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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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34) 부산 서면

    (134) 부산 서면

    부산은 조선시대에 동래현, 동래도호부, 동래군, 동래부 등으로 불렸고 바다에 면한 포구를 ‘부산포’(현재 부산의 동구)라 했으니, 부산은 동래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자 조선 조정은 부산포, 내이포(진해), 염포(울산) 등 삼포(三浦)를 일본과의 무역 장소 및 거주지(왜관)로 지정하여 교류를 양성화했다.하지만 열린 곳은 곧 침략의 입구이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포에 설치된 부산진은 일본군의 첫 공격 장소가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부산포 주변(동구, 서구, 중구, 영도구)은 개항장이 되면서 일본의 조계가 형성되어 일본의 경제침략 첨병이 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 후에는 동래부 전체가 ‘부산부’로 개칭됨에 따라 동래가 부산이 되었다. 하지만 1914년에는 부산부가 개항장 일대로 축소되고 나머지 큰 지역은 ‘동래군’이 되어 부산과 동래가 분리되었다.동래군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일제강...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33) 유성온천 만년장

    (133) 유성온천 만년장

    건물이 철거돼 터만 남은 2024년 사진은 ‘만년장’이 있던 곳이다. 1958년 대전 유성구 유성온천에서 장급 호텔로 개업한 만년장(萬年莊)의 한자표기인 장(莊)은 ‘장소를 뜻하는 장(場)’이 아닌 ‘풀이 성할 장(莊)’으로, 별장·산장 등 고급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접미사다. 만년장은 현재 흔적조차 없다. 철거하면서 부서진 건물더미 잔해 속에 파편처럼 묻혀 있는 단어들로 유성온천의 역사 퍼즐을 맞춰본다. [전설] 백제 말에 날개에 상처를 입은 학(鶴)이 눈이 녹아 생긴 뜨거운 물웅덩이에 며칠간 몸을 담그고 나서 훨훨 날아갔다는 전설이 유성온천의 유래로 전해진다. [환장] “피부병, 신경통 등을 치료하고 음용 시, 위장병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온천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온천 휴양지로 개발했다. 개발 전에는 뜨거운 물이 땅 위로 솟구쳐 나와 겨울철 아낙네들이 환호한 빨래터였다.[방문객] 조선의 도읍지를 물색하던 이성계가...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32) 남산 팔각정

    (132) 남산 팔각정

    팔각정은 평면이 정팔각형으로 된 정자다. 한국 곳곳에 전망이 뛰어나거나 경치가 좋은 장소에 팔각정이 세워져 있으나, 아마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팔각정은 서울 남산 정상에 있는 ‘남산 팔각정(南山 八角亭)’일 거다. 이곳에서는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특히 밤에는 멋진 야경을 감상할 수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 보이는 남산 팔각정은 1968년 건립되어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건물은 아니다.물론 이렇게 가치 있는 자리가 그 이전에도 비어 있진 않았다. 남산이 풍수지리상 한양도성의 안산(案山) 역할을 하던 조선시대엔 이 자리에 목멱신사(木覓神祠)란 신당이 있었다. 목멱신사는 목멱산, 즉 남산의 산신에게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으며,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를 지내서 국사당(國師堂)이라고도 했다. 1925년까지 존재하던 국사당은 일제에 의해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졌다.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자...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31) 청주 ‘명암약수터’

    (131) 청주 ‘명암약수터’

    ‘라떼’ 얘기로 시작해 보자. 한때 먹는 물은 끓여 먹던 시절이 있었다.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아서 보리차를 한 움큼 넣어 끓여 먹었다. 보리차에서 옥수수차로 유행이 바뀌기도 했다. 그 시절엔 끓이지 않은 물을 바로 먹는다는 것은 어떤 ‘결핍’을 의미했다. 물을 끓여 먹을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거나, 뛰어놀고 있기에 물을 끓일 수 없음을 의미했다. 심한 경우는 ‘곯은 배를 물로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하지만 끓이지 않아도 칭송받던 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약수’(藥水)다. 약수는 지하수가 솟아난 것이다. 수돗물에 대한 불신 때문에, 혹은 약수가 몸에 좋다는 믿음으로 전국의 약수터 앞에 새벽마다 약수 받는 통이 줄을 서던 시절이 있었다. 수도권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있는 약수역의 이름도 버티고개에 있던 ‘옥정수’에서 왔다고 한다.사진 속 멀리 ‘약수’라는 글자가 선명한 이곳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청주의 명암약수터다.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있는 ...
  • [반세기, 기록의 기억](130)평택 쑥고개

    (130)평택 쑥고개

    길을 잃고 헤매는 치매노인에게 경찰이 묻고 노인이 답했다. “어르신, 집 근처에 큰 건물이 뭐가 있어요?” “미군공군기지가 있어.” “공군기지면 오산기지인가요?” “맞아.” 경찰은 노인을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오산으로 갔다. 그런데 미군기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산 미군공군기지’는 오산에 없고 평택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평택군 송탄읍에 주둔한 미군공군기지는 ‘평택’ 혹은 ‘송탄’으로 작명되어야 했다. 그런데 미군 비행기 조종사들이 통신할 때, 평택(Pyeongtaeg), 송탄(Songtan)을 발음하기 어렵고 철자도 길어서 발음이 쉽게 되는 인접 지역 ‘오산(Osan)’을 선택했다. 그래서 ‘오산 미군공군기지’가 되었다. 평택 ‘오산 미군공군기지’에 도착했지만 노인은 자기 집을 찾지 못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노인이 언덕길을 보고 말했다. “생각났어. 우리 집 주소가 쑥고개야. 소나무숲이 우거졌고 어릴 적에는 숯고개라고 했지. 구운 숯을 사람...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9) 경복궁 경회루

    (129) 경복궁 경회루

    두 사진은 1971년과 2023년의 경복궁 경회루(慶會樓)를 담고 있다. 경회루의 외관은 50여년의 세월 동안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다만 1971년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1층의 돌기둥에 청색과 황색 천을 씌어 놓았다. 경복궁 근정전의 서북쪽 연못 안에 있는 경회루는 조선시대 때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작은 누각이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인 1412년 연못을 확장하면서 누각을 다시 크게 지어 경회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았다가, 270여년이 지난 고종 때인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사각형의 섬을 만들어 그 위에 누각을 세웠고, 돌다리 3개를 놓아 육지와 연결하였다. 돌다리 가운데 사진에 보이는 가장 남쪽의 다리가 폭이 가장 넓어 임금이 이용하였다. 정면 너비가 34.4m, 측면 너비가 28.5m의 경회루는 한국에서 가장...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8) 철마는 달리고 싶다

    (128) 철마는 달리고 싶다

    1953년 종전과 함께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원산으로 가던 경원선과 신의주로 가던 경의선은 운행이 끊겼다. 경원선의 철원 ‘백마고지역’, 경의선의 임진각에 가면 ‘철도중단점’이라는 표시와 함께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각 철도중단점 표지석 바로 뒤를 보면 ‘미카3-244호’ 증기기관차가 있다. ‘미카’(일왕을 가리키는 ‘미카도’에서 유래) 시리즈는 원래 미국에서 일본에 납품한 것인데, 임진각에 있는 것은 1944년 일본에서 자체 제작한 것이다. 기관차에 ‘영등포 공작창 1979년 9월19일’의 명판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볼 때 1980년 영등포 공작창이 폐지되기 1년 전 영등포에서 임진각으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철마는 달리고 싶다’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 허물어지고 부식된 사진 속의 ‘철마’다. 1971년 사진에서 보듯이 이 기관차는 비무장지대인 파주시 장단역에 녹슨 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의선 장...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7) 명동성당

    (127) 명동성당

    해외여행 중에 도시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다. 무더위 혹은 맹추위에 지친 몸이 오아시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절에 따라 시원하거나 따뜻한 공기가 맞아준다. 운이 좋으면 파이프 오르간 연주까지 들으며 예배용 의자에 앉아 졸아도 된다. 오아시스는 성당이다.민주주의가 압살당하던 한국에서 명동성당은 시위대에게 오아시스였다. 1987년 6월,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명동에 집결한 학생들은 유인물을 살포하고 구호를 외치며 전투경찰과 충돌했다. 사복 체포조에 쫓기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몸을 피했다. 피난처였다. 전두환 정권이 성당을 원천봉쇄하며 시위자 전원을 체포하겠다는 엄포에 김수환 추기경은 단호히 말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나를 먼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다음엔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을 것이고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을 것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통역관 김범우는 현재 명동성당 자리인 자신의 집에서 가톨릭 강좌...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6) 종로5가 약국 거리

    (126) 종로5가 약국 거리

    두 장의 사진은 1971년과 2024년의 종로5가 약국 거리를 찍은 것이다. 모두 여러 개의 약국 간판이 보인다. 1971년 사진에 보이는 ‘종오당약국’은 2024년 사진에 ‘종오약국’으로 이름만 살짝 바꾼 채 여전히 영업 중이다. 이 약국은 1962년 처음 생겼으며, ‘종오당’이 무당집처럼 느껴진다는 손님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1년에는 없던 지하도 입구가 2024년 사진 왼쪽에 등장한 것도 시간에 따른 변화다. 1981년 생긴 종오지하쇼핑센터의 출입구다.종로5가 약국 거리는 일제강점기 이곳에 한의원과 한약방들이 모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1957년 이곳에 들어선 한국 최초의 대형 약국인 보령약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유명한 제약회사의 약품을 대량으로 직접 사들여 도매가격으로 판 보령약국의 판매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 일대에 대형 약국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1960년대 초에는 “종...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5) 남산 분수대

    (125) 남산 분수대

    ‘남산’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남산타워나 케이블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린 시절 사랑의 맹세를 하며 채운 ‘자물쇠’가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지긋한 나이의 분들은 교복을 입고 새벽부터 줄을 섰던 남산도서관을 꼽을 수도 있다. 한때 “남산에서 나왔습니다” 하면 고문과 죽음이 연상되던 어두운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 남산은 ‘어린이회관’과 시원한 분수대가 있는 신나는 곳이었다. 조선이 개국하며 남산(南山)으로 불리게 된 이 명산에 공원을 조성한 것은 일제다. 1925년에는 일본 왕실의 ‘황조신’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는 거대한 규모의 조선신궁을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일제는 신사를 해체하고 주요 시설을 소각했다. 해방 정국에는 대규모 정치 집회가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 80세 생일 기념으로 24m의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혁명 때 끌어내려지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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