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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부산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은 부산에 있는 수산물 시장이다. 보통 2006년 중구 남포동 부둣가에 개장한 갈매기 날개를 형상화한 7층의 현대식 건물을 자갈치시장이라 부른다. 하지만 영도대교 바로 옆의 건어물 시장에서부터 서쪽으로 해안을 따라 서구 충무동의 충무동공동어시장까지를 통칭해 자갈치시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자갈치시장이 바닷가에 길게 늘어선 노점 형태로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의 옛 이름은 남빈(南濱)이었다. 남쪽 물가라는 뜻으로 일본인이 붙인 이름인데, 이곳 해변은 굵은 자갈로 이뤄져 있었다. ‘자갈치’란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곳에 수산물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본인들이 1922년 부산어업협동조합을 만들어 수산물 위탁판매를 시작하면서부터다. 1931년엔 자갈치 해안을 메워 어업기지인 남항(南港)을 건설하였는데, 남항에서 출어하는 영세 어선들의 어획물을 판매하는 노점들이 부산어업협동조합 위탁판매장 주변에 모이면서 자갈치시장이 형성되었... -
(143) 국군의날
1950년 10월1일 국군이 38도선을 처음으로 돌파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 국군의날이다. 국군의날은 1956년 제정되었다. 34년 만에 공휴일이 된 2024년의 국군의날에는 2년 연속으로 시가행진이 진행되었다. 2년 연속 국군의날 시가행진이 벌어진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 이래 무려 40년 만의 일이다.박정희 정권 들어 해가 거듭될수록 규모가 커진 국군의날 행사는, 전두환 정권 때는 거의 모든 부대와 무기체계가 투입되는 국가적 대사가 되어 1980년부터 1984년까지 5년 연속 시가행진이 벌어졌다. 수천명의 학생을 동원한 카드섹션도 북한의 그것과 경쟁이라도 하는 듯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군사정권과 국군의날 시가행진은 성쇠를 함께했다. 6공화국 이후 시가행진은 3년, 4년, 5년으로 띄엄띄엄 진행되다 문재인 정부 때는 한 번도 진행되지 않았다. 사진 속 시가행진이 벌어진 장소는 서울시청 앞이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지금은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구 서울시... -
(142) 참성단
1971년 참성단 사진과 비교되는 현재 모습을 찍기 위해 마니산을 올랐다. 만만해 보이는 472m 높이의 마니산 등산은 출발 10분이 지나자 앞서가며 다정하게 셀카를 찍던 연인들의 휴대폰을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게 했고 주고받던 대화도 끊기게 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은 한걸음에 올라가는 게 벅찼고 바위돌덩이가 얽혀 있는 ‘암릉’ 구간이 나타나자 숨이 ‘헉’하고 막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손도 발처럼 활용하는 이 등산로를 단군이 올라가 마니산 정상에 단을 쌓고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곳이 참성단이다.이후 고려와 조선 왕조는 매년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 길로 행차했다. 국가 행사였지만 왕 대신에 관리가 참성단에서 제를 지냈다고 한다. 평소 운동 부족인 왕이 마니산 꼭대기를 오르내렸으면 승하(昇遐)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왕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너무나 힘이 들어 하산하던 등산객에게 “참성단까지 얼마나 걸리나요”라고 물었는데... -
(141) 남산1호터널
남산1호터널은 서울 중구 예장동과 용산구 한남동을 연결하는 터널이다. 길이 1530m의 이 터널은 남산을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북쪽의 충무로, 을지로, 종로 등 도심과 남쪽의 한남대교를 건너 강남대로, 그리고 경부고속도로를 직접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1970년 개통한 남산1호터널은 전통적으로 동서로 발달했던 서울의 도로망이 남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강남 개발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두 사진은 1971년과 2024년 남산1호터널의 한남동 쪽 입구이다. 1971년에는 왕복 2차선의 터널을 택시들이 빠져나오고 있고 입구 양옆의 청동 조각상에는 비계가 설치되어 있어 아직 공사 중인 것으로 보인다. 2024년 사진을 보면, 오른쪽 조각상만 그대로이며 나머지 부분은 모두 달라졌다. 1970년대 이후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교통량 급증으로 터널 확장공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공사는 기존의 터널을 넓히지 않고 옆에 새로운 터널을 뚫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1994년... -
(140) 장충체육관
1969년 이른바 ‘삼선개헌’으로 세 번째 대통령 출마가 가능해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전했다. 중앙정보부와 행정기구와 수백억원으로 추산되는 엄청난 선거비용을 동원했음에도 94만표 차로 겨우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에 회의감이 들었다. 1972년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원칙에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그는 10월17일 계엄령을 선포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이른바 ‘10월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12월 ‘남’은 유신헌법, ‘북’은 주체사상을 명시한 사회주의헌법을 각각 제정함으로써 남북 화해 ‘쇼’는 권력 강화로 마무리됐다.유신헌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 2359명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게 된 제8대 대통령 선거는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사자후가 토해지던 장충단 공원 바로 옆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되었다. 무효표 2명을 제외한 전원이 찬성하여 박정희 후보가 99.9%의 득표... -
(139) 남이섬 선착장
중학생 때 남이섬을 처음으로 가족들과 놀러갔다. “남이장군 묘가 있어서 남이섬이라 하는데 원래는 섬이 아니었다”는 아버지 이야기가 신기했다. 일제강점기에 청평댐이 만들어지면서 북한강 수위가 높아져 내륙의 산이 봉우리만 남기고 물에 잠겼다. 그 봉우리가 남이섬이다.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들어간 남이섬에는 크지 않은 수영장이 있었다.대학 입학 후 남이섬에 1박2일 MT를 갔다. 섬을 왕래하는 배의 통행횟수가 많지 않아 가평역에서 배 시간에 맞추느라 선착장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선착장은 시골 장터처럼 붐볐는데 남이섬에서 열리는 1984년 MBC 강변가요제 방송 때문이었다. 남이섬 중앙 잔디밭에 세워진 무대에서 이선희가 부른 ‘J에게’가 대상을 차지했다. 방갈로라는 낯선 용어인 숙박시설에서 대학생들의 통기타 소리가 강물처럼 평온하게 흘러가는 낭만의 섬이었다.방송사 PD가 되어 남이섬 촬영 헌팅을 1995년에 왔다. 서울에서 접근성도 좋고 넓은 잔디밭에 아름드... -
(138) 광화문과 정부서울청사
1971년과 2024년의 두 사진은 모두 경복궁 안쪽에서 정부서울청사와 광화문을 바라본 것이다. 50여년 사이에 광화문 주위의 공터에 새로운 건물과 담장이 만들어졌고, 정부서울청사 주변에도 외교부 청사(정부서울청사 별관), 서울지방경찰청 등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두 건물은 별로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반만 맞는 사실이다. 정부서울청사는 변화가 없으나, 광화문은 거의 새로 지었다.1395년 경복궁의 정문으로 건립된 광화문은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865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도 다시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경복궁 일부를 헐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6·25전쟁 때에는 폭격으로 문루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사진에는 보이지 않으나, 해방 후 조선총독부 청사는 중앙청이 되었다. 그리고 1968년에는 ... -
(137) 문익점
고려 공민왕이 친원파의 핵심인 기철을 척살하고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자, 기철의 여동생이자 원나라 황후였던 기황후는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홍건적에 의해 수도 개경까지 함락당한 공민왕은 홍건적 견제를 위해 원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공민왕은 사신단을 원에 파견했지만, 기황후는 오히려 덕흥군(충선왕의 아들)을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에 원나라에 있던 사신들 대다수가 덕흥군을 왕으로 모시고 원의 후원하에 고려를 침입하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패배했다. 원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 편에 섰다. 반역 주도자들은 고려로 압송되어 처형되었지만 문익점은 마지못한 가담으로 인정되었던 것인지 파직에 그쳤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덕흥군에게 의부하였으나 덕흥이 패함에 미쳐 돌아왔다.” 고려로 돌아오면서 문익점은 역사에 남을 일을 한다. 면화씨를 챙긴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의 내... -
(136) 효창공원 삼의사 묘
탄창에 총알 8발을 한 발 한 발 장전할 때마다 떠오른다. 어머니의 얼굴, 눈물짓는 아내, 어린 자식의 미소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모습…. 총알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4발, 경호원들에게 3발이 명중됐다. 총을 발사한 자는 “대한독립 만세!”를 러시아어로 외치고 체포됐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일본 수사관에게 “나는 목적한 사람을 쏘았으니 그 후엔 발사할 필요가 없어서 멈췄다”고 대답했다. 그는 안중근이다.독립운동의 여러 방식 중에서 일제의 상징적 인물에게 폭탄을 던지거나 총을 쏜 의사(義士)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 등이 있다. 이들은 거사 후 고문, 사형이라는 끔찍한 고난에 기꺼이 동의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는 해방이 되고나서야 해외에서 봉환되어 1946년 효창공원에 묻혔다. 3인이 안장된 묘소가 ‘삼의사(三義士) 묘’다. 그런데 삼의사 묘소엔 묘가 3개가 아닌 4개 있다. 2024년 사진의 맨 왼쪽 ... -
(135) 청기와 주유소
푸른색 기와, 즉 청기와는 매우 고급스러운 건축재다. 조선 초기 경복궁을 지을 때 사용했고, 현대에는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靑瓦臺)가 청기와를 올린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으로 ‘청와대’의 의미는 많이 퇴색됐지만, ‘청기와’ 하면 자연스럽게 권위와 품격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이런 까닭에 ‘청기와’는 특히 한식집 등의 상호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조금 뜬금없이 이 이름이 붙은 업소가 있었다. 바로 서울 마포구 동교동, 양화로 변에 있던 ‘청기와 주유소’이다. 1971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건물과 주유기들이 설치된 곳의 지붕을 실제로 청기와로 이었다. 지붕이 격조 있는 이곳은 예사 주유소가 아니었다. SK에너지의 전신인 유공이 1969년 직접 만들고 운영한 한국 최초의 현대식 주유소였다. 그 면적이 무려 700여평에 달하였고, 주유소 안에서 식당이 운영되었으며, 정비와 렌터카 서비스도 존재하였다. 청기와 주유소는 위치도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