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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과 마농지
제주는 언제나 옳다. 학생들과 매년 한라산 답사를 가면서도 시간을 내어 가족과 또다시 제주를 찾는다. 품 너른 한라산과 올망졸망한 오름, 울창한 녹지와 조응하는 짙푸른 바다, 나지막한 집들과 진회색 스펀지 돌담, 소박하고 뭉근한 제주 밥상이 나를 이끈다.설문대할망이 점지해 준 자연이 싱둥하고 한없이 평화로운 제주에도, 쓰라린 과거가 있다. 우연히 들른 제주시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에서 또다시 그 과거를 마주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고구마 주정으로 항공기 연료를 생산했고, 1949년부터 수많은 사람을 감금했던 수용소로 쓰였다. 불법적 군사재판을 받고 육지 교도소로 끌려가는 모습의 역사관 앞 조각상이 처절했던 당시를 말해준다.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심했던 4·3사건은 제주도민에게 쉽게 꺼낼 수 없지만, 잊히지 않는 과거다. 그 살벌한 와중에도 의인은 있었으니, 당시 성산포서장 문형순이다. 좌익 혐의를 받는 예비검속자를 즉결 처분하라는 군인의 지시에도 그는 ‘부당... -
윤탁과 은행나무
노거수에 관한 신화나 전설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하다. 대개 이런 식이다. ‘옛날 고승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거목이 되었다’ 또는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임금의 가마를 지나가게 했다’. 나무의 나이도 어림잡아 1000년, 혹은 500년 등 ‘전설적’이다.최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나이를 추정한 결과, 1018년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렇다면 대략 서기 1000년경, 고려 목종 때부터 그 자리를 지켰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의상대사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근사한 전설은 아쉽게도 과학적 사실 앞에 힘을 잃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사실이 밝혀져 반가웠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 중에 실제로 심은 사람의 이름과 그 시기가 알려진 사례도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서울 문묘 은행나무’가 그렇다. “중종 14년(1519)에 윤탁(尹倬)을 동지관사로 삼았다. 윤탁이 강당 아래에 나무 두 그루를 마주 ... -
유럽인들과 올해의 나무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19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의 탐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정복의 역사는 환경재앙으로까지 번져갔다. 뒤늦은 후회라도 하는 것인지, 그들은 자연환경에 관심이 높다. <대영식물백과사전>을 집필한 영국 식물학자 리처드 메이비는 “나무가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라는 말로 문화의 뿌리가 자연임을 강조했다. 매년 2월 한 달간, 유럽에서는 ‘올해의 나무(European Tree of the Year)’ 선정 온라인 투표가 있다. 우승목은 3월 말 브뤼셀에서 열리는 유럽의회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2011년부터 시작된 유럽 올해의 나무는 현재 15개 국가가 참여하여 특정 나무(개체)를 선정한다. 기준은 나무 크기나 형상, 수령 등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얽힌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무가 사람을 만나 그 의미가 더욱 부각되는 사례에 주목했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그에 걸맞게 올해의 나무 엠블럼은 나무의 수관(樹冠) 모습이 사람의 ... -
카사노바와 레몬
위키피디아의 ‘카사노바’ 항목은 언어별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영어·이탈리아어·독일어·프랑스어판 등에는 대부분 그를 모험가, 작가, 연금술사, 외교관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탈리아어판에는 그 외에 철학자로도 설명한다. 한국어판에는 작가, 시인을 자칭한 사기꾼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내용으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수 없지만, 국내 평가는 곱지 않다. 그가 활동했던 18세기 유럽에선 전통적 가치와 권위가 부정되었다. 세속주의가 본격 대두되고, 계몽주의에 힘입은 혁명이 일어났으며 물리학의 새로운 체계가 완성되었다. 그런 격변의 사회 속에서 인간사회의 여러 군상은 어떤 삶을 보냈을까? 그 내면을 소개한 사람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자코모 카사노바였다. 17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여성 편력만큼이나 직업도 다양해 박물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세계를 돌며 새로운 문화와 자연을 탐구할 때, 그는 사교계를 주유하며 전 유럽을 탐색(探色)했다. 열정과 감... -
고종과 회화나무
아관파천(俄館播遷). 용어도 괴이하지만, 내용은 더 신산하다. 쉽게 말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이란 뜻이다. 아(俄)는 러시아를 칭하는 한자 ‘아라사(俄羅斯)’의 첫 글자이고, 관(館)은 ‘공사관’의 관이다. 파천이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 가는 일인데, 고종이 한양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파천이 아니라 망명이 옳다는 의견이 많다. <고종실록>에는 ‘이어(移御)’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이 설립한 ‘한성신보’에 ‘아관파천’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지금에 이른다. 설을 며칠 앞둔 1896년 2월11일, 고종은 일제의 눈을 피해 궁녀의 가마를 타고 서둘러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지금은 ‘고종의 길’로 알려진 미국대사관 뒷길을 이용했다. 이 황망한 광경을 지켜본 자는 바로 고종의 길 북쪽 편, 덕수궁 선원전 터에 사는 회화나무였다. 200여년은 족히 되었을 회화나무는 지금 덩그러니 서 있다. 고종의 피난길을 배웅하고 궁궐의... -
찰스 다윈과 난초
1862년 1월, 찰스 다윈은 원예가 베이트먼으로부터 마다가스카르에서 자생하는 난초를 선물받았다. 마침 그는 얼마 전 <종의 기원>(1859)을 펴낸 후, 곤충과 식물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었다. 난초를 보내준 베이트먼은 “당신의 <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을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이 난초와 곤충 간의 관계가 밝혀지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윈은 소포 속에 들어 있던 난초를 발견하고, “맙소사, 어떤 곤충이 이 꿀을 빨아 먹을 수 있을까?”라고 외쳤다. 꽃 아래쪽 약 30㎝ 길이의 긴 대롱 형태의 꿀샘 관(管)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윈은 난초보다 수분매개체가 더 궁금했지만, 그때까지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초의 수정을 위해서는 같은 크기의 긴 주둥이를 가진 동물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생물을 미리 예견하다니, 시간과 환경을 바탕으로 생물 변형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그이기에 가능했다. 이를 기... -
가토 기요마사와 토란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그린 3부작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명량>에서부터 <한산>을 거쳐 <노량>까지, 이순신의 노정과 충정의 완결편이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란인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마치 한 사람(이순신)이 한 나라(일본)를 대적해 싸운 전쟁처럼 기억된다. 전쟁 내내 주요 전투를 지휘했던 이순신의 존재와 업적이 그만큼 위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군 중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빼놓을 수 없다. 가토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선봉에 섰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대마도와 부산을 거쳐 보름 만에 한양에 도달했다. 그 후 북진을 거듭해 함경도와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 구역까지 진격하였다. 함경도와 남해 등 중첩되는 지역이 일부 있었지만, 이순신과 가토가 직접 부딪치진 않았다.도요토미의 명령을 받아 귀환했던 가토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재차 조선을 침략하여... -
김대중과 인동덩굴
오는 1월6일은 고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민주화 운동과 투옥, 납치와 감금, 고문과 음해, 대통령과 노벨 평화상. 김대중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정치가도 드물다.정치가로서 살아온 그의 삶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읽은 책으로 도서관을 꾸밀 정도로 그는 책을 좋아했다. 또한 다독가답게 많은 책을 집필했다. 그중 <옥중편지>는 정치가로서의 사상 외에도,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삶이 잘 드러난다. 가족에게 민주 회복과 이웃사랑에 대한 바람은 물론, 과음과 과식을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한다. 그가 얼마나 자상하고 가정적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그가 구호처럼 외치던 ‘행동하는 양심’은 언뜻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시하던 조선 양명학의 본류, 강화학파가 떠오른다.모진 세월을 겪으며, 야당의 총재가 되었던 김대중. 그는 광주 5·18민주화운동 묘역을 방문했을 때, 스스로 인동초가 될 것을 약속했다. 혹독한 겨... -
안토니 가우디와 사이프러스
무려 140년 넘게 공사 중! 무슨 일이든 후딱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에겐 익숙지 않지만, 느긋한 스페인에서는 가능한 일인 모양이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이야기다. 옥수수 모양의 외부와 달리,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키 큰 나무들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천장을 받치고 있는 듯하다. 바르셀로나의 성자 가우디는 건축을 지탱하는 많은 요소를 자연에서 차용했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덕분이다. 항상 자연에서 건축의 구조를 찾으려 했던 그는 하중을 시각화할 수 있는 간단한 방식으로 줄에 추를 매달아 늘어뜨린 ‘현수 모델’을 만들었다. 줄이 포물선을 이루며 추의 무게가 고르게 분산되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를 그대로 뒤집어 성당의 구조로 삼았다. 당시 절대적 원칙이던 구조의 수직성으로부터 건축을 해방시킨 셈이다. 이는 자연의 겉모습을 모사하는 태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인위적으로 형태를 만든 게 아니라 자연 속에서 그가 원하던 것을 ‘찾아낸’ 결과다.... -
나폴레옹과 수양버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힘만 존재한다. 칼과 정신이다. 그러나 종국에 칼은 정신에 정복될 것이다.” 전 유럽을 칼로 휩쓸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한 말이라 고개가 갸웃해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했던 회한의 말이 아니라, 한창 전성기에 한 말이라니 더욱더 의외다.수많은 전쟁에 앞장섰던 상황을 단지 그의 호전성 때문이라 말할 수 없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열혈 독자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씩 읽었던 그는 꽤 감성적인 군인이었다. 수천명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뒤엉켜 숨진 전쟁터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그 비통함을 전하며 평화를 간청하기도 했다. 칼과 정신의 힘을 잘 알고 있던 그도 그 말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전쟁의 수레바퀴를 자기 혼자 멈춰 세울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1815년 6월, 결국 그는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에 대패한 후,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약 2800㎞ 떨어진 외딴섬 세인트헬레나로 추방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