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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신문사 윤전기
종이신문 전성기가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신문사는 ‘호외(號外)’를 발행했다. 호외는 나라를 뒤흔든 사건·사고 발생 시 그 소식을 빠르게 전하려 발행하는 신문 형태의 인쇄물이다. 신문배달원들이 거리에서 “호외요!” 하고 호외 신문지 뭉치를 하늘 위로 뿌리면 뉴스속보가 삐라처럼 내려왔다.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신속히 전달한다”는 신문 본연의 임무 외에 종이신문은 재래식 변소(화장실) 휴지, 가난한 집의 도배지, 학생들 교과서 책 표지 그리고 땡볕을 막아주는 모자로도 변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신문을 모아놓은 신문스크랩은 정보의 보고(寶庫)였다.열혈 신문 구독자 헤겔은 “조간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기도”라고 했다. 앞날을 점치기 어려운 인간이 신에게 기도로 매달리는 것보다 신문을 펼쳐 세상 이치를 알아나가는 게 낫다는 말이다. 부르주아들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 민중도 저렴한 ... -
(117) 용문사 은행나무
1971년 사진은 푸른 잎을 달고 있는, 그리고 2022년 사진은 노랗게 물든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71년 사진의 나무 아래 서 있는 사람들과 2022년 사진의 나무 아래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건물로, 이 나무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신라시대 고찰인 용문사(龍門寺) 앞을 지키고 서 있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 은행나무는 최근에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이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검사한 결과, 키는 38.8m, 둘레는 11.0m, 무게는 97.9t으로 측정되었고, 나이는 1018살로 추정되었다. 아파트 17층 정도의 높이이며, 중형승용차 69대에 맞먹는 무게다.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의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이 나무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에 ... -
(116) 인사동
탑골공원 길 건너편에서 안국동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0.7㎞의 길을 인사동길이라 부른다. 인사동길은 원래 안국동천을 복개해서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 지금의 돌길 형태의 길은 건축가 김진애의 설계로 2000년에 재조성된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어 양반들이 벼슬에 못 오르자 북촌에 거주하던 양반계층이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양반들이 소유하던 고서화, 도자기 등 골동품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1926년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되자,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인사동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골동품을 수집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인사동은 골동품 상점으로 유명했지만, 가짜 고서화 사건 등으로 권위가 실추되자 1960~1970년대에 화랑이나 표구, 필방, 공예품 등 미술 관련 상점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 미술 관련 상점들이 늘자 미술 전시장들도 늘어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작가, 예술인 등이 모여들다 보니 전통찻집, 토속음식점 등이 생겨... -
(115) 김포가도
1인당 국민소득 250불이던 1971년에 촬영한 김포가도 사진은 전혀 한국 같지 않은 모습이다. 논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고 중앙분리대에는 분수대도 늘어서 있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평소 이 분수대는 가동하지 않다가 한국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이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진입하면 환영 세리머니로 물줄기를 뿜어 올렸다.대통령 박정희의 해외순방 시에도 분수대는 환송의 물을 뿜어냈다. 서울의 서쪽 끝, 양화대교 남단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김포가도는 1963년 완공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긴 7.1㎞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공항로’가 원래 도로명이었지만 남진의 노래 ‘김포가도’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은 ‘김포가도’라 불렀다.해외여행이 금지된 시절, 외국에 가는 박정희를 포함한 권력자들에게 김포가도는 꽃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출국할 수 있는 민중에게는 불안과 슬픔이 교차하는 도로였다. 휴전선으로 북쪽이 막혀 있어 국경을... -
(114) 우이동의 옛 그린파크호텔 입구
1971년과 2023년 사진은 같은 장소를 찍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멀리 산이 보이고 길 양옆에 숲이 있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숲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뒤로 보이는 두 개의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만 두 사진이 동일한 곳에서 촬영된 사실을 입증한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두 바위 봉우리가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와 인수봉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두 봉우리가 사진처럼 보이는 곳은 어디일까?먼저 1971년 사진에는 정면에 ‘백운문(白雲門)’이라는 현판을 단 전통 양식의 웅장한 대문이 보이고, 문 뒤 오른편 숲속에 현대식 건물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을 향해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들이 오르막길을 가고 있다. 2023년 사진에는 큰 대문이 사라지고, 대신 경비실로 추정되는 작은 구조물 좌우로 차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길 양편의 숲도 새로 조성되었으며, 오른쪽으로는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북한산의 모... -
(113)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草芝鎭)은 바다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한 해안 진지다. 초지진은 주변 평지보다 조금 높게 평평한 요새로 조성되었는데, 이것을 돈대(墩臺)라 부른다. 초지진은 원래 안산의 초지량(현재의 초지동)에 있던 것을 옮겨오면서 이름까지 따라온 것이다.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처음 구축했고, 1679년 숙종 때 성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1971년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강화는 한강 입구이므로, 강화가 뚫리면 한양을 막을 수 없어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강화 초지진은 지어진 지 200년이 넘은 고종 때가 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해병대가 이곳을 점령했고, 1875년 일본의 운요호에 의해 파괴되었다. 운요호와의 교전은 다음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로 귀착되었고, ‘문호 개방’으로 초지진은 할 일이 없어져 파괴된 상태 그대로 방치되었다.사진은 초지진의 출입문 쪽... -
(112) 진주성 3·1독립운동 기념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조선인들은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조선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시위를 주동할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민족대표 33인은 한 명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탑골공원에서 300m 떨어진 태화관 술집에서 그들끼리 행사를 했다. 이 시각, 조선인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탑골공원을 나섰다. 세계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가혹한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를 상대해야 했다. 유혈충돌이 발생했고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증폭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탑골공원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뇌관은 진주에서 터졌다.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 시위를 벌여야 했기에 시위 장소는 진주, 오일(五日) 장터로 정해졌다. 3월18일 진주헌병대는 조선총독부에 전화로 보고했다. “진주장터에서 조선인들 소요가 발생했습니다. 폭동분자들 중엔 ... -
(111)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
두 장의 사진은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에 있는 1971년과 2024년의 군산 내항 모습이다. 두 사진 모두 배들을 육지에 바로 접안시키지 않고, ‘뜬다리 부두’라는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연결한 다리 모양의 구조물에 대어 놓았다. 이 구조물은 부잔교(浮棧橋)라고도 한다.뜬다리 부두는 커다란 조차를 극복하기 위한 시설이다. 조차는 달과 태양의 인력에 의해 발생하는 썰물과 밀물 때 해수면의 수직적 차이다. 우리 서해안은 조차가 세계적이다. 서해가 동중국해를 향해 넓게 열려 있는 바다인 데다 수심이 얕기 때문이다. 조차는 아산만이 8.5m로 가장 크며, 이곳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감소하는데, 군산은 6.2m 정도이다.뜬다리 부두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폰툰이라는 상자형 구조물에 배를 대어 여객 승하선과 화물 하역을 할 수 있게 한 시설로, 폰툰은 조차에 따라 아래위로 움직인다. 뜬다리 부두는 서해안 여러 항구에 설치되어 있지만, 유독 군산 내... -
(110) 서울역 고가도로
인구 55%가 ‘민족 대이동’에 나섰다는 설연휴가 끝났다. 상당수가 서울역을 오고 갔을 것이다. 1900년 경인선 종점으로 영업을 개시한 남대문역은 1923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고,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경성역사가 완공된 시기는 1925년이다. 도쿄역에 이어 동양 제2의 규모였다. 그러나 KTX 운행에 맞춰 2003년에 지금의 민자역사가 지어지면서 사진 속 구 서울역사는 폐쇄되었고, ‘문화역서울 284’란 이름의 전시용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993년에 지어진 24층의 연세재단세브란스빌딩 등이 1971년 사진에는 보이지 않고, 자동차도로 확장으로 서울역 광장이 크게 축소된 것도 눈에 띈다.수많은 애환을 담은 서울역 광장 풍경이지만, 1971년 조성봉 선생이 찍으려 한 것은 서울역이 아닐 수도 있다. 사진의 전면에 걸쳐진 다리는 만리동과 회현동을 잇는 서울역고가도로인데, 사진 촬영 1년 전인 1970년 8월15일... -
(109) 강화대교
1971년에 촬영된 강화대교(구 대교) 사진과 동일한 구도의 현재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강화대교에 도착했다. 육지와 섬(강화도)을 연결하는 강화대교는 1969년 2차선 도로로 완공되었다가 늘어나는 차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폐쇄됐다. 현재는 사람과 자전거만 다닐 수 있고 구 대교라 부른다. 2024년 사진을 보면 오른쪽이 구 대교이고 왼쪽이 신 대교다.사진을 찍으려 구 대교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다가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지’라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방치된 낡은 표지판은 글자의 페인트 빛이 바래져서 그 내용을 간신히 읽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부역(협력)했다는 강화도 주민 60명(70세 노인, 갓난아기 포함)을 강화향토 방위특공대가 재판절차도 없이 갑곶선착장에서 총살했다. 갑곶선착장은 구 대교 다리 밑이다.사진기 뷰파인더에 구 대교가 보이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부역자들이 나타났다. 갑곶선착장 가는 길은 가팔라서 어린이 부역자들은 엄마 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