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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은 사람만의 힘
제목은 나의 묘비명에 딱 한 구절만 새겨 넣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새겨 넣을 문구다. 여태껏도 그러했지만 세상을 떠날 그날까지도 인문은 내 삶의 동력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3년간 연재해오던 ‘행로난’을 갈무리하는 이번 글의 제목을 “인문은 사람만의 힘”으로 잡았다. 여기서 인문은 순수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크고도 넓은 개념이다. 예컨대 이러하다. 조선의 선비들이 자신을 닦는 수기(修己)와 세상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을 ‘되먹임 구조’로 파악했듯이, 다시 말해 수기는 치인의 시작이며 치인은 수기의 완성이라고 여겼듯이, 인문은 세상 속에서 나를 경영하는 몹시 미더운 터전이다.더구나 인문은 사람으로서 피할 수 없는 원초적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원초적 불안이란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존재인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됨으로써 지니게 된 것이다. 사람이 미래를 생각할 줄 앎은 양날의 검이다. 미래를 ... -
‘사회적 유령’ 제조법
“존이불론(存而不論)”이라는 말이 있다. 멀쩡히 존재함에도 그에 대하여 거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엄연히 존재하는 그것이 현실 속에선 없는 것이 된다. ‘사회적 유령’ 만들기라고나 할까, 암튼 전근대 시기 한자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줄곧 있어왔다.이런 식이었다. 국가에 커다란 환란이 있어도 조정의 신하들은 이를 임금 앞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회 속 현실에선 한창 벌어지고 있는 환란이 군주의 현실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누군가 입바른 소리를 하면 아예 그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살아 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치부한다.때로는 이를 뒤집어 현실 호도의 쏠쏠한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존이불론을 뒤집으면, 그러니까 없는 사실도 작정하고 거론하면 있는 사실로 둔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만 그러했음도 아니다. 정치인 등 공인의 범죄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만 봐도 그러하다. 연일 대서특필하며 몰아가면 없는... -
국가 이름으로 판 ‘매력적’이란 함정
‘킬러문항’이 제거된 자리에 매력적 오답이 들어앉았다. 지난 9월 모의평가 때부터 킬러문항을 ‘킬’한 자리를 ‘준킬러 문항’과 ‘매력적 오답’으로 채워 변별력 확보를 시도했다. 그런 기조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지속되었다.매력적 오답을 교육 당국이나 언론에서는 “내용을 확실히 파악해야 피할 수 있는 헷갈리는 선지”라고 설명한다. 이런 뜻풀이만 봐서는 왜 그러한 선지에 ‘매력적’이란 수식어를 붙였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헷갈리는’ 것과 ‘매력적인’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요, 수험생 입장에서 헷갈리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가능성은 전혀 없기에 그러하다.결국 매력적이란 건 수험생이 아니라 철저히 출제자나 교육 당국의 입장에서의 판단이다. 변별력을 확보하는 데 매력적이기에, 단지 헷갈리게 하는 게 아니라 고의로 정답으로 오인하게끔 문제를 낸다는 것이다. 9월 모의평가 결과를 두고 교육 당국에서 준킬러 문항과 매력적 오답 등으로 변별력 확보에 성공했다고 자평한 데서... -
어머니를 팔아먹은 자
사전적으로 청년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표준국어대사전>)이다. 이에 따르면 20, 30대 언저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물론 이보다 훨씬 넓게 잡기도 한다. 가령 유엔은 18세부터 65세까지를 청년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평균수명이 연장되고 신체 역량이 증진된 점 등을 감안하여 그렇게 정한 듯싶다.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의 도래를 점치고 있으니 나름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촌은 진작부터 60대도 청년이었다. 적잖은 지자체에서는 조례로 40대 중반까지를 청년으로 규정해 두었다. 우리나라 국민이 일찍부터 다른 나라보다 건강하고 장수해서 벌어진 현상은 아니다. 두 세대 가까이 심화되기만 한, 인구와 교육, 문화, 경제 등의 서울 집중으로 야기된 현상이다. 지역 소멸 위기를 아주 잘 말해주는 현상인 것이다.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지역 소멸과 서울 집중을 부추기고 있다. 올해 4월 교육부... -
천하의 악이 죄다 모여들다
<논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주왕의 선하지 못함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군자는 하류에 처하기를 싫어하니 천하의 악이 모두 그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공자 제자 자공의 말로, 여기서 주왕은 고대 중국 상 왕조의 마지막 천자이고, 군자는 치자를 가리킨다. 주왕은 전근대시기 내내 폭군의 대명사로 운위되었던 인물이다. 공자는 춘추시대 사람이고, 춘추시대는 왕조로 치면 주나라 시절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마지막 천자 주왕을 역성혁명, 요새로 치면 쿠데타로 축출하고 천자의 나라로 거듭난 왕조였다. 그렇다 보니 주왕에 대한 평가가 아주 신랄하였다. 역사는 대개가 승자의 기록이니 말이다.자공의 말은 역사가 지니는 이러한 관성을 간파한 것으로, 폭군 중의 폭군으로 꼽히는 주왕이 실제로는 세인들의 인식처럼 그렇게 악한 자는 아닐 수도 있다는 통찰이다. 동시에 자공은, 주왕은 이러한 평가를 들어도 싸다는 투로 그렇기에 치자 곧 위정자는 하류, 그러니까... -
전통 중국과 첨단 기술의 결합
지난 8일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폐막했다. 메달 획득 여부와 무관하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경기에 임한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더 큰 성취와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경기 외적으로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뇌리에 깊이 남았던 것은 개회식과 폐회식 공연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참으로 다채롭고 화려했지만 그 속은 ‘전통 중국’과 ‘첨단 기술’, 이 두 가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론 생태 보전 같은 지구촌 공통 가치의 표방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부차적이었고 주되게는 중국의 전통 자산이 디지털 기반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발산되고 있었다.공존공영, 평화 같은 인류 공통의 가치보다는 전통 중국의 가치가 우월하다는 선언인 듯했다. 중국의 가치가 아시아의 가치이고, 아시아의 가치가 곧 중국의 가치라고 웅변하는 듯싶었다. 그래서인지 개·폐회식 공연에서는 중국의 전통과 첨단 기술의 결합만으로도 21세기 국제사회를 너끈히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 -
오늘날의 명판결
청대 초엽, 두 건의 ‘명판결’이 있었다. 하루는 젊은 하인 하나가 평소 자던 곳이 아닌 곳에서 잤다. 그의 잠자리가 비게 되자 곽안이란 자가 그곳에서 잤다. 그런데 젊은 하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다른 하인이 자고 있던 곽안을 젊은 하인인 줄 알고 죽였다. 이에 곽안의 부친이 그를 관가에 고발하였다.당시 현령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살인한 하인에게 관용을 베풀어 아무런 형벌도 내리지 않았다. 곽안의 부친이 울부짖으면서 호소했다. 반평생 겨우 아들 하나 두었을 뿐인데 그 아들이 죽었으니 이제 누구를 의지해 살아가야 하냐며 절규하였다. 그러자 현령은 살인한 하인을 아들로 삼으라는 판결을 내렸다. 아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원수를 아들로 삼아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를 갈며 관청에서 물러나는 것뿐이었다.이에 질세라 다른 곳의 현령도 기가 막힌 명판결을 내놓았다. 자신이 다스리는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잘 살고 ... -
맹자가 사회주의자?
인민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 인(人)과 백성 민(民)으로 이루어진 단어다. 둘 다 아무런 이념적 색채를 띠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선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북한과 중국에서 즐겨 사용한 탓에 우리 사회에서 인민은 사회주의와 즉각 연동되는 ‘빨갱이’ 용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맹자도 사회주의자일까? “제후에게는 보물이 셋이니 토지와 인민과 정치다”라고 하여 인민이란 어휘를 비중 있게 사용해서 하는 말이다.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는 또 어떨까? 맹자보다 더 자주 인민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그는 맹자보다 더한 붉은 사회주의자였을까?본래 인은 고대 중국에서 식자능력을 지닌 이들을, 민은 식자능력이 없는 이들을 가리켰다. 당시 식자능력은 세상 통치의 요체였다. 하여 이를 지닌 인은 지배층, 지니지 못한 민은 피지배층이 되었다. 따라서 인민 하면 지배층, 피지배층을 포함한 세상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가령 한비자가 “먼 옛날에는 인민이 적었고... -
축적을 훼방 놓는 사회
“유리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않아요.” 언젠가 나와 교정을 산책하던 건축학자께서 불쑥 던진 말이다. 교정을 잔뜩 채운, 유리나 금속 재질로 외벽을 마감한 ‘깊이 없는’ 건물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관악산 자락에 터 잡은 지 50년 가까이 됐건만 교정에선 시간 깊은 장소가 풍기는 내음을 여간해선 맡기 힘들다.그렇게 세월의 깊이가 스며들지 않는 교정은 세월이 흘러도 다시 옅어지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양 싶어 더욱 씁쓸하다. 스며든다고 함은 무언가가 축적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떨까? 세월의 깊이, 이를테면 우리 사회가 일구어온 좋은 경험, 우량한 전통 같은 것이 제대로 쌓이고 있을까?역사는 축적이 되어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고 일러준다. 꼭 성공만이 쌓여야 빛을 발하는 것도 아니다. 실패도 마찬가지다. 자꾸 실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설파했듯이, 실패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지식의 획득이다. 그래서 실패의 경험이... -
먹이 사람을 갈다
송대 초엽 문인 사이에서는 ‘벽(癖)’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언가를 수집하는 풍조가 크게 일었다. 벽은 기호나 취미, 버릇 등에 ‘병적’으로 집착함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수집벽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만연했다.지성이 남달랐던 소동파도 예외가 아니었다. 먹과 벼루 수집벽을 지녔던 그는 좋은 먹을 70개나 가졌음에도 또 가지려 한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하지만 남이 지닌 좋은 먹이나 벼루를 보고는 억지로 빼앗기도 하고 슬쩍 집어 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벗이 한 방 가득히 먹을 매달아 놓은 것을 보고는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간다”며 통탄하기도 했다.자신도 헤어나지 못했던 벽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본말이 전도된 행태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음이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본말이 전도된 행태가 오히려 일상적이었던 듯싶다. 역사책에는 먹이 사람을 갈아대는 것과 같은 세상에 대한 한탄이나 절망의 목소리가 수두룩하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말을 둘러싼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