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봄, 청와대 인근 서울맹학교에서 잠시 고등부 1학년생 네댓 명을 상대로 방과후 공부를 가르친 적이 있다. 당시 맹학교는 침술과 안마를 가르치는 기관이라 다른 직업을 갖고자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은 별도로 영어, 수학 등을 배워야 했다. 대학생이던 나는 그들의 책을 보고 기겁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영한사전이 점자책으로는 서가를 가득 채울 만큼 방대했다. 알파벳 ‘A’ 한 편이 일반 사전보다 두꺼워 사용 후 제자리에 꽂아두지 않으면 사전으로 기능할 수도 없었다.일반학교에서 2월 말 배포되는 새 교과서가 맹학교 학생들에게는 1학기 중, 심지어 여름방학이 지나서 제공된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인쇄된 교과서가 나온 후 비로소 점자교과서 제작에 들어가는데, 민간기관이나 봉사단체의 수작업에 의존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공부하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는, 그야말로 책 기근(book famine)의 참담한 현장이었다.통합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2...
2026.01.05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