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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다양성 포기하진 않았다
한 달여 전쯤 워싱턴에서 차를 운전해 귀가하던 중 뒤에서 오는 대형 밴에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가해 차량 운전자와 내게 이것저것 묻고는 사고 경위를 적은 리포트를 건넸다. 경찰의 도움으로 사고 피해 수습을 위한 첫 고비를 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리포트 작성자란에 적힌 경찰관의 이름이 한국 성씨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일말의 반가움도 느꼈다.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한국계인 경찰로부터 편의를 제공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소수자의 얼굴’을 한 미국 경찰을 대하면서 법 집행기관의 다양성 확보가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의 숙원 과제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흑인 등 소수인종에 대한 경찰의 처우를 둘러싼 논란은 미국 인종 갈등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문제다. 경찰 조직이 다양성의 외피를 두른다고 단번에 해결될 리는 없다. 직원 훈련과 조직문화 개선, 나아가 인종 불평등과 범죄의 악순환을 끊어내려는 노력이 더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그... -
북·일, 북·미 그리고 한국
북한이 김여정 담화를 통해 일본과의 대화 의향을 시사하자 미국 정부는 ‘어떤 종류의 관여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공들인 한·미·일 3국 대북 공조가 느슨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담긴 원론적인 지지에 가까웠다. 미국의 한 한반도 전문가는 “한·미와 대화 생각이 없다는 북한이 일본에는 열려 있다고 한 것은 다분히 3자 간 틈을 벌리려는 의도”라고 말했다.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에선 일말의 경계심마저 묻어났다. 외교부는 북·일 접촉이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안정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전제를 달았다. 김여정 담화가 전날 한·쿠바 수교 발표에 대한 맞대응 성격이 크다는 인식도 내비쳤다.북·일 정상이 마주 앉기까지는 걸림돌이 상당히 많다. 납치 문제와 북한 핵·미사일 해법에서 양측의 간극은 매우 크다. 일본 입장에서도 대북 제재와 북·러 군사협력이라는 국제안보 위협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북한과의 본격적인 협상은 부담스러운 일이다.그런데... -
짐 싸는 교민이 늘어가는 이유
“한국 사람은 세 명 귀국하면 한 명 정도 들어오는 것 같아요.”중국 베이징 한인 밀집지역인 왕징(望京)의 부동산 중개업체 관계자 얘기다. 베이징 한인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한인 숫자는 점점 줄고, 주 고객층을 잃은 상인들도 울상이다. 상인들은 “ 한국인만 바라봐서는 장사를 할 수 없다”며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한다. 실제 생업을 접고 짐을 싸는 이들이 적지 않다.베이징의 한인 숫자가 줄기 시작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중국이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활발하던 시절에는 최대 10만명을 넘어섰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가 본격화되기 전인 2016년까지만 해도 6만명 이상이 거주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까지는 3만~4만명, 팬데믹 기간에는 1만~2만명으로 추산했다. 한인사회에서는 현재 교민 수를 1만명 이하로 본다.교민 감소 추이는 재외국민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재외동포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중... -
미국 민주주의를 위한 처방전
조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수시로 민주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바이드노믹스’ 홍보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날을 세우는 게 재선 전략으로 효과적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바이든은 1·6 의회 폭동 3주년을 회고하며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제물로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말했다.그러자 트럼프는 자신을 기소한 “바이든이야말로 민주주의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미 역사상 최초로 대선 결과에 불복,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의 근간인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방해했던 그다.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하지만 적잖은 수의 미국 유권자들이 그의 논리를 수긍한다.진영에 따라 민주주의 개념조차 ‘경합’을 벌이고, 양측 사이에 접점은 거의 없다. 미국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는 여기에서도 확인된다.하버드대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2023년 9월 펴낸 <Tyranny of the Minority>(소수의 폭정)에서 트럼프 집권을... -
블랙스완과 회색코뿔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9년 1월 중앙과 지방의 주요 지도부를 모아놓고 “블랙스완을 고도로 경계하고, 회색코뿔소도 예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전년도 경제성장률이 6.6%까지 떨어져 28년 만에 가장 낮은 경제성적표를 받아든 날이었다. 블랙스완은 일어날 확률이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큰 충격을 가져오는 위험을 가리킨다. 회색코뿔소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위험을 의미한다. 시 주석은 2021년 1월에도 “각종 위험과 도전을 잘 예측하고, 블랙스완과 회색코뿔소 사건에 잘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발생으로 전년도 경제성장률(2.2%)이 1976년 이후 40여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뒤 나온 발언이었다.올 한 해 중국에서 가장 뜨거웠던 뉴스는 단연 경제 문제였다. 연초 3년 만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이후 쏟아졌던 중국 경제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암울한 전망으로 바뀌어갔다. 내수와 수출은 부진하고 부동산 시장 침체로 ... -
한·미·일 전략은 있나
미국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 커트 캠벨은 지난 7일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이 더 이상 미국과의 외교에 관심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지를 우려한다. 이는 우리가 억제력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이미 오래전 실종된 대북정책의 실패를 자인한 말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한·미관계를 취재하는 입장에선 캠벨의 일본 관련 발언에 좀 더 눈길이 갔다. 한국, 일본과의 3자 협력 강화를 핵심 성과로 꼽은 그는 “일본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자 세계무대 파트너”라며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일 미 대사를 지낸 빌 해거티 상원의원(공화)에게는 “일본은 우리 모두에게 각별한 나라” “우리는 일본에 대한 깊은 사랑을 공유한다”는 말을 건넸다. 전후 일본 형성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과시라도 하듯 “우리는 그 잔해(rubble) 위에서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고도 했다.청문회... -
뒷맛 씁쓸한 한·중·일 장관회의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가 4년3개월 만에 열렸다.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도 회의 참석차 2년2개월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외교부는 이번 회의에서 3국 외교장관이 3국 협력을 조속히 복원하고, 정상회의를 상호 편리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발표 내용만 놓고 보면 이번 회의는 원만히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3국 장관 회의가 4년여 만에 재개됐다는 것만으로도 일정한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번 회의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3국 정상회의였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회의 개최에 앞서 “이번 회의를 통해 3국 정상회의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힐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하지만 회의 후 3국 장관은 대략적인 정상회의 일정도 정하지 못한 채 준비를 가속화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재확인했다. 결국 3국 정상회의는 의장국인 한국 정부가 희망했던 연내 개최가 어려워졌다. 한국과 중국 측 발표에도 미묘한 뉘앙... -
디리스킹의 실체 보게 될까
“모든 의제가 테이블 위에 오르는” 미·중 정상회담이 15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모두 ‘관계 안정화’가 절실한 상황이다. 양국이 군사 대화 재개에 합의한다면 대만이나 남중국해 주변에서 높아지는 우발적 충돌 우려를 줄이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 갈등을 해소할 돌파구는 나오기 어렵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중론이다.‘미·중관계와 한국’의 관점에서 주목할 점은 이번 회담에서 미국의 대중국 ‘디리스킹’ 전략이 어떻게 구체화할지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유럽연합(EU)과 중국 간 정상회담도 내달쯤 열린다고 한다. 미·EU의 디리스킹 전략은 한국의 대중 정책과 외교 공간과도 긴밀히 연관돼 있으므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디리스킹은 지난 4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연설 이후 미국이 내놓는 대중 메시지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주로 디커플링과 짝을 이뤄 “중국과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을... -
음모론 부추기는 중국 정부
자주 대화를 나누는 한 중국인 친구는 가끔 중국 정치 상황에 대해 묻곤 한다. 친강 전 외교부장이 갑자기 낙마했을 때도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유와 배경을 아는지 물은 적이 있다. 당시 이런저런 ‘썰’을 풀자 그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중국 정치의 비밀주의와 불투명성에 대한 볼멘소리였다. 중국 내부 정치 상황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라오바이싱(老百姓·서민)’들은 비밀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갖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알려고 해봐야 알 수도 없고,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관심을 가져봐야 별로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자국 정치 상황에 대해 외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지난 27일 리커창 전 중국 총리의 비보가 전해졌다.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1~2기 왕성히 활동하다 퇴임한 지 7개월밖에 안 된 총리가 갑자기 사망하자 외부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로 ... -
미국이 놓친 것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은 훗날 2023년 10월 미국 중동정책이 처한 위기를 연상할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말 한마디를 남겼다. 그는 지난 9월28일(현지시간) 한 행사 연설에서 “중동 지역은 지난 20년간보다 오늘날 조용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8일 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중동은 50년 만에 최악의 전쟁 위기로 동요하고 있다.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북한·러시아 간 무기 거래 의혹의 경우, 첩보까지 공개하며 사전 경고했던 조 바이든 정부다. 미국과의 관계나 전략적 가치로 따져도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보다 미국에 더 중요한 나라다. ‘중동의 화약고’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도 늘 잠재해 있었다. 이번에는 왜, 어쩌다 놓쳤을까. 치밀하기로 소문난 설리번이 “조용하다”고 선언하게 만든 자신감은 어디에서 왔을까.전모를 다 알 도리는 없지만, 현재로선 미국이 야심차게 추진한 ‘외교를 통한 중동 안정화’ 구상에 대한 지나친 믿음 내지 그릇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