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발을 정리하며 맞이하는 새해
공동체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K선생의 옛 동료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요가 지도자 과정에서 함께 수련했다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K선생이 동기 가운데 요가를 가장 열심히, 또 잘한 분이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요가원 청소를 도맡았다는 겁니다.알고 보니 그가 요가원 청소까지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요가를 배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또 다른 수련이었지요. 시작하기는 싫지만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으로 청소만 한 일도 드뭅니다. 청소는 바깥을 쓸고 닦고 정리하는 일이지만 청소하는 이의 내면 또한 정갈하게 만듭니다. 그에게 청소 수련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K선생이 뒤늦게 인도 유학을 다녀올 만큼 요가에 깊이 빠져든 데에는 수련을 마칠 때마다 청소를 하며 마음까지 닦은 것도 한몫했습니다.공동체에는 비슷한 경험을 지닌 분이 또 있습니다.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와 잠자리에 들기 전, 명상을 생활화한 분입니다.... -
공부, 쉽게 시작해 가볍게 그만두기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모처럼 마음은 먹어도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릅니다. 먼지 쌓인 책장의 책을 꺼내 들었다가 머잖아 원래 생활로 되돌아갑니다.이런 이들에게 외국어 공부를 추천하며 자신도 그렇게 해온 사람이 있습니다. 삶에서 매일 공부하기를 꿈꾸며 이를 생활화한 여성 번역가입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뒤 공공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방송대 일본어과, 중국어과, 프랑스어과를 졸업했다고 하는군요. 우리 말 번역이 나오지 않은 영문 원서를 읽다 우연히 번역가가 된 뒤에는 독일어, 에스페란토어, 베트남어도 맛을 봤다고 합니다.그가 말하는 외국어 공부의 장점은 많습니다. 다른 일이나 다른 공부를 하면서도 할 수 있고 자신의 생활에 맞춰 강도를 조절할 수도 있습니다. “왜 쓸데없이 그걸 공부하느냐”는 타박을 듣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별로 없는 편입니다. 잘하지 못해도 흉이 되지 않고 엉성하게 공부해도 써먹을 수 있습... -
번역을 하는 이유? “필요하지 않은가”
‘오트르망’(autrement·다르게)이란 연구자 모임이 있습니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10년 동안 미셸 푸코의 사상을 강의해온 철학자 심세광 선생이 역시 철학 연구자 전혜리 선생과 함께 만든 모임입니다.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을 번역하는 것을 비롯해 푸코와 루이 알튀세르, 질 들뢰즈 등을 중심으로 프랑스 현대 비판철학 전반을 연구해왔지요. 모임은 작지만 이들의 성과는 만만치 않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오트르망’을 치면 이들이 번역한 책들이 주르르 뜹니다. <정신의학의 권력>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주체의 해석학> 등등. 물론 <담론과 진실>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예술과 다중> 등 각자의 이름으로 번역한 책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최근에는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이라는 학자가 쓴 <새로운 세계합리성>도 번역하는 등 외연도 확대하... -
내가 소식하려는 까닭은
얼마 전부터 하루 두 끼 식사로 만족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공부해 온 어느 분의 고요한 눈빛을 본 뒤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원문을 3년에 걸쳐 모두 읽은 뒤, <춘추좌전> 읽기 모임을 시작한 분이었지요. <사기> 원문의 글자 수가 약 56만자, <춘추좌전>은 그 절반 정도이나 훨씬 더 난해한 책입니다. <춘추좌전>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도 <사기>를 능가합니다. 몇 달도 쉽지 않은데, 몇년씩이나 걸리는 독서를 이어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는 오후불식(午後不食), 하루 두 끼 식사를 말했습니다. 소식으로 절제하며 매일 새벽 깨어나 공부하는 것을 습관화하다 보니 긴 공부를 어렵잖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겉으로나마 그를 따라 하고 싶었습니다.그러나 지식과 정보량이 폭증하고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 시대에 수천년 전의 고전을 몇년에 걸쳐 읽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공동체에서... -
인문학공동체에서 불교학교를 연 까닭은
인문학 공동체에서 하는 공부는 이른바 문사철과 외국어가 주류입니다. 그러나 막상 공동체를 시작하고 보니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피아노 연주, 작곡, 드로잉, 연극, 집짓기, 풀과 나무, 목공,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 공부 모임도 꾸리고 싶었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깊이 공부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결국 신학자를 모셔 희랍어 히브리어 성서 읽기를 하는 한편 스님을 모셔 도심 속의 불교강원을 개설했지요. 성직자나 수행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것들을 우리도 공부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불교강원에는 당시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이던 원철 스님을 비롯해 화엄학림 학장을 지냈던 법인 스님 등 쟁쟁한 스님들이 참여하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큰 꿈을 안고 닻을 올렸으나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속성이었습니다. 유명 스님들은 생각보다 바빴고 직장인이 긴 공부를 이어가는 것 또한 예상외로 어려웠습니다. 처음 강의를 맡았던 스님들이 ... -
에피쿠로스의 정원
“젊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되고 늙었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피곤해해서도 안 된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너무 이른 나이도 없고 너무 늦은 나이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할 나이가 아직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에는 아직 나이가 안 됐다거나 더 이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실린,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편지 중 일부입니다. 얼마 전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제3기 서양고전철학 원전 읽기(서양고철)를 시작하며 에피쿠로스의 이 편지를 다시 읽었습니다. 2011년 8월, 이 모임의 시작을 기다리며 누군가가 공동체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서양고철이 닻을 올리던 당시의 긴장과 설렘이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서양고철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서 소피스트들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회의주의학파, 에피쿠로스학... -
화가가 된 전직 경영학 교수
“너 자신을 위한 목표들, 고귀한 목표를 세워라. 그리고 그것들을 추구하며 파멸하라. 위대하고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며 파멸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나는 알지 못한다. 위대한 영혼은 아낌없이 탕진한다.”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유고>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니체의 철학은 겁 없는 청년을 위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이전에 지녔고 심지어 지금도 은근히 버리지 않고 있는 꿈과 목표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감내하는 것. 그러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며 원했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체념하며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어 뒤늦게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공부가 깊어도 학위 하나 주지 않는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왜 쓸모도 없는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철학... -
보릿고개를 넘는 법
공동체, 커뮤니티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인문학 공동체의 꿈은 자본주의의 기획을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는 비제도권 공동체가 강좌나 세미나, 스터디를 지속하려면 사람들이 와야 합니다. 이들이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강좌나 세미나에는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설혹 왔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바로 떠납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 공동체가 선 자리는 난폭한 자본주의의 최전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는 사람의 수가 강좌나 세미나에 달린 것만도 아닙니다. 시장이 대개 그렇듯이 계절도 극심하게 타는 편입니다. 인문학 공동체에 봄은 보릿고개입니다. 벚꽃이 피면서 수강자 감소가 눈에 띄기 시작해 5월 이후에는 등록하는 분들이 확연하게 줄어듭니다. 연초에 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의 수가 절반을 겨우 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계절에도 선전을 펼치는 공부 모임이 없지는 않습니다. 한 철학자가 강의하는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 -
어른의 공부
작년과 재작년, 대안연구공동체에서는 몇몇 대학과 대학원의 강의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로 갈 곳을 찾지 못한 학자들의 온라인 강의였습니다. 특히 한 학자는 서울대 대학원과 고려대 대학원, 성균관대 대학원 등의 강의를 공동체에서 진행했습니다. 이 학자는 칠판이나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쓰면서 강의를 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서울대, 고려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판서를 하면서 실시간 온라인 강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습니다.대학의 무신경과 안이함 탓으로 적어도 온라인 강의 시스템에서는 작고 가난한 인문학 공동체가 국내 최고의 대학을 앞섰던 겁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며 토론을 포함한 어떤 형태의 수업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강의 시스템을 세팅하며 제도권 대학의 강의를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었습니다. 예상했지만 서울대, 고려대 대학원의 강의라고 해서 여기서의 강의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다르다면 학점과 시험이... -
어느 미술사학자 이야기
대학 독일어과를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 미술사로 유서 깊은 대학에서 서양미술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음. 르네상스 미술을 전공하고 그리스 로마 미술을 부전공하며 이탈리아어와 희랍어, 라틴어를 공부했고 고전고고학, 로만어문학 등에도 깊은 통찰을 지님. 대안연구공동체의 강의 공지에 적은 어느 학자의 이력 중 일부입니다.1980~1990년대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으니 당연히 대학의 문을 두들겼겠지요. 그러나 대학과의 만남은 행복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그가 교수 초빙 면접에서 만난 어느 사학의 이사장은 기념으로 나무 한 그루만 심어달라고 했답니다. 나무 한 그루쯤이야 뭐, 하고 생각했는데 나뭇값으로 1억원을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기한 그 자리에는 훗날 허위학력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신모씨가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대학에서는 아예 1차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기도 했답니다. 그가 대학에 제출한 서류는 저서만도 수십 권이었습니다. 책이라도 돌려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