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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미래
  • [창작의 미래] 웹툰엔 ‘거꾸로 서스펜스’
    웹툰엔 ‘거꾸로 서스펜스’

    회귀, 빙의, 환생. 요즘 웹소설과 웹툰에서 널리 쓰인다는 이른바 ‘3대 코드’다. 어떤 사람은 이능력을 덧붙이기도 한다. 3대 코드건 4대 코드건 핵심은 이렇다. 주인공은 알지만 악당은 모르는 정보가 있다는 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주인공은 강하다.“3대 코드가 들어간 웹소설 작품이 인기다. 그런데 3대 코드에 기대지 않은 작품이 영상화 가능성은 높다.” 팩트스토리의 고나무 대표가 들려준 이야기다. 어째서 그럴까? 3대 코드가 들어가지 않은 작품이 들어간 작품보다 특별히 ‘고급스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고민하던 중 앨프리드 히치콕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화감독 히치콕은 서스펜스의 대가로 유명했다.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를 이렇게 구별했다. “책상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갑자기 책상 밑에서 폭탄이 터지면 서프라이즈다. 반면 책상 밑에 폭탄이 장치된 사실을 먼저 관객에게 보여주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주인공과 사람들이 책상 주변에 ...

    2021.08.26 03:00

  • [창작의 미래] 요즘 독자들이 빠진 ‘앎의 즐거움’
    요즘 독자들이 빠진 ‘앎의 즐거움’

    독자의 취향이 변했다. 몇해 전만 해도 주인공을 죽도록 괴롭히는 것이 이야기 작법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론적 배경도 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에 따르면 옛날 신화부터 20세기 영화 <스타워즈>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고갱이가 한결같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죽음과 맞먹는 고통을 겪어야 강해진다는 ‘원형 신화’라는 개념이다. 말하자면 수천 년 동안 독자와 관객은 주인공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를 좋아한 셈이다. 반면 오늘날의 독자는 주인공이 고생하는 부분을 건너뛰고 싶어한다. 독자는 어째서 달라졌을까?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오늘날의 독자는 옛날보다 많은 작품을 본다. 몇년 걸려 서사시 한 편을 외국어로 읽던 옛날 독자와 하루에 영화를 몇 편씩 감상하는 요즘 시청자가 같을 수는 없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나는 지난 칼럼에 썼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옛날 독자가 느끼던 ...

    2021.07.29 03:00

  • [창작의 미래] 스마트폰 세대가 ‘사이다’ 전개를 원하는 이유
    스마트폰 세대가 ‘사이다’ 전개를 원하는 이유

    “아래로 쭉쭉 스크롤을 내리며 보는 (…) 스마트폰 세대 독자들은 주인공의 ‘성장’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대사량이 적고 속도감 있는 ‘사이다’ 전개를 원한다.” 6월 초 한국일보에 이현석 엘세븐 대표의 인터뷰가 실렸다. 이 기사가 내 눈길을 끈 이유는, 웹툰을 연구하는 박인하 선생과 이재민 평론가도 같은 현상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옛날 독자들은 주인공이 죽도록 고생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요즘 독자는 그런 이야기를 식상하다 여긴다.게임도 상황이 비슷하다. 옛날에 게임하던 사람들은 어렵고 지루한 미션을 반복했다. 아이템을 얻고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요즘 대세는 방치형 게임이다. 예전 칼럼에도 지적했지만, 일수 찍듯 한번씩 게임을 켜면 알아서 레벨이 쌓여 있는 것이다.옛날 사람은 고생담을 즐겼는데 요즘 사람은 아니라는, 이런 현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회현실과 관계가 있을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요즘 사람은 고생하고 ‘노오력’하기 싫어해...

    2021.07.01 03:00

  • [창작의 미래] 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중요하지만 종종 뒷전에 밀리는 질문이다. ‘회사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고객인가, 사장인가, 노동자인가’와 같이 길고 긴 입씨름이 벌어지는 일을 피하기 위해, 일단 ‘작품을 만들면 돈을 주는 사람이 누구냐’만 생각하자.창작자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두 종류다. 하나는 어려운 말로 패트런이라고 하는, 돈 많은 예술 후원자다. 다른 하나는 요즘말로 ‘내돈내산’(내 돈 내고 내가 사는)의 평범한 개인이다. 돈이 많고 적음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작품에 돈을 내는 사람과 작품을 향유하는 사람이 같냐, 다르냐로 나는 기준을 삼았다.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의 구분에서 빌려온 기준이다. 어린이는 아빠·엄마가 사준 하드커버 전집을 읽고 청소년은 용돈을 쪼개 산 책을 주머니에 꽂고 다닌다고 했다. 한때 우리는 개인이 자기 돈 내고 작품을 즐기는 일에 익숙했다. 책, 종이만화, 음반, 극장에서 보는 연극과 영화가 그랬다. 이 시절이 좋았다는 사...

    2021.06.03 03:00

  • [창작의 미래] ‘NFT’와 과시적 소비
    ‘NFT’와 과시적 소비

    NFT는 성공할까, 실패할까? 나는 성공을 바라는 쪽이다. 물론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먹고살 걱정에 여러 책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은 책은 <콘텐츠의 미래>였다. 미래의 창작자는 일단 작품 판매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보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작가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 광고를 붙이건 강연을 하건 제 살길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옳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다. 창작물을 팔아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진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NFT 소식을 접하고 나는 놀랐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작품 판매시장이 디지털 시대에도 가능하다니, 창작자로서 반갑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NFT 시장에서 사고파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작품일까? 적지 않은 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디지털 작품은 많은 돈을 들여 사도 의미가 없다. 무한정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고파는 것은 무엇일까? ...

    2021.05.06 03:00

  • [창작의 미래] 창작물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시대
    창작물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시대

    대체 불가능 토큰(NFT) 소식이 뜨겁다. 누구는 작품을 얼마에, 누구는 방귀 소리(!)를 얼마에 팔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다. 나는 문예이론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발터 베냐민을 생각한다.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는 ‘아우라의 상실’에 대해 썼다. 아우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예술작품에도 사람에도 사물에도 그는 이 말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맥락은 뚜렷하다. 그는 아우라의 상실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아우라가 사라지면 “평등성의 감각”이 발전하리라 기대했다. 사회주의를 좋아하던 지식인답다.글의 경우를 보자. 옛날에는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보다 훨씬 적었다. 글쓰기에 아우라가 있던 시절이다. 그러다 “신문이 보급”됐고 많은 독자가 필자로 합류했다. 베냐민은 자기 때 이미 “작가와 대중의 본질적 차이는 사라졌다”고 봤다. 글의 아우라 역시 사라졌다.영화는 어떤가. “오늘날은 (전문 배...

    2021.04.08 03:00

  • [창작의 미래] K문화 위상 못 따라가는 창작 환경
    K문화 위상 못 따라가는 창작 환경

    창작만 고통이랴? 즐기는 일도 쉽지 않다. 게임을 하다가 밤을 새우고, 드라마 때문에 잠을 설치며, 웹툰과 웹소설을 읽느라 누워서도 폰을 놓지 못한다. 즐길거리가 너무 많아도 번뇌다. 그래서일까. 요즘 대세는 편하게 즐기는 창작물이다. 웹툰은 스크롤을 흘려 보내며 읽는다. 게임은 ‘방치형’이 한동안 유행이다. 가끔 큼직한 결정만 내릴 뿐, 게임 속 인물이 알아서 뛰어다니고 나는 지켜만 본다. 올해는 ‘하이퍼캐주얼 게임’이 유행하리라고 한다.창작자는 고달프다. 슬렁슬렁 즐긴다는 말이 슬렁슬렁 만들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흘려 보내는 사람도, 지켜만 보는 사람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려면 연출이며 작화며 품이 많이 든다. 즐길거리끼리 경쟁도 치열하다. 개인 창작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까? 창작자는 머릿속이 복잡하다. 예전 같으면 이럴 때 외국의 상황을 참고했을 터이다. 요즘은 그러기도 쉽지 않다. 창작 분야에서 한국이 한발...

    2021.03.11 03:00

  • [창작의 미래] 창작자에게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났다
    창작자에게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났다

    지난 주말 미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텔레그램으로 문자를 보냈다. “클럽하우스 해봤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어린이 프로그램 <미키마우스의 클럽하우스>를 생각했다. 나는 클럽하우스 앱을 받아 깔았다. 아이들을 보면서 클럽하우스를 이용하기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들어가보고는 싶었다.클럽하우스는 재미있어 ‘보인다’. 아니, ‘들린다’고 해야 하려나. 음성으로 떠드는 채팅방이 이곳저곳에 열려있고, 아무 방이나 접속해 오고가는 대화를 들을 수 있다. 끼어들어 함께 수다 떨 수도 있다. 아직은 아이폰만 서비스를 하는데 “이러다가 애플사가 안드로이드용 출시를 늦춰달라고 클럽하우스에 뒷거래 요청하겠다”는 농담이 SNS에 올라올 정도다.‘그냥 전화로 수다 떠는 것과 다른가’ ‘팟캐스트가 낫지 않나’. 이런저런 예측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클럽하우스의 기세가 대단하다.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 수다를 떨 기회가 없어져 그럴까? ‘프로야구 중계 보...

    2021.02.11 03:00

  • [창작의 미래] 작가는 가도 캐릭터는 남는다
    작가는 가도 캐릭터는 남는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고도 하고 <지와 사랑>이라고도 하는 헤세의 소설을 읽으며 궁금했다. 골드문트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제 이름 석 자(?) 남기는 일에 집착할 줄 알았는데, 사람은 잊혀도 자기가 만든 조각만 남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는 신기했다. 골드문트는 노느라 바빠 그 작품이나마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세상 물정 모르던 소싯적 나의 감상이다. 죽은 후 남는 작품이라도 있으니 골드문트가 부럽다. 작가가 살아 있는 동안 작품이 놓여 있던 성당이 문을 닫지 않고 작품들이 실종되지 않는 것만도 부럽다. 오늘날 작가들은 자기 책이 절판되고 자기 작품이 실린 플랫폼이 서비스를 종료하는 상황을 자주 겪으니 말이다. 골드문트는 작가, 작품이 놓인 성당은 플랫폼이다. 골드문트는 자신의 방랑벽과 싸우면 그만이었다. 오늘날의 작가는 겨뤄야 할 상대가 많다. 우선 자기 작품을 실어주는 플랫폼의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플랫폼과 팀을 이뤄...

    2021.01.14 03:00

  • [창작의 미래]‘한배에 탄’ 창작자와 플랫폼의 상생전략
    ‘한배에 탄’ 창작자와 플랫폼의 상생전략

    “한배에 탔다”는 말이 있다. “인 에아뎀 에스 나비(in eadem es navi)”라는 라틴어 격언을 옮긴 말이다.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가 즐겨 썼다나. 서로 좋건 싫건, 배가 가라앉으면 같이 망하고 배가 목적지에 닿아야 산다는 뜻이다. 플랫폼과 창작자도 마찬가지일 터다.그런데 같은 배에 타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추억의 영화가 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이 이런 주제였다.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노아의 방주에 몰래 탄 좀벌레 이야기를 썼다. 1781년에 일어난 노예선 ‘종’의 사건은 극단적인 경우다. 선장은 자기 이익을 위해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노예들을 바다에 던졌다. 훗날 화가 윌리엄 터너가 ‘노예선’이라는 작품으로 그렸다. 예술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경영자가 ‘한배에 탔다’는 격언을 좋아하는 현상도 흥미롭다. 창작자 입장에서 플랫폼에 대해 생각하던 참이다. 예를 들어, 조회수나 실시간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 쪽...

    2020.12.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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