서까지 유죄판결을 받은 조국, 여러 사건의 피의자인 이 대표만이 아니라 돈봉투 사건으로 압수수색을 받고 검찰에 출두해 조사받은 허종식 의원 등 민주당 전당대... -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
2012년 12월14일, 미국 코네티컷주의 소도시 뉴타운에 있는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20세의 범인 애덤 랜자는 학교에 난입한 지 불과 몇분 사이에 학생 20명과 교직원 6명을 살해했다. 총기 사건 자체는 하루에도 여러 건 일어나는 미국이지만, 샌디 훅 사건은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 중 피해자 수가 가장 많았고 피해자 대다수가 6세 또는 7세의 1학년 학생이었기에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샌디 훅 사건이 발생한 날이 본인의 임기 중 최악의 날이었다고 회고했다.사건 이후 유족과 생존자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고결하면서 한편으로 낯설지만은 않은 내용이다. 그들은 참사로 인한 상실과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 머무르지 않았다. 희생자들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아픔을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참사로 아이를 잃은 학부모들이 창립한 단체 ‘샌디 훅 ... -
‘검찰 정권’이 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윤석열, 한동훈이 “내가 수사해 봐서 잘 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녀서 조롱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말이 아니라 검사 출신들이 책임 있는 자리를 맡으며 흔히 내뱉는 말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1960, 70년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쿠데타 군인들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폭력으로 사회적 평화를 강압하는 일에 동원된 경험이 있으므로 민간 정치에 개입하여 자본축적의 위기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당시 군부 조직에 만연했던 일종의 믿음 혹은 문화 같은 것이었다. 그런 조직 문화를 군부 정치 연구자들은 ‘신직업주의(neo-professionalism)’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쿠데타 원인으로 꼽았다.우리가 정치검찰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제도로서 검찰은 아니고, 검찰의 일부 분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도 그런 믿음 혹은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교육 관련 수사를 해 봤기 때문에 교육... -
대통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
총선에서 집권당이 이처럼 참패한 적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세력을 국민들이 사실상 탄핵한 결과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초유의 위기 상황이다. ‘위기’란 한자말은 ‘위험’과 ‘기회’가 상존함을 의미한다. 국민들이 사실상의 탄핵을 왜 선택했는지를 냉철히 돌아봐야만 위험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다. 검사 시절에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과 권력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는 자세는 ‘검사 윤석열’을 ‘대통령 윤석열’로 만든 기초자산이었다. 대통령 선거기간에 드러난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국민들의 믿음과 기대로 말미암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2년간 윤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준 것은 ‘자신에게 충성만 하는’ 사람을 등용하고 독선적으로 통치만 하려는 모습이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독선·불통·오기였으며, 이런 대통령과 추종만 하는 참모, 장관, 국민의힘이 경제도 외교도 모두 망가뜨렸다... -
‘과잉경쟁’ 끊기, 정치개혁만이 답
일주일 전 대만에서 규모 7.4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 여파로 타이베이 모노레일이 끊어지고 TSMC 반도체 공장이 멈추었다. 대만의 지층은 필리핀 판이 유라시아 판 아래로 매년 10㎝씩 파고 들어가며, 이 스트레스가 누적되고 쌓이면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한다. 물리계에서의 스트레스 응축이 지진이라는 형태로 해소되는 것과 다르게 생명계에서의 스트레스 응축은 집단적 이상행동과 자해 및 출산 감소 등 자신의 미래적 지속 가능성을 부정하는 병리현상으로 나타난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뇌는 늘 긴장하며, 불안과 분노가 일상화된다. 유아 아동기의 스트레스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을 변화시키며 뇌 구조와 행동까지 바꾼다. 급기야 스트레스는 불임을 증가시키며 인구절벽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한국인을 괴롭히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과잉경쟁일 것이다. 남을 의식하는 비교의식과 과잉경쟁으로 인해 언제 터질지 모를 사회적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응축되어 가고 있다. 모바일과 소셜미디어를 달고 살면서... -
진실의 ‘약’을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가 먹는 약의 효과에 있어 ‘진실’은 무엇일까. 흔히 약물이 가지고 있는 화학적 성분이 몸 안에서 어떤 반응을 유발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진실의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인류학의 영역에서 바라본 약의 ‘총 효과’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영국의 의료인류학자 세실 헬만은 약이 약물 자체의 효과를 포함한 미시적 차원을 넘어 그 약물에 대한 도덕적, 문화적 가치들과 사회경제적 분위기, 그리고 그 약을 사용하는 사회집단과 생산 및 판매하는 경제주체들까지 포함한 거시적 차원까지 포함해 그 효능이 발휘된다고 설명한다.이것의 가장 대표적 예가 바로 ‘위약’ 혹은 ‘플라시보(placebo)’ 효과라 부르는 것이다. ‘실재하는 약이 없이 나타나는 약의 총 효과’가 바로 위약효과이며, 신약의 효과를 공정하게 실험할 때 비교를 위해 많이 활용되고는 한다. 위약이 실제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 그것은 바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생리학적, 심리학적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