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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편향적 신념에 대하여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체계이론>에서 근대사회가 여러 하위 체계들을 병렬적으로 진화시켜 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근대사회의 각 하위체계들인 법체계, 정치체계, 경제체계, 학문체계 등이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매체, 코드, 기능 등을 발전시켜 왔다고 본다. 예컨대 법체계와 정치체계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세계이며, 각자 서로 다른 코드를 통해 스스로를 타 체계와 구분해왔다. 법체계가 ‘합법인가 불법인가’라는 코드로 자신을 특화해왔다면 정치체계는 ‘통치하는가 통치받는가’라는 코드로 스스로를 인지한다. 요컨대 합법성과 통치성의 개념은 서로 기원이 다를뿐더러 섞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근대사회 원칙과 같은 것이다.반면, 최근 12·3 불법계엄 이후 등장한 일련의 사태는 합법성과 통치성의 대립 혹은 법체계와 정치체계 사이의 갈등 구도를 보여준다. 헌재 심판에서 윤석열의 변호인단은 “계엄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며, “(이에 대해) 국회와 법원, 헌법재판소는 심판할... -
거센 불길 속 지향해야 할 수평선
새해, 어떤 불길이 진짜이고, 어떤 불길이 가상인지 혼란스럽다. 1월6일부터 새빨간 불길로 뒤덮인 캘리포니아의 처참한 모습은 마치 한편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지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한편에선, 트럼프 당선인의 2번째 취임식을 앞두고 성대한 불꽃놀이 행사가 그의 버지니아주 골프클럽에서 진행됐다. 하늘을 수놓은 불꽃들을 바라보는 트럼프 부부의 모습은 4년 전인 2021년 1월7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을 난입하며 폭력시위를 자행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 가상보다 더 비현실적인 날들이다. 한국 안에서 바라본 바깥세상은 온통 아마겟돈과 같다. 연이은 대형 자연재해, 세계 3차대전의 불안감을 퍼트리는 잇따른 전쟁소식들. 하지만 바깥세상에서 본 한국 안의 모습 또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독재와 군사정권의 계엄을 소재로 한 한강의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지 채 두 달도 안 돼 계엄이 선포되지 않았던가! K팝과 K드라... -
윤석열, 내란 선동을 멈추라
윤석열은 비루하다. 말과 행동이 너절하고 지저분하다. 그는 비상계엄이 자기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자 온갖 거짓말, 궤변, 책임 전가, 말 바꾸기, 공갈 협박을 일삼으며 추태를 보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유가 정치에 경고하려는 것이었다는 설명이나 두 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느냐는 변명은 아재 개그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습다 못해 서글픈 발언이었다.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버스로 길을 가로막고, 철조망을 두르고 몇날 며칠을 기약 없이 버티려고 했던 건 못난 짓의 끝판이었다.그뿐 아니다. 윤석열은 궁지에 몰리자 지지자들을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대통령 관저에서 그렇게 했고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받으러 나서면서도 또 그랬다. 위헌, 위법 비상계엄으로 내란을 획책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내란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내란 우두머리로 구속된 후 그의 지지자들이 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하여 유리창을 부수고 경찰 방패를 빼앗아 폭행도 했으며 법원의 담을 넘어 들... -
전시작전통제권에 대한 반성적 회고
지난 12·3 계엄 사태 이전의 1년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2023년 11월에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이 백령도, 연평도 등지의 서북 도서에 도발을 해 올 경우 해주에 있는 북한군 4군단 사령부와 예하 부대 지휘소와 지원시설을 폭격하는 ‘합동타격 계획’을 수립하였다. 합참은 대통령실 지시 때문에 이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합참의 실무자조차 이 계획은 “너무 위험하다”며 실행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합참은 이 계획에 이어 북한의 전방 4개 군단(1, 5, 2, 1)까지도 타격할 추가계획도 수립했다. 그해 10월 부임한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북한 도발에 즉·강·끝(즉시 강하게 끝까지) 응징을 외치는 상황이었고 남북한이 체결한 9·19 군사합의서의 일부 조항이 무력화된 마당에 군사 행동에는 어떤 족쇄가 풀린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언제든 북한 전방 전력을 초토화할 수 있는 이런 위험한 계획을 접한 장교들은 “사실상 전면전 아니냐”며 몹시 경계... -
민주주의와 자연의 역습
모든 동료시민들에게 “안녕하시냐”고 묻고 싶다. 어떻게 해가 바뀌었는지, 새해에는 무슨 계획을 세워야 할지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상태로 2025년을 맞이했다. 지난해 12월3일 밤에 시작된 계엄 선포와 헌정질서 파괴에 대한 수습은 43일째인 오늘까지 지지부진한 채, 윤석열 체포라는 중간 고비를 넘었을 뿐이다. 광장에서는 희망과 실망이 오가고 운동 차원에서는 포스트 윤석열 시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거대 양당은 이를 관망하면서 이해득실을 계산하고 있다. 사태가 진정되기를 지켜보는 게 어느덧 지루하면서도 터질 게 터졌고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한 상태로 가기보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화위복이 될 거라는 기대가 더 높다. 무엇보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더욱 불안한 일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나 태평양 건너 일이지만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캘리포니아의 산불 소식이다. 자연과 인간이 대규모로 충돌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재난으로 이어지는데도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비교적 단순... -
내란 이후, 기본부터 다시
머잖아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될 것이다. 탄핵 심판은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인데, 위헌·위법한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을 파면하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윤 대통령을 파면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켜도 된다’고 허용하는 셈이 된다.그러나 권력자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다른 헌법기관을 침탈하고 마비시키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소 우여곡절이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윤 대통령은 파면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보수-진보의 문제도 아니다. 최소한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유지하려고 해도,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에 대한 파면은 불가피하다.문제는 그다음이다. 단지 윤 대통령을 파면하고 처벌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온전히 회복된다고 할 순 없다. 더구나 윤 대통령 측이 내란 이후에도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 사이의 분열과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따라서 ... -
대통령발 내전과 내란
용산의 화법이 ‘내란’에서 ‘내전’으로 바뀌었다. 윤석열 변호인단이 ‘대통령 체포를 강행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고 국민을 위협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대통령과 변호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라고 직접 확인해 줬다. ‘전쟁’이란 단어를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지 귀를 의심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대선을 앞두고 개봉돼 화제가 된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가 우리나라에서 현실화하는 불안에 휩싸였다.이 영화는 <엑스 마키나>와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을 통해 공포와 환상을 절묘히 결합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또 다른 명작이다. 무엇보다 섬뜩한 건 실전의 공포로 묘사된 대통령발 내전이 한국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한국 개봉일자가 대통령 체포영장이 발부된 12월31일이란 것도 심상찮은 우연이다.공포 포인트는 영화의 4가지 특징과 관련된다. 첫째, 장면과 배경음악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둘째, 배경지식을 제공하지 ... -
나라를 거덜 내는 뻔뻔한 헌법 모독
12·3 내란 사태가 엉뚱하게 장기화되고 있다.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내란이 묻지마 옹호세력을 집결시키면서 심리적 내전 수준으로 번질 조짐이다. 전 세계가 생중계로 목도한 현실마저 부정하고 ‘대안적 사실’이라는 허구가 만들어내는 황당한 궤변을 내세워 나라를 거덜 내고 있다.사실관계를 왜곡하고 대중을 현혹하는 법리논쟁을 결합시켜 애당초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사안을 정쟁으로 만들거나 사법절차를 통해 논박되어야 할 사항을 공권력을 부정하는 정치선동으로 둔갑시키길 서슴지 않는다.탄핵심판에서 내란행위를 헌법위반 문제로 한정하는 과정을 정쟁화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탄핵심판이 형사소송과 구별되는 징계절차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탄핵심판에서는 직무집행이 헌법과 법률에 중대하게 위배되는지만 심판하면 된다. 형사책임을 묻는 절차는 헌재의 관할이 아니며 별도로 형사법정에서 다툴 일이다. 국회의 소추사실을 바탕으로 탄핵심판의 대상을 헌재의 관할에 맞게 정리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
탄핵 이후 누가 무엇을
윤석열 대통령이 벌인 시대착오적 계엄 사태가 대통령 파면을 향해가고 있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은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고 조기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것으로 전망된다. 벌써 벚꽃대선, 장미대선 보도가 나오니 늦어도 초여름에는 새 정부가 들어설 듯하다.사실 취임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준 행보는 당황스러웠다. 시민들의 분노는 깊어갔고 정치권에서 일찍부터 탄핵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대통령의 계엄 망상이 자신의 파멸을 앞당긴 꼴이다. 그런데 마침내 ‘대통령감’이 안 되는 사람을 탄핵시키면, 대한민국 시민들은 평안해지는 걸까? 헐값 노동에 하루하루가 힘겹고, 전월세에 허리가 휘며, 여러 차별에 고통받는 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까? 안타깝게도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이번 계엄 사태에서 우리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은 다시 한번 발휘되었다. 과거 군부독재에 맞선 1970, 1980년대 민주화운동, IMF 금융위기에서 나라를... -
음모론
어떤 소셜미디어에서 특정한 음모설을 비판했더니 온갖 반박과 비난이 쏟아진다. 교수 맞아? 회색분자! 등등 인신공격은 기본이다. 내가 존중했던 분들도 그 내용에 일리가 있다고 거든다.음모론이란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공식적·합리적 설명 혹은 해석을 물리치고 그 뒤에 어마어마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주장이다. 주로 권력자가 비밀리에 음모를 통하여 자기의 거대한 이익을 취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속인다는 설이다. 예컨대, 9·11테러가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설, 심지어 1969년에 미국 우주비행사가 달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도 거짓이라는 주장, 제주항공 참사를 ‘특정 정치세력의 자작극’으로 몰아가기 등 중요 사건에는 음모론에 기초한 반론이 생겨난다.문제는 상당수의 식자도 이런 유의 주장에 쉽게 넘어간다는 점이다. 내가 신뢰했던 어떤 사회운동가는 지금도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미국 정부의 음모에 의해 대중들이 기만당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