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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불러드릴까요
명함 없이 지낸 지 반년이 넘었다. 나는 별 생각이 없는데, 가끔 주변에서 난감해할 때가 있다. 강의를 의뢰하는 담당자가 “저, 호칭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조심스럽게 묻기도 하고, 미팅이나 회의 시 e메일, 휴대전화 같은 개인정보를 별도로 알려드려야 한다. 대다수는 전 직장 호칭인 ‘본부장’으로 부르지만, 가끔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앗, 이분 직함이 뭐더라’ 멈칫하거나, 엉뚱한 직함으로 부르는 등 호칭 때문에 실수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30여년 직장 생활 중 호칭과 관련한 몇 가지 기억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30대 후반, 사회혁신을 표방하는 민간재단에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여기는 CEO가 나이, 직급, 직책 불문하고 ‘○○씨’로 통일하자고 제안, 본인부터 솔선수범했다. 23세의 신입 연구원이 ‘경아씨’하고 불렀을 때 기억이 또렷하다. 솔직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점이 더 많게 느껴졌고, 실제... -
착각 지향의 한국인
여행은 본심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여행에서 본심을 드러낸다. 일상은 행복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이라 꾸역꾸역 참아내지만 여행은 보는 것, 먹는 것, 하는 것 모두 행복의 쟁취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익숙한 사람들도 여행에서 달라지곤 한다. 한국인의 여행법에는 한국인의 본심이 담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여행지는 ‘한국 사람은 안 온다’는 여행지다.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지만 한국인은 모르는 곳, 그런 곳이다. 내가 한국인이지만 여행지에서 한국인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지를 유혹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표현이 ‘한국인들은 아직 모르는 곳’이다. 한국인들은 회를 평가할 때와 소고기를 평가할 때 관점이 다르다. 이웃 일본인은 소고기를 평가할 때 마블링 위주로, 회를 평가할 때도 감칠맛 위주로,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소고기를 평가할 때는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마블링 위주로 보지만 회를 평가할 때는 식감을 중시한다. 그래서 일본인은 붉은살... -
후회의 문법
한 해의 끝자락에 설 때마다 시간의 오묘함을 새삼 느낀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한 해는 어김없이 다시 시작된다. 그 불가역성과 순환성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삶의 한 매듭을 지을 수 있다. 이 무렵 마음의 풍경은 어떤 모양과 색채로 그려지는가.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감사보다는 원망이 짙게 배어난다면 왜 그런가.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쇼핑을 권유하는 상투어 가운데 하나다. 그 말을 믿고 카드를 긁었는데 곧 충동 구매였음이 드러나기 일쑤다. 상품의 선택이라면 비교적 간단하게 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주식이나 가상통화 투자, 주택 구매, 학과나 직장 선택 등의 경우에는 탄식이 깊다. 미련과 집착에 시달리고 이불킥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손실을 만회하거나 진로를 바꾸는 데 시간과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훨씬 더 뼈저린 회한이 있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들이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것, 몸을 돌보지 않은 것, 여행을 많이 하지 못한 것, 도전적으... -
고통은 잴 수 없는 것
“100세 시대에 20대 초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이 대담한 책 <최재천의 공부>에 나오는 구절이다. 100세 시대를 맞아 내가 몰랐던 지식을 탐구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더욱 넓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공부 하면 내로라하는 석학인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공부법은 말 그대로 진짜 ‘빡세게’ 하라는 주문이었다. 독서는 빡세게 해야 하고, 나의 생각이 자리 잡는 글쓰기에 집중해야 하며,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진짜 공부를 하라는 식이다. 데드라인 일주일 전에 원고를 마감한다는 대목에서 절로 탄성이 나온다. 천성이 게으른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넘사벽’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돌아보며, 다시 공부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최재천·안희경 두 분이 제안한 것처럼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공부는 무엇일지 숙고하게 된다. 이 화두를 잘 푼다면 앞으로의 내 50+ 인생... -
관계인구로 살아보기
“지역은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런 처방 없다가 이제 시한부 선고를 하고 감기약을 처방하고 있다.”내년부터 시행되는 ‘고향사랑 기부제’ 도입을 앞두고 개최된 콘퍼런스에서 인구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강원도 한 군청 팀장의 첫 발언이다. 이어서 “고향세를 통해 우리 지역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재정 확충보다 ‘인구’다. 땅은 넓고 사람은 없다. 출생률, 귀촌 인구를 늘려서 막아보자는 정책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대신 일상으로의 초대, ‘관계인구’를 넓히는 게 핵심이다”라고 했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발표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기존 귀농·귀촌 정책의 획기적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관계인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관계인구’란 체류시간에 관계없이 지역의 팬으로, 상품 구매자로, 투자자로, 아이디어 제공자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꾸준히 지역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보다 지역 소멸 문제를 먼저 고민해 온 일본에서는 2016년부터... -
“나만 남편 있어, 젠장”
에피소드 하나. 사회생활에 치여서 신혼여행 말고는 아내와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남편이 은퇴한 뒤에 아내에게 패키지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니지.” 부부 중 한 명은 사회생활에, 한 명은 가정에 집중하면서 ‘부부적 거리 두기’를 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에피소드 둘. 유럽은 호텔 객실에 트윈 베드가 있는 방이 적은 편이다. 얼마 전 동유럽 여행 때도 트윈 베드 방이 좀 부족했다. 그래서 일부는 더블침대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 부부를 주로 더블 침대 방에 배정했다. 그때 한 부부가 동시에 항의했다. “아니 부부라고 더블침대를 쓰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부부는 진심으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에피소드 셋. 여행에 와서 “저는 아내를 주인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섬기면서 지냅니다”라고 은퇴 이후의 부부관계를 말하는 중장년 남성이 있었는데 바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지당했다. 그런... -
교학상장
지난여름에 방영이 시작된 예능 프로그램 <최강 야구>를 가끔 본다. 프로팀에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된 ‘몬스터즈’ 팀이 고등학생, 대학생, 18세 이하 국가대표팀 등과 시합을 벌이고 있다. 후배들과의 부담 없는 친선 경기가 아닐까 싶지만, 매번 필승의 각오로 치열하게 대결한다. 7할 승률을 목표로 기획되었는데, 결코 만만한 승부가 아니다. 어린 선수들이 ‘대선배’들과 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여느 프로 경기 못지않게 박진감 넘친다.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후배들의 탁월한 플레이에 경탄하면서 한 수 배우는 태도다. 모든 스포츠 경기 자체가 자연스럽게 학습을 수반하지만, 나이와 경험에서 한참 아래인 팀에 패하면서 자기의 약점을 확인하는 모습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연령의 차이가 수직적 서열을 자동 생성하는 문화에서는 관계의 각도를 약간만 바꿔도 새로운 기운이 순환한다. 그러한... -
‘사람의 자리’를 생각한다
‘사람의 자리’가 몹시 위태롭다. 안전하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나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생물학적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태원 참사는 사람과의 연결을 피하고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생각을 더 확산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이런 시대에 생활의 리듬을 바꾸고자 고민하고, 기후 위기 시대 생명을 생각하며 존엄한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가까울 것이다.소위 먹고사니즘이 압도하는 사회는 절대 좋은 사회가 아니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등 3고(高) 위기는 특히 저소득 시민들의 삶을 덮쳤다. 소득이 낮을수록 식비 지출 비중이 커졌다는 11월21일 통계청 발표는 이번 겨울이 ‘불만의 계절’(존 스타인벡)이 될 수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처럼 들린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의 경우 가처분소득의 절반이 ‘식비’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지금 당장 근근이 한 끼니를 위해 소득의 절반을 먹고사는 데 지출했다는 ... -
각자도생을 거부한다
너무 많은 글과 말이 쏟아지고 있는 요즘, 굳이 말을 더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생각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뭐라도 한마디씩 뱉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10월30일 일요일 오전 6시. 단톡방에서 첫 소식을 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취하는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다. 연거푸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다. 아들이 종종 외국인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노는 걸 알기에 이미 심장은 쿵쾅거리고 맥박도 빨라졌다. 아들에게 ‘자고 있었어’라는 답이 올 때까지 30여분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한 아들도 친구들은 괜찮은지 걱정하며 참담하다고 했다. 그날 대한민국의 아침은 전 국민 안부 묻기로 꽤나 분주했다. 20대 자녀를 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노부모들도 머리 희끗한 중장년 자녀와 가족을 챙기며 ‘별일 없다, 다행이다’라는 말이 오갔으리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별일이 없는가. 친구 J는 아들이 군 복무 중이어서 그럴 일은... -
애도의 온도
애도의 온도, 분노의 탄착점, 2차 희생양. 이태원 핼러윈 참사 뒤에 보여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이 3개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납득할 수 없는 참사에 대해 어떤 이들은 ‘애도의 온도’가 적절하지 않다고 탓했고, 어떤 이들은 진실 규명에 앞서 분노의 대상을 지목하는 데 집중했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적 애도의 희생양이 되었다.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번 참사에 대한 애도의 온도를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했다. 그런데 타인의 애도가 나보다 애도의 온도가 낮다고 질책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의 애도 온도가 상대 온도가 아닌 절대 온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절대 온도에 도달하지 않는 애도를 질타했다.이는 MZ세대의 차별적 표현을 쓰지 않으려는 PC(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현상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게 왜 이태원 같은 곳에 가서 그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